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뮤지컬 <마리 퀴리>에서 전하는 믿음의 메시지

by 채수빈

어릴 적 나는 ‘나라를 구한 사람들’을 위인이라 여겼다. 독립운동가들, 세종대왕, 광개토 대왕, 이순신 장군처럼 위기의 순간에 국민을 지키고, 삶을 바꾼 인물들.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 위인 전집’의 경우도 비슷했다. 슈바이처, 헬렌 켈러처럼 자신보다 타인을 위했던 인물들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반면 과학자들의 업적은 좀처럼 와닿지 않았다. 내게 그들은 위인이라기보다 그저 ‘대단한 과학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퀴리 부인> 위인전을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 라듐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구나. 아, 노벨상을 여성 최초로, 그것도 두 번이나 받은 사람이구나. 정말 대단하다…’ 그녀가 위인전에 실린 이유는 ‘최초로’ 라듐을 발견하고, 여성으로서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데에 있는 듯했다. 그렇지만 뮤지컬 <마리 퀴리>는 그녀의 업적을 ‘최초’가 아닌 ‘최후’에 초점을 맞춘다.



노년의 마리는 어머니의 인생을 궁금해하는 딸 이렌에게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 폴란드 출신의 유학생이었던 마리는 당시 러시아의 식민 지배를 받는 조국과, 여성의 교육권조차 제한되어 있던 현실 속에 살고 있었다. 이에 마리는 파리로 건너가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그녀의 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원소들을 발견하고,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삶에 기여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그녀를 연구실로 향하게 만든 믿음이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마리는 냉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식민 지배와 여성차별 속에서 파리로 유학을 떠난 마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매일 느끼며 살아간다. 그녀는 딸과 보낼 시간도, 안정을 누릴 여유도 없다. 오직 수많은 실패를 딛고 다시 실험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이번 실험에 대한 믿음이 실패로 끝난다면 곧바로 다음 실험을 시작해 새로운 믿음을 품어야 한다. 수많은 실험을 거쳐 그녀는 마침내 폴로늄에 이어 라듐을 발견한다. 자신의 모든 믿음들이 응축된 것이 라듐이라 믿으며 “나는 라듐”이라 외치는 마리의 모습으로 1막은 끝난다. 오직 연구에 대한 믿음 하나로 달려온 마리의 청춘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그래, 이 뮤지컬은 믿음에 대한 이야기다. 믿음이 변치 않는 과정은 결과를 이미 정한 실험과 같다. 실망 속에서 다시 믿어보는 용기를 요하기 때문이다. 이때 실험을 방해하는 것은 기존의 믿음이 틀렸다는 걸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다.


극의 2막에서는 그러한 '방해'가 드러난다.



마리의 믿음을 이루는 것은 마리 주변 인물들의 마리를 향한 믿음이기도 했다. 1막에서 기차 안에서 만난 안느는 잠깐의 인연이지만, 마리에게 힘을 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남편 피에르는 든든한 연구 파트너이자, 그녀의 삶을 지지한 진심 어린 동반자였다. 기업가 루벤은 마리가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리는 이들의 믿음을 지지대로 삼아 연구를 이어간다.


퀴리 부부는 라듐 기술을 독점하여 이익을 내기보다, 라듐에 대한 연구가 보다 활발히 이루어지길 바랐다. 그래서 특허를 출원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라듐에 대해 연구할 수 있도록 기술을 개방했다. 그렇게 라듐이 대중적으로 알려지면서 20세기 초 건강용품, 화장품 등 다양한 실생활 분야에 라듐을 활용하는 사업이 유행한다. 그러나 방사선 과다노출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라듐의 유해성이 점차 밝혀지면서, 마리는 처음으로 실험을 진행하기 앞서 머뭇거린다.



가상의 인물 안느는 ‘라듐 걸스’를 상징하는 인물이자, 마리 퀴리의 최후의 선택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단지 실험의 결과만이 아니라, 그 실험이 만들어낸 이름 없는 죽음들, 말해지지 않았던 피해자들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다.


과학자이기에 끝까지 과학을 믿고 싶은 마음과, 인간이기에 더는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마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찾아주는’ 선택을 하게 된다. 피에르의 죽음을 맞이하며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긴다. 원소를 찾아내서 이름을 붙여주었듯이, 피에르의 부검을 통해 잊힌 자들의 진짜 사인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이름을 찾아주기 시작한다.


이 선택은 이후의 삶으로도 이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마리는 직접 X선 차량을 몰고 전장을 누비며 100만 명의 생명을 살린다. 프랑스와 폴란드에 라듐 연구소를 설립해 수많은 의료 연구의 토대를 만들었다.


<마리 퀴리>는 내가 떠올렸던 위인전 속 ‘대단한 과학자’로서의 삶을 그리지 않았다. 마리 퀴리의 이야기에는, 믿음을 끝까지 책임진 사람으로서의 위대함이 있었다. 여기서 ‘책임’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기꺼이 보려는 태도다. 내가 타인에게 미쳤을 영향을 보려는 자세를 의미한다.


극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넘버의 제목 역시 <또 다른 나>이다. <마리 퀴리>는 마리 퀴리가 만든 ‘최초의 것들’이 아니라 ‘최후의 선택’을 만든 과정을 그린다. 마리 역시 '보이지 않는 누군가'였을 때 믿어준 누군가가 있었고, 이는 훗날 그녀의 다른 믿음으로 이어졌다.



내가 본 회차는 박혜나 배우가 '마리 퀴리'를 맡았다. 한계가 없는 박혜나 배우는 꿈에 찬 청년의 마리와, 책임을 다하려고 하는 노년의 마리를 눈부시게 표현했다. 전민지 배우는 당차면서도 간절한 안느의 외침을 소중하게 담아냈다. 차윤해 배우는 동료이자 연인인 피에르의 두 면모를 빠짐없으면서도 따뜻하게 그렸다.


관객석에는 유독 부모님과 함께 온 어린 여자아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미래의 마리 퀴리들이 될 수 있을 아이들과 함께 뮤지컬을 함께 봄에 감사했다.


아,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본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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