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론테 자매의 이야기를 상상하다
극은 샬롯 브론테가 관객석을 가로질러 등장하며 시작된다. 그녀는 관객들에게 도발적으로 묻는다. “가장 좋아하는 브론테 자매의 소설이 뭐죠?” 관객이 대답하기도 전에, 샬롯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다. 붉은 드레스와 부츠를 신고 무대에 오른 샬롯은, 마치 록스타처럼 당당하고 건방지며, 동시에 불안정하다.
영문학사 내 최고의 작가 자매들은 단연 브론테 자매들일 것이다. 다만 샬롯, 에밀리는 기억해도 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이 없다. 아니, 앤이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첫째 언니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와 둘째 언니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가려져서 그렇지, 앤 브론테 역시 뛰어난 작가였다. 앤 브론테는 가정 폭력과 남성의 위선을 고발하는 급진적 문제의식을 작품 속에 담았고, 서문에서 “진실은 그것을 받아들일 자에게 스스로 도덕적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던 작가다.
다만 앤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대표작 <와일드펠 홀의 세입자>는 샬롯에 의해 재출간이 막혔다. 결국 앤의 문학은 샬럿이 남긴 후대의 이미지 속에서 점점 흐려진 셈이다. <언더독>은 역사적 픽션을 그려 앤을 다시 무대로 소환한다. 샬롯이 동생 앤의 재능을 질투했고, 자신의 대표작 <제인 에어>의 설정을 앤이 쓴 <애그니스 그레이>에서 차용했을 수 있지 않겠냐는 가설을 내놓는다.
여기서도 앤의 이야기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라 ‘샬롯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진다. 의도한 아이러니겠지만, 공연의 서사는 전적으로 샬롯의 시선으로 흘러간다. 샬롯은 관객에게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모든 것은 샬롯의 이야기다. 샬롯은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보이기 위해 나르시시스트적인 면을 숨김없이 내보이며 동생들을 짓누른다.
극의 마지막에서는 여성 인물들의 전기를 쓰는 작가가 샬롯을 신랄하게 인터뷰한다. 그녀의 질문은 참으로 교묘하다. 우리가 예술가를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하느냐는 결국 우리의 욕망에 따른 것임을 깨닫게 된다. 기억의 서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왜곡되는지, 여성 예술가들이 어떤 경쟁 속에서 살아야 했는지, 현재도 진행 중인 '여성 신화 만들기'를 위트 있게 꼬집고 있다.
실제로 관객들 사이에서도 샬롯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내 뒤에 앉았던 관객은 샬롯에게 진저리치고 있었다. 반면 나와 극을 같이 본 친구는 샬롯의 장녀로서의 야무짐을 높이 평가했다. 나는 샬롯이 안쓰러웠다. 나 또한 그녀처럼 쉽게 '긁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말이나 태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 우리는 흔히 이 '긁힘'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사실 잘 긁힌다는 건 그만큼 삶에 진지하다는 뜻이 아닌가. 그녀는 문단의 냉소와 외모에 대한 조롱 앞에서 상처받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와 당당히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나가는 인물이다.
<언더독>의 연출은 핵심 장면만을 날카롭게 붙잡고 군더더기를 과감히 덜어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한 장면에서는 런던의 문단 클럽을 디스코 파티처럼 연출해 시대의 불협화음을 코믹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무대 디자인은 양피지와 소설 보관함, 작업용 테이블만을 덩그러니 남겨 자매들에게 소설 쓰기가 목숨과도 같았음을 표현한다.
의상은 각 인물의 성격과 관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세 자매의 색 대비는 마치 신데렐라의 세 인물을 보는 듯한 구조를 형성한다. 샬롯은 강렬한 빨간 드레스를 입고 무대 위를 활보한다. 에밀리는 초록색, 앤은 하늘색을 입는데, 각각 중재자적이고 지적인 중간자, 부드럽고 감수성 풍부한 막내의 역할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역사는 언제나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을 따른다. 이름이 남는 이들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승자’이거나, 서사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반대로 주변 인물, 혹은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은 점점 희미해진다. 그래서 역사에서 소외된 이들을 다시 불러내려는 시도는 언제나 흥미롭다. 다만 작품의 각색이 지나치게 과감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샬롯이 동생의 작품에서 일부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녀의 불멸의 걸작 <제인 에어>는 엄청난 소설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유로운 해석은 브론테 자매의 역사가 아닌 '신화'에 대한 고찰이라고 보는 게 맞다.
연극의 부제 'The Other Other Bronte'는 '잊힌 앤 브론테'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브론테'라는 열린 의미로 해석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극중 약자는 앤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샬롯 브론테도 마찬가지로 빅토리아 시대라는 제도와 편견의 언저리에서 약자였다. 동시에 동생들을 짓누르며 스스로 앞으로 나아간 인물로 만들어 복잡한 위치에 서게 된 샬롯은 그야말로 증오할 수 없는 화자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시선을 통해 앤을 본다.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 경쟁과 연대에 대한 여러 생각이 교차하게 되는 것이 <언더독>의 매력이다.
<웨이스티드>
<언더독>에서조차 잊혔던 유일한 남자 형제 '브랜웰'의 이야기까지 담은, '브론테 남매'의 생애를 담은 락 뮤지컬이다.
<아마데우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바라보며 느꼈을 복잡 미묘한 질투와 동경이 샬럿과 앤 사이에도 일정 부분 겹쳐진다.
*본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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