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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를 묻는 인간, 이야기를 시작하는 인간

인생의 사춘기를 지나는 이들에게 권하는 <단테 신곡>

by 채수빈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도 문득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무엇이 옳고 그른 걸까?”와 같은 답이 정해지지 않은 질문들이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반드시 어떤 순간에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마주한다. 이러한 질문이 가장 강렬하게 찾아오는 시기는 대개 처음으로 상실을 경험했을 때다. 어린 시절에는 세상의 선악이 뚜렷해 보이지만, 누군가의 죽음이나 큰 실패를 처음 겪는 순간 삶의 단단한 표피가 갈라지고 틈이 생긴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왜’라는 질문들이 스며든다. “나는 왜 살아 있는 걸까?”, “삶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이 모든 것에는 어떤 질서가 있는 걸까?” 같은 질문들은 인간의 근본적인 믿음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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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왜’라고 묻는, 존재와 의미를 탐색하려는 인간의 본능은 곧 이야기의 시작이 된다. ‘왜’는 모든 스토리텔링의 기원이다. 인간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따라가며 다시 질문한다. 질문과 서사는 서로를 자극하며 인간의 내면을 확장시킨다. 2025년, 극단 피악이 무대에 올린 연극 〈단테 신곡〉은 스토리텔링의 근원인 ‘왜’를 지금, 이곳의 무대 위로 불러낸다. 이 작품은 극단 피악이 꾸준히 선보여온 ‘인문학적 성찰 시리즈’의 한 작품으로, 이번 기획의 주제는 “단테에게 배운다”이다. 고전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단테의 질문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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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연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배우 정동환의 무대 인생 55주년 기념작이라는 점이다. TV 문학관 등 고전 해석에 익숙한 원로 배우 정동환은 오랜 세월 〈신곡〉 무대에서 여러 차례 베르길리우스 역을 맡아왔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를 지옥과 연옥으로 안내하는 스승이자 지성의 상징으로, 단테와 관객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무대 위에서 그는 단테를 이끄는 동시에, 관객의 눈과 마음을 섬세하게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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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은 한 인간의 ‘왜’에서 출발해 장대한 서사를 펼쳐 보이는 고전이다. 여담으로 단테는 <신곡>을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집필한 덕분에 작품은 훨씬 더 넓은 대중에게 읽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수 세기 동안 이탈리아어는 서유럽의 대표적 문학 언어로 자리 잡았다. 그만큼 <신곡>은 세계 문학사에 어마어마하게 영향을 미쳤다.


<신곡>의 주인공이기도 한 단테는 35세 무렵, 삶의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는다. 그는 인간 지성의 완성을 상징하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아 어둠과 두려움, 혼란 속에서 지옥, 연옥, 천국을 차례로 여행한다. 흥미로운 점은 베르길리우스가 단테를 곧바로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테는 기독교의 연역적 진리를 귀납적으로, 즉 직접 보고 겪고 느끼며 배워간다. 그는 지옥에서는 인간의 죄와 집착이 빚어낸 비극을 목격하고, 연옥에서는 참회와 정화의 과정을 거치며, 천국에서는 신의 사랑과 질서의 본질에 도달하게 된다.


지옥에서 돋보인 '라이트세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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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이 할애된 부분은 지옥이다. 인간 존재의 어두운 측면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단테는 숲을 벗어나 지옥의 아홉 개 원을 따라 내려간다. 각 원은 특정한 죄에 대응하며, 죄인들은 자신의 죄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영원한 벌을 받는다. 무대에 등장하는 <스타워즈>의 '라이트세이버'를 떠올리게 하는 광선검은 이 형벌을 행하는, 인두 같은 도구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둠 속에서 유일한 빛처럼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 죄책감을 직시하는 과정 속에서만 어쩌면 구원의 빛이 스며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지옥 장면을 지켜보았다.


연옥과 천국에서 잠시 엿보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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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반성’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후회하는 사람, 혹은 후회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진정한 반성은 연옥에서 시작된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지옥의 중심, 즉 루시퍼가 있는 곳을 지나 지구 반대편의 연옥산에 도착한다. 연옥은 참회하는 영혼들이 죄를 씻는 곳이다. 연옥 역시 죄의 종류에 따라 구분된다. 우리가 흔히 들어본 '7대 죄악'(오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에 대응하는 ‘7개의 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옥의 끝은 지상낙원이다. 산 정상에 이르자 베르길리우스는 인간 지식의 끝자락에서 단테와 작별하고, 대신 은총으로 주어지는 신비의 지식을 상징하는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인도한다. 연출진은 ‘빛’만으로 무대를 완벽히 가림으로써 천국을 표현한다.


아키타입, 인간 무의식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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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이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예술가와 작가, 심리학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이유는 인간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공유하는 정서적·상징적 패턴, 즉 ‘아키타입(Archetype)’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융에 따르면 아키타입이란 집단 무의식에 존재하는 선험적이고 보편적인 상징 패턴으로, 인류 정신의 깊은 곳에 원초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영웅, 안내자, 그림자, 구원자, 희생자 같은 인물 유형이나 낯선 숲, 길, 심연, 빛, 불과 같은 장소와 사물의 이미지 모두 아키타입의 언어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원형들은 특정 문화권을 넘어 신화와 종교, 예술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인간의 감정과 본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그중에서도 영웅이 모험을 떠나고, 안내자를 만나 시련을 겪으며 성장하는 구조, 일명 ‘영웅의 여정’는 인류 보편의 아키타입적 서사다. 길을 잃은 인간으로서 출발한 단테는 안내자와 함께 지옥과 연옥을 지나, 베아트리체의 도움으로 천국의 빛에 다다르는 서사 구조는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와닿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좋은 이야기를 들을 때 이상할 정도로 친숙함과 감정의 동요를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곡>은 수많은 아키타입이 등장하는 ‘보편성의 장’을 통해 역설적으로 개인적 해석의 공간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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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 직전 관객에게 전달된 독백이 극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 깊었다. “이건 단테의 이야기일 뿐이고, 연극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농담 섞인 말이었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무대의 태도를 명확히 드러내는 말이었다. <신곡>에는 동성애, 성매매, 종교적 교리 등 오늘날의 관점에서 논쟁적이거나 불편할 수 있는 소재가 적지 않다. 〈단테 신곡〉은 따라서 <신곡>을 ‘누군가의 이야기’로서 무대 위에 올려놓고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질문과 마주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연극은 정답을 주입하는 공간이 아니라, 질문을 다시 현재로 불러오는 장치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단테의 여정은 14세기의 이야기지만, 그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순간 ‘왜’라는 질문 앞에 멈춰 선다. 그러나 공연을 통해, ‘나만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이 찾아올 때 그 위기는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산이 된다.


연극 <단테 신곡>을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청소년들, 그리고 ‘이십춘기’와 ‘사십춘기’라 불리는 제2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이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다. 존재의 방향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묻는 그 시기에, 〈단테 신곡〉은 단순한 고전 공연을 넘어 깊은 사유의 시간을 선물할 것이다.


<단테 신곡>과 함께 감상하면 좋은 콘텐츠


단테의 여정과 닮아있는 현대 콘텐츠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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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미드 <굿 플레이스>다. <신곡>의 영어 제목은 'Divine Comedy'로, 단테가 천국에 다다른다는 점이 해피엔딩이기에 붙여진 제목이다. <굿 플레이스>는 말 그대로 '코미디'이다. 사후세계를 배경으로 현대인의 도덕과 선택, 성장의 과정을 유쾌하고도 치밀하게 풀어내는 시트콤이다. 칸트 윤리학, 공리주의, 실존주의 등의 철학적 개념을 드라마 구조 안에 정교하게 녹여내면서도, 가볍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점이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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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한국 영화 <신과 함께> 시리즈다. 지옥과 사후 심판을 소재로 삼아 화려한 비주얼과 감성적인 드라마를 결합한 작품으로, 죄와 속죄, 용서와 화해라는 주제를 대중적 언어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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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 #문화는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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