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귤
몸집만 한 가방을 메고 한 손으로 실내화 가방을 빙빙 돌리며 대문을 나섰다. 평소와 다름없는 등굣길이다. 나뭇잎이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공원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할아버지들의 모습도 잠시 구경했다. 맞은편에서는 한 아이와 엄마가 함께 걸어오고 있다. 아이와 눈이 잠시 마주쳤다. 그 아이는 나의 어딘가를 유심히 봤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내 귀에 머물러있었다. “엄마, 쟤 귀에 있는 게 뭐야?” 나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입 모양으로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 아이의 엄마는 “그런 거 보면 안 돼.”라고 말하며 아이의 몸을 돌리고는 서둘러 걸어갔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왜 보청기를 보면 안 되는 거지? 골똘히 생각하다 이내 포기하고 다시 학교로 갔다. 땅에 떨어트린 줄 알았던 그 생각은 스멀스멀 다른 무언가로 변해 마음속 깊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2학년 음악 시간 때 베토벤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짝꿍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얘다! 얘도 베토벤이에요! 얘도 귀가 안 들리잖아요!”라고 말했다. 반 아이들의 반응은 정확히 반반으로 나뉘어졌다. 책상을 두드리며 한바탕 웃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러지 말라고 야유를 던지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점점 얼굴이 빨개지며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말았다. 보청기를 끼지 않은 그들 사이에서 홀로 보청기를 끼고 있는 건 동물원 속에 갇혀 사는 일 같았다.
체육 시간이었다. 6학년이 된 나는 키가 작았지만, 몸이 다부져 체육 활동에 두각을 드러내었다. 특히 피구에서 빛을 발했는데, 공을 이리저리 피하고 받아내기도 하면서 종횡무진 활약을 펼쳤다. 그러다 소위 말하는 껌 좀 씹는다는 일진을 공으로 맞춰버렸다. 그 아이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분명 좋지 않은 말임을 알았다. 주변이 일순간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어쩐지 의욕이 나지 않아 경기 내내 소극적인 태도로 임했고, 결국 공을 맞고 선 밖으로 나갔다. 계속해서 노려보는 그 아이의 험악한 시선을 피하느라 힘들었기도 했다.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황급히 교실로 돌아가려고 계단을 오르려는데, 친구가 와서 위로해 주었다. “괜찮아? 걔가 한 말 그냥 신경 쓰지 마.” “어? 나 사실 걔가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어. 뭐라고 했었는데?” 친구는 망설였으나 나의 재촉에 결국 입을 열었다. “씨*이라고 욕하면서 장애인 주제에 왜 자기를 맞추냐고 했어.” 친구의 입 모양이 일순간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왜 내가 욕을 먹어야 하는 거지? 고작 피구였을 뿐인데. 신경 쓰지 말라던 친구의 말을 들었으면 좋았을걸. 그 말에 개의치 않았다면 좋았을걸. 나는 그날부터 피구를 싫어하게 되었다. 머리를 풀고 귀를 가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땀이 뻘뻘 나는 한여름에도 머리를 묶지 않았다. 누군가는 쉽게 공격할 나의 약점을 영영 드러내지 않을 작정으로. 땀띠 따위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중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여전히 보청기를 숨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담임 선생님이 맡은 과목은 영어였다. 반 아이들과 가볍게 서로 인사도 나눌 겸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라는 선생님의 지령이 내려졌다. “헬로우. 마이 네임 이즈, 태영 리. 나이스 투 미트 유.” 떠듬떠듬 서툰 영어로 자기소개를 했더니 반 아이들이 깔깔깔 웃어댔다. 아이들이 웃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다. 너무나도 정직한 발음 탓이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아이들을 웃겼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열혈 담임 선생님은 혹여 내가 상처받을까 봐 책상을 쾅 내리치면서 말했다. “웃지 마세요. 이 아이는 귀가 아픕니다! 아파서 발음이 그런 겁니다!” 나는 순식간에 아픈 사람이 되었다. 친구들은 귀가 아픈 줄 몰랐다며 사과하고는 그날 이후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달라졌다.
다른 과목 선생님이 내게 발표를 시켰을 때 다시 여쭤본 적이 있다. 선생님의 입 모양이 그날따라 잘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한껏 짜증이 난 표정으로 뭐라 말씀하시더니, 다른 학생을 시키는 것이다. 영문을 몰라 짝꿍을 쳐다보니 일단 앉으라고 해서 앉았다. 선생님의 표정이 너무 신경이 쓰여 수업이 끝난 후 짝꿍에게 물어봤다. 짝꿍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망설이다 말해주었다. “네가 다 알아듣고 있으면서 괜히 안 들리는 척한대.” 울고 싶었지만 울지 않았다.
음악 시간에 하는 가창 시험은 매년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음정과 박자가 다 틀린 노래가 얼마나 웃긴 지 나는 모른다. 친구들은 내가 첫 소절을 시작하자마자 어김없이 킥킥대기 시작했다. 이제 익숙할 법도 한데 그날따라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라는 가사가 너무나도 서글퍼서, 내 처지가 너무나도 기구해서 결국 눈물이 나왔다. 선생님은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으로 그만 불러도 된다고 하셨다.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나를 조금씩 어둠으로 끌고 갔다. 내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인 비수는 하나의 거대한 칼이 되어 기어이 부모님을 향하고 말았다. 아직도 내가 뱉은 말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왜 나를 낳았어? 왜 나를 이렇게 낳았냐고! 차라리 죽고 싶어.” 엄마와 아빠가 그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나를 안아주며 토닥이던 손만이, 품속에서 엉엉 울며 잠든 기억만 어렴풋하게 난다.
나의 출생을 원망하며 나의 장애를 부모님 탓으로 돌린 것이 얼마나 큰 비수였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뒤늦게 부모님의 가슴에 박힌 비수를 뽑으려고 했다. 한데 내가 던진 비수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이미 그들의 가슴 속 깊이 들어가고 말아서, 아무리 뽑으려고 해도 뽑을 수가 없었다. 그 비수는 기어코 녹이 슬었고, 아프게 했다.
사실 나에게 날아온 비수에도 손잡이가 없었다. 그렇기에 뽑아낼 방법도 몰라 크고 작은 생채기가 남았다. 만일 나에게 날아든 비수에 손잡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단번에 뽑아낼 수 있었을 텐데. 내 귀를 빤히 쳐다보는 아이와 엄마에게 이건 보청기라고, 네가 쓰는 안경처럼 나도 그저 보청기를 쓰는 거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내 공에 맞은 친구에게는 아팠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그렇다고 내가 욕을 먹을 이유는 없으니 그 말을 한 것을 사과하라고 했을 텐데. 그럼 계속 피구를 좋아했을 테고, 더운 여름날에도 머리를 묶고 다닐 수 있었을 텐데. 내 귀가 아픈 거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일순간 엄숙해진 아이들에게 웃으며 다시 설명했을 텐데. 나는 아픈 것이 아니라 그냥 농인*일 뿐이라고. 나도 너네와 같다고. 나를 오해한 선생님을 다시 찾아가서 사실은 그 말씀조차도 알아듣지 못했다고 말했을 텐데. 음악 선생님께는 차라리 수어로 부르게 해달라고 말했을 텐데. 그럼 나는 울고 싶을 때 울었을 것이고, 부모님에게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을 텐데. 하다못해 내가 부모님께 던진 비수에 손잡이라도 만들어서 찔렀다면 비수가 그들 마음속 깊이 자리 잡기 전에 뽑아내었을 텐데. 나도 부모님도 날카로운 비수에 손잡이를 만드는 방법을 몰랐다.
*농인: 제1언어로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