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머리 아닌게 ‘악성’ 이란 말이 붙을 정도의 단점인가
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악성 곱슬'머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아버지가 곱슬이 심하셨고, 곱슬머리는 우성 유전자니까 자연스럽게 나에게도 물려내려 왔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려서부터 곱슬거리는 머리가 지저분해 보인다며 내 머리를 물까지 뿌려가며 포니테일로 (아주 세게) 묶어주곤 했는데, 그래서 어렸을 때의 사진을 보면 대체로 내 눈꼬리가 위로 쭉 올라가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렇게 얼굴 가죽이 당겨 올라가도록 안간힘을 써서 올려 묶은 머리인데도, 사진마다 삐져나와있는 잔머리도 함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웃음 포인트라고 봐야 할까.
실제 내 성격 탓도 없잖아 있었겠지만, "곱슬머리는 고집이 세다"라는 말도 크면서 정말 많이 들었다. "얘 머리 진짜 딱 지 성격대로 자란다 정말~"하는 농담에 깔깔 웃으시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었다.
중학교 때는 흔히 말하는 '귀 밑 3cm' 규칙에 따라 단발을 해야 했는데, 곱슬인 데다가 아주 나풀나풀 거리는 가는 나의 모발은 단발머리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단발머리 이후 '사자머리'라며 아이들에게 몇 달을 놀림받고 다니던 중에, 결국 선생님들도 '단발의 목적은 단정함인데 너의 경우는 그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니 머리를 길러서 묶고 다녀라'라는 특혜 아닌 특혜를 주시기에 이른다.
덕분에 나는 중학교 때 유일하게 머리를 길러서 묶고 다니는 학생이 되었는데, 어느 날은 다른 학교 일진들이 시비를 걸 때 "촌년이(내가 다닌 중학교가 당시 경기도에서 제일 작은 학교였지 아마..) 아주 파마도 하고, 지랄을 해요 지랄을. 너 좀 노냐?" 소리를 들으며 머리채를 잡혔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어떻게든 용돈을 모아서 '매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고, 아 그것은 그야말로 마법 그 자체였다. 늘 부스스하던 내 곱슬머리가 이렇게 차분하게 펴지다니! 외모는 머리빨이 반이라더니, 이때를 기점으로 나는 실로 크나큰 외모 변화를 맞이했고 사람들이 나를 조금은 다르게 대하기 시작했다.(주로 남자애들이)
나는 이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20대 후반에 독일로 떠나기 전까지 10년이 넘게 매직을 거의 매 분기마다 해왔다. 학자금 대출에 생활비도 아르바이트해서 벌어 쓰는 형편에 옷은 못 사 입어도 미용실에는 꾸준히 다니면서 살아온 것이다. 이제까지 '매직'을 위해 미용실에 쓴 돈을 주택청약 같은데라도 부어놨으면 지금쯤 집 한 채는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매직'에 집착을 하며 살게 된 것은 실제로 이 '매직'을 해서 생머리가 되냐 아니냐로 사람들이 나를 '취급'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을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나처럼 곱슬머리가 심한 경우엔 어떻게 해도 '깔끔한' 혹은 '단정한'느낌을 주기는 좀 어려운데, 학창 시절에 놀림감이 된 건 그렇다 치고 알바를 구하는 것부터 취업할 때 면접까지 이 '머리스타일'은 크나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 예로 내가 아래 사진같은 곱슬머리를 하고 면접을 보러 간다면 그것만으로도 날 안 뽑을 업종이 수두룩하다고 본다. '용모단정한'을 채용공고에 떡하니 써놓는 곳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지.
한국인이면, 동북아시아인이면 마땅히 검고 매끄러운 생머리여야 하는데. 그 정상기준에서 벗어난 나는 이렇게나 수많은 고난을 헤쳐나가며 내 머리카락을 콤플렉스로 안고 살았다. 엄청난(내 기준에서는 정말이지 엄청나게 비싼) 돈을 내고 3~4개월마다 미용실을 가며 내 진짜 머리카락을 숨기는데 열중했다. 어느새인가 '남들'의 기준대로 나 역시 내 머리를 싫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용실에 가면 거의 백이면 백 듣는 미용사들의 "어머~ 무슨 곱슬이 이렇게 심해요?" "이런 악성곱슬은 일반 약으로는 안 펴지는데~" 같은 말들도 돈을 내는 입장이면서도 나를 주눅 들게 만들었고, 사실 '악성곱슬'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좀 기가 죽었다. '악성'이 붙은 것 중 좋은 것은 없으니까.
아마 악성곱슬이라는 단어에 쓰이는 악성은 이 사전적 의미 중에서 '2. 나쁘고 독한 성질'에 해당할 거라고 생각한다. 기껏해야 머리카락이 곱슬인 것뿐인데 그게 뭐 그리 나쁘다고 이런 접두사를 가져다 붙인단 말인가.
나는 이것이 한국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대다수가 검고 굵은 직모로 태어나는 한국에서 '곱슬머리'인 것이 이상한 것을 넘어 '악성'으로 취급받는 이유는, 다른 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의 태도는 아닐까. 내가 살아본 한국은 다수와 다른 것들에 정말 가혹한 경우가 많기에, 곱슬의 경우에도 그럴 거라는 추론이 가능해진 것이다. 피부색이 다른 것도, 체형이 다른 것도, 생김새와 같은 눈에 잘 띄는 '다름'에는 더더욱 '다름'을 '틀림'과 혼동해버리는 것 같다. 마치 흔히 '다른'을 잘못 쓰는 '틀린' 맞춤법처럼 말이다.
독일에 가서 살면서부터 나는 매직을 포기했다. 독일의 시골에서 펌도 아닌 '매직'같은 걸 하는 미용실을 찾기도 어려웠고, 매직을 한다는 곳을 찾아가면 가격이 우리 돈으로 몇십만 원이나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나에게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나는 유럽의 한 복판에 살고 있었고, 학교엔 여러 인종이 함께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곱슬머리는 그곳에서는 특이하거나 이상한 점이 아니었다. 정말 세상에는 여러 결의 곱슬머리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나와 같은 잔물결 같은 곱슬도 있고, 석고상에서나 보던 것처럼 동글동글하게 말리는 곱슬도 있었고, 크게 웨이브가 지는 곱슬, 흑인들의 곱슬 등등 그곳에는 수많은 곱슬머리들이 생머리보다 더 많은 비율로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동양인 중에서 너 같은 머리는 처음 봐"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그 말에는 어떤 악의도 없게 들렸다.
나는 그곳에서 자유로운 곱슬인으로 살았다. 가끔 곱슬머리로는 할 수 없는 특정 스타일이 하고 싶어 고데기를 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한국에서처럼 내 곱슬머리를 수치스러운 본모습 인양 숨기고 다니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나에게 매직은 이제 꼭 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선택사항일 뿐이다. 나는 '악성'이라는 사회의 평가에서 벗어나 나의 곱슬머리를 조금은 긍정하게 된 것이다.
고작 '머리카락'에도 '악성'같은 무시무시한 말을 붙여버리는 이 사회에서 나의 다름을 긍정할 만큼 성장한 것이 나에게는 정말 의미 있는 일이다. 사회는 여전히 나를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다니는 단정치 못한 사람으로 볼 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나를 그렇게 보지 않음으로 나는 자유의 한 조각을 쟁취했다고 느낀다.
사람의 생김이라는 타고난 유전적 특징 같은 것에 건강을 위협하는 '종양'같은 게 아닌 이상 '악성'을 갖다 붙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남들과 달라도, 얼마든지 괜찮다. '악성'인 건 내가(혹은 우리가)아니라 사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