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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g Lee Oct 27. 2021

최신 기술을 사용할 자유

나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는 제품을 못 쓴다.


작년 초 즈음에 (지금은 연인 된) 쿼카가 나에게 물었다.

혹시 커널형 이어폰을 좋아하냐고.

당시 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운동을 하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는데, 줄이 달린 이어폰을 사용하다 보니 조금 불편하긴 하다는 언급을 했어서 쿼카는 내게 블루투스 이어폰을 선물하고 싶어 졌던 것이다.  

그 당시 애플의 블루투스 이어폰은 그냥 에어팟 2세대와 커널형으로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탑재된 프로가 있었기에, 둘 중에 내 취향에 더 맞는 것을 선물하려는 그의 질문에 "나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거나 바깥의 소리를 차단해주는 제품은 쓸 수 없어"라고 대답했다.   


요즘 대세라는 노이즈 캔슬링, 내가 듣는 음악에 집중할 수 있게 외부 소음을 차단해주는 이 훌륭한 기술을 나는 아주 한정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

내가 이 기능을 사용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주 안전한 공간에 있는 것'이다. 

길을 걸을 때나,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열린 공간에서 나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사용할 수가 없다. 내가 안전하게 느끼는 집안에서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으로 온전히 음악을 즐긴다면 아주 좋겠지만, 집안엔 또 내가 좋아하는 스피커도 이미 있기 때문에 집안에서만 쓸 것이라면 사실 이런 기능이 있는 상위 버전은 내게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러브랜드에서 나온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들


나는 길을 걸을 때 주변의 소리를 살피며 걷는 습관이 있다.

나의 주변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가까이에 무엇이나 혹은 누군가가 있는지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인지하면서 길을 걷는다. 나는 음악을 아주 좋아하고, 길거리의 분위기나 그날의 날씨에 어울리는 노래를 골라 들으며 길을 걷는 것을 아주 좋아하지만- 항상 볼륨은 바깥의 소리도 어느 정도 들을  있는 정도로 고정한다. 바깥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상황이 두렵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20대 초반에 나는 건대 근처의 주택가 골목에서 성추행 혹은 강간미수로 불릴 사건을 당했다.

저녁 시간대의 어두운 골목을 지나는데, 길가에 주차되어있던 트럭 뒤에서 어떤 남자가 튀어나와서 나를 담장으로 세게 밀고 입을 막고서  몸을 만지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어떻게소리를 내었고 도와달라고 소리쳐봤지만, 사방이 주택이었어도 아무도 나와보지 않았고 아마도  분간 나는 안간힘을 쓰며  남자와 몸싸움을 했다.  당시에 내가 정말 있는 힘을  해도  힘으로  남자의 완력에서 벗어날  없고,  몸을 누군가 강제로 이렇게 유린하는 것을 막을  없다는데서 오는 무력감은 지금도  순간을 떠올릴   명치 위쪽 어딘가를 짓누르는 느낌을 준다.

 다행인지 누가 신고는 해서 곧 경찰이 왔고, 그 남자는 도망쳤다. 경찰이 쫓았지만 잡지 못했다고 했다.

 밀쳐지며 부딪친 뒷머리, 저항하며 다친 여기저기가 아픈 것을 느낀 것도 한참 후였다. 경찰이 도착하자  건물에서 사람이 나와 웅성거렸으며 경찰내게  가지 질문을 하고, 그곳으로   사람이 있냐고 묻기에 나는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가 있다고 하고 경찰은  친구에게 전화를 해줬다. 친구는 경찰에게  가지 전달사항을 듣고, 알바하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해서 정신이 없던  폰에서 최근 연락처에 전화해서 그사람이 도착할  까지  옆에 있다가 정신없는 나를 그사람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고 일터로 돌아갔다. (이것은 사실  날의 최악의 선택  하나였지만,  애의 잘못은 아닐 거다)


나는 그 이후로 몇 년을 건대의 어디든 혼자서 절대 걷지 않았다.

사실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그 근처도 가고 싶지 않았고, 건대뿐만이 아니라 다른 주택가의 골목길들도 다 편치가 않았다. 길을 걸을 때 내 주변의 기척을 민감하게 살피고 누군가가 나를 습격하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이것이 내가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쓸 수 없는 이유이다. 나는 그날의 트라우마로 길거리를 온전히 안전하게 여기지는 못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음악에만 집중해서 그 소리를 즐길 자유가 나에겐 없다.


이 노이즈 캔슬링이라는 멋진 기술은 아마도 모두를 위해서 만들어졌을 텐데, 아마 나와 비슷한 이유로 혹은 다른 이유로 이 기능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안 좋은 경험이고 보통 사람에게는 흔치 않은 재수 없는 사건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어떤 종류의 자유를 앗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만약에 몸집이 좀 더 큰 남성이었다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겠지 하는 가정은 불필요할지 모르지만, 아마도 높은 확률로 그 가정은 맞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성평등이라는 것은 이러한 소소한 자유를 젠더와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누리는 그런 세상이다. 멋진 신기술을 모두가 함께 즐길 그런 자유. 언젠가는 나도 음악에 집중하며 마음 편히 골목을 걷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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