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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수 할배 Aug 03. 2024

용돈에 속고 알바에 울고!

31 돈은 다 어디에 숨었는가?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면,

먹기는 하겠지만 살지는 못할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


“고등학교까지만 학비를 대 주겠다. “ 

아버지께서는 우리 형제들이 어려서부터 5명의 자녀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잘 지키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시골에 살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머슴이 날마다 집에 왔으며, 어린 동생들을 돌봐주는 도우미 누나가 함께 살았다. 부산으로 이사를 온 후에는 경제상황이 달라졌는데, 동생 4명이 모두 학생이라서 생활비가 많이 필요했다. 


이런 형편이라 교육대학에 들어가려면 스스로 입학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9년 당시에는 교대의 입학금과 교재비가 10만 원 정도였다. 친척 형수님이 계주(오야)를 하였다. 형수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대학교의 입학금을 납부해야 되는 시기인 1월에 계돈 10만 원을 타는 순서를 받았다. 6월부터 매달 계돈을 넣었다. 교대에 합격한 후에 그 돈을 받아서 입학금과 책값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입학해 보니 예상하지 못한 비용이 한 군데 더 있었다. 교대 남학생들은 모두 졸업 후에 최소 5년을 근무하기로 하고 학생군사훈련단(RNTC)에 소속된다. RNTC에 소속한 학생은 모두 ‘단복’을 맞추어야 한다고 했다. 비용은 3만 5천 원! 전혀 준비하지 못한 금액이었다. 단복 비용 구할 걱정을 하다가 친구들의 모임에서 털어놓았더니 그들이 마련해 주었다. 그 돈을 빌렸는지, 그냥 받았는지, 빌렸다면 갚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1976년 3월부터 1979년까지 직장에 다니면서, 그리고 교사생활을 시작한 1980년 3월부터 결혼 직전인 1988년 2월까지 거의 10년 동안 월급을 타면 모두 어머니께 드렸다.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용돈을 타서 썼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부터,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거 같다. 월급봉투를 부모에게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기 위하여, 친척들, 지인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의 예를 많이 들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면서는 수입이 없었기에, 어머니로부터 날마다 교통비를 받았다. 하루에 토큰 두 개 비용, 그리고 점심값. 그 외의 용돈은 받아 본 기억이 없다. 그나마 교통비가 부족할 때는 편도 1시간 넘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어머니는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좋아하셨지만, 한편으로는 수입원이 없어져서 아쉬워하였다. 용돈이 없으므로 친구들과 외식은 거의 하지 못했다. 대학 1학년들이 즐거워하는 미팅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교류하기 위해 자주 다니던 다방에도 가지 않았다. 


첫 학기를 마치고 방학이 되자 나는 다시 옛 직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영업사원의 업무다. 이 일은 내가 교대 입학하기 전 약 2 년 동안 하던 일이었다. 방학 중에 번 돈으로 다음 학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한편으로 교회에서는 여름방학에 바빴다. 당시에 나는 교회의 청년회장을 맡고 있어서 청년대회(수련회)를 준비하고 운영했다. 그리고 RNTC로 군부대에 들어가서 3주 동안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돈을 벌 수 있는 기간이 많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학기 중에 생활비가 부족하면 학교를 1주일 쉬면서 일을 한 적도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어떻게 버텼을까를 돌이켜보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남학생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서로 위안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부산은 큰 도시라서 그런지 생활환경이 좋았다. 송도, 해운대 같이 유명한 해수욕장이 많고 산과 바다도 멋있어서 자주 갈 수 있었다. 서면과 남포동 같은 번화가도 있을 뿐 아니라, 국제시장, 자유시장, 평화시장 같은 서민 시장도 번성하여 먹거리와 구경거리가 많았다. 


교대 재학 중에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사히 졸업한 데는 정부 장학금과 두 번의 장학금이 도움 되었다. 이어서 장학금 이야기를 하겠다. 



You are going to let the fear of poverty govern you life and your reward will be that you will eat, but you will not live.

 George Bernard Sh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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