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이 등교와 열쇠

by 교수 할배

아들 내외는 미국에서 맞벌이한다. 코로나 때 시작한 재택근무는 팬데믹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에 둘째가 태어나서 우리 부부에게 며느리의 산후 몸조리 도움을 부탁했다. 우리도 손자 얼굴 보기 위하여 미국 여행을 계획중이었는데 한 달을 앞당겨 출국하였다.

아들네 도착하면서부터 아내가 바빠졌다. 시차 적응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음식, 청소, 손녀 등하교를 맡았다. 한인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구입하여 산모를 위한 미역국을 끓이고 식구들을 위한 저녁식사를 장만했다. 미국에서는 아침식사로 간단하게 시리얼에 우유를 타서 먹는다. 아들은 아침 식사를 건너 뛰었다. 그런데 두살배기 딸은 꼭 밥을 먹었다. 아내는 저녁형 인간이라 아침에는 늦게 일어난다. 그래서 저녁 식사를 한 이후에, 다음날 아침을 위한 밥과 반찬을 마련해 두었다. 나는 아침형이라 일찍 일어나는데, 손녀도 일찍 일어났다. 그래서 아침에는 내가 손녀랑 둘이 먹였다. 아들도 일찍 일어나서 손녀가 어린이집에 갈 수 있도록, 식사하는 걸 관찰하고 씻기고 옷을 입혔다. 아들이 우리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임무가 있었는데, 그건 손녀의 등하교였다. 아들은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두살짜리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가고 데려오는데 자기의 근무시간과 겹쳐서 걱정이었다. 아들은 이 일을 우리에게 부탁했다.

(가족은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 거주하였다. 실리콘밸리의 중심도시라서 물가가 비싸다. 어린이집 비용이 한달에 2,000불이었는데, 한국돈으로는 280만 원 정도다. 한국부모의 교육열이 미국에서도 드러나는지,

집 주변의 저렴한 어린이집을 마다하고 고속도로 노선을 두번 갈아타고, 자가용으로 편도 25분 걸리는 곳으로 보냈다. 출퇴근 시간의 도로는 미국도 우리나라처럼 차량으로 붐비는데, 퇴근 시간에는 고속도로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1시간이 넘기도 하였다.)

우리부부는 함께 손녀를 매일 등하교 시켰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는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다고 하면서 앞으로는 등교는 전담하라고 선언했다. 아직 어린 손녀는 아침에 어린이집에 가야 하는 순간에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하였다. 그날도 아침에 등교하기 위하여 나랑 손을 잡고 2층 아파트에서 출발하였는데, 아이가 '엄마, 엄마'하고 울먹이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집 현관이 보이지 않는 코너를 돌았을 때에는, 내 손을 놓더니,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면서 울기 시작하였다.

예상보다 오래 우는 손녀를 달래기 함 들었다. 당황하였고, 아내가 같이 왔으면 이런 문제를 잘 해결했을텐데라며 속으로 불평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를 깨우고 싶은 마음을 누르면서 스스로 해결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아이의 손을 다시 잡고 지하 주차장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손녀는 지하 주차장 버튼을 누른 후에도 계속 엄마를 찾았다. 지하에서 멈춘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우리 차가 보였다. 손녀이 태명은 꽁꽁이였는데, 두 살 때까지도 이름과 태명을 함께 사용했다. "꽁꽁아, 저기 아빠차가 있지, 저 차를 타고 어린이집에 가자." 아이는 두 발을 강력본드로 바닥에 붙인 듯이 굳건하게 서서 엄마만 찾았다. 아이를 설득하기 위하여 적절하다 생각되는 말을 찾기 시작했다. 시간이 급박하니, 나오는 대로 여러 말을 하였다.

"엄마는 집에서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랑 같이 가자."

"아빠 차 어디에 있니?"

.....

나는 스스로, 이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아내는 당연히 내가 혼자서도 손녀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된다고 믿었다. 며느리도 직장생활을 오래 하고 자녀들도 길러본 시아버지에게 믿음과 기대를 갖고 있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아들 내외가 어떤 부탁을 받으면 적절하게 해결했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업무를 달성하지 못하면 나의 자존심에도 상당한 흠집이 생길 거라는 압박도 느꼈다. 더구나 나는 교육자였다. 아동발달에 대한 인지적, 정의적 성장에 대하여 배우기도 했고 가르치기도 했다. 내가 아는 모든 걸 동원해서 이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갑자기 시각적인 물건이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녀는 여전히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 엄마, 엄마라고 계속 중얼거리면서. 나도 일전을 준비하는 충무공 같은 비장한 태도로 아이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꺼내어, 암행어사가 마패를 드는 자세로, 아이 눈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힘주어 말했다.

"꽁꽁아, 이거는 차 열쇠다. 원래는 너의 엄마와 아빠가 너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데 오늘 아침에는 바빠서, 할아버지에게 너를 맡겼다. 그리고 이 열쇠를 나에게 주었어. 그러니 너는 오늘 할아버지랑 아빠 차를 타고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 같이 가자." 그리고는 시간에 쫒기는 촉박한 마음을 감춘채, 출사표를 던진 장수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듯하면서 어리둥절한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녀가 가녀린 손을 들어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전쟁터로 진군하듯이 묵묵히 차로 향했다. 차를 타고 어린이 집으로 가면서도 아이는 계속 엄마를 부르긴 했지만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도착하여 선생님에게 인계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무용담을 아내와 며느리에게 들려주었다. 아내는 미소를 지으며 "잘했어요, 수고했어요"라고 했다. 며느리도, "애쓰셨네요, 고맙습니다."라고 하면서 한마다 덧붙였다. "아버님도 손녀랑 소통하는 기술이 늘어가네요."

손녀와의 밀당은 이제 시작일 것이다. 앞으로 이와 유사한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리라. 미리 조사를 해 두면 새로운 일이 벌어지더라고 당황하는 정도가 줄어들고, 조금 더 쉽게 풀어갈 수 있으리라. 손주들과의 기싸움에서 '니가 오래 살았냐, 내가 오래 살았냐'하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시대는 결코 오지 않겠지. 밀당을,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 아니라, 놀이로 생각하면서, 끝났을 때 서로 웃을 수 있는 지혜를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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