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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oldenuit Oct 19. 2022

코로나 골방일기의 시작

"여행은 생각의 산파" - 알랭 드 보통

‘우리 기종은 전생에 머슴이라더니, 한 번을 못 쉬는구나’하는 한숨 어린 푸념이 동료들로부터 들려왔습니다. 코로나의 전 세계 확산으로 항공사가 하나둘씩 운항을 멈출 무렵, 저는 어쩌면 다행히도 비행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기종인 B777은 여객기(Passenger) 뿐만 아니라 화물기(Cargo)로도 운항 중이었고, 코로나 기간 동안 급증한 화물의 수요와 단가 상승은 예상치 못한 '화물 특수'로 이어졌습니다. 남는 여객기를 개조해서 화물기로 운항할 정도였으니, 넘쳐나는 화물 운항 스케줄을 견뎌내야 하는 그런 험난한 시국이었습니다.


화물기 비행을 마치고 레이오버 호텔에 도착하면 국가별 절차에 따라 '콧구멍 테러', 아니 코로나 검사를 받고 방안에 격리 조치되기 일쑤였습니다. 어떨 때는 방문 밖으로 발을 딛는 순간 엄청난 벌금을 내도록 으름장을 놓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식사는 미리 준비해온 햇반이나 라면 같은 인스턴트가 주를 이루었고,  좋은 경우에는 트레이에 음식을 담아 호텔 측에서   앞에 가져다주곤 했습니다. 인생에서  번도 예상 못한 '코로나 독방신세' 경험하는 고된 시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오대수 독방생활'은 처음 몇 주간을 지낼만했습니다. 언젠가 코로나도 메르스 같은 다른 전염병처럼 잦아들기를 기다렸고 어느 정도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한창 TV보다 유튜브가 활성화되던 시기였던 터라, 하루 종일 눈 뻘게지도록 누워서 유튜브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몹시 지루하고도 고독한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코로나 독방신세'에 좀이 쑤씨도록 침대와 한 몸이 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뚱뚱한 레이오버 가방 앞주머니에서 '나 좀 꺼내 줘' 소리치듯 불룩 튀어나온 물체를 발견했습니다. '이게 뭐지?'. 궁금한 마음에 꺼내어보니, 여행 다니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을 만한 A5 사이즈의 책 한 권이었습니다. 짐을 급하게 싸다가 굴러다니는 책을 넣은 모양인데, 언제 집어넣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저와 함께 6000마일 이상을 여기까지 바다 건너온 가련한 책이었습니다. 표지는 청록색의 그라데이션이 그려져 있었고 ‘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책이라면 대학시절 질리도록 형광펜으로 줄 치며 봤던 공학원서가 전부였던 저는 철저한 비문학인이었습니다. 침대에 나만의 편한 각도 '얼추 30도'로 비스듬히 누워 가련한 그 책을 한 손에 집은채, 얻어걸린 공짜 수면제 마냥 한줄한줄 읽어갔습니다. 큰 기대 없이 한줄한줄 머리숱 없는 작가가 뭔 소리를 하려나하고 흘기는 눈으로 읽어 나갔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좀이 쑤시고 해서 대충 스키핑 해가며 이해가 되는 부분만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잠들 목적으로 한 두장 읽다 보니 골아 떯어지는 날도 있었고 어느 날은 운 좋게 두세 장도 읽곤 했습니다.


들은 바대로 보통은 상당히 철학적이고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 제 구미가 당기는 문구와 표현들이 하나둘씩 눈에 띄었습니다. 작가의 남다른 표현력에 흠칫 놀라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유머에 옆방 안 들리게 낄낄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서 점차 그 책에 빠져들 때 즈음에는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느낌의 묘한 쾌감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저런 포인트에서 저런 표현할 수 있었을까? 언젠가 나도 저런 순간에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작가는 그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저의 세세한 생각들을 시원하게 등 긁어주듯 표현해내고 있었습니다. 핀셋으로 집어내듯 딱 들어맞는 그 용어와 그 문장으로 말입니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이다…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Chamonix-France, 2022


순간,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힘들 때 뒷산에 올라 풍경을 보며 S은행 자동이체 날 따위를 걱정했던 저로써는 무언가 감당하기 힘든 문구였습니다. 늘 비행할 때도 도착하면 뭘 먹어야 하나, 호텔 조식은 주는지, 쇼핑은 뭘 해야 하는지에만 고민하던 찌찔함이 몰려왔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나라와 도시를 다니고 일반인이 평생 직접 볼까 말까 한 광활한 칵핏 뷰를 보고도 말입니다. '작가가 말한 큰 광경, 큰 생각, 새로운 장소, 새로운 생각의 공식이 내게는 들어맞지 않는 건가?' 어느 순간부터 모르게 하늘에 대한 경이로움이나 신비로움이 사라지고 너무나도 세속적인 가치관에 파묻힌 나의 권태와 무기력을 한탄했습니다.


핸드폰 광각 카메라에 잡히지도 않는 넓디넓은 태평양을 그동안 수백 번 오가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비행한 건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했고 그동안의 나태했던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하늘에서 쓸데없는 주담대 대출금리 따위의 옹졸한 생각은 좀 집어치우고 작가가 말하는 대장부다운 큰 생각을 할 수는 없을까? 30,000피트가 넘는 비행기 윈드실드가 무료로 제공해온 그 하늘이 내게 속삭이는 교훈은 정말 없었을까?' 그렇게 하루 이틀 속절없이 이불 킥하는 밤이 쌓여만 갔습니다.


MOMA-NYC, 2022


그동안의 비행을 돌이켜보면, 보통이 말하는 광활한 하늘과 넓은 바다가 주는 공간의 특혜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비행 목적지, 경유지, 공항, 항공기, 도시, 호텔방마다의 냄새가 있고 특별한 기운이 있습니다. 비행을 웬만큼 해 본 사람은 분명 알 겁니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이국적인 대화를 접하는 기회도 있고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들도 많습니다. 거기서 보고 느끼는 소소한 감정과 경험들은 여느 베스트셀러 책에도 나오지 않는 값진 교훈들입니다. 돌이켜보면 그것들이 내 인생이라는 요리에 있어서 너무나도 풍미 좋은 재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현미경으로 눈 찌푸려가며 세상을 비좁게 바라보기도 하고 하늘이 던져 다 준 산해진미 요리 재료들을 내팽개친 것 같았습니다.


‘나도 하루하루 비행 로그북(Flight Logbook) 적듯이 표현해보자. 아무리 영하 40도의 차고 무미건조한 쇳덩이 비행기라 할지라도 또 혹시 누가 알까? 요리조리 잘 뒤적이다 보면 조종간 한켠에 어딘가 내가 몰랐던 말랑말랑한 감성들이 묻어있음을 발견하겠지. 그런 소소한 생각들을 정리하면 솔직 담백한 스토리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태생이 잡생각이 많은 부류이다 보니 쓰다 보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작가들은 혼자 작품 활동을 위해 먼 타지로 떠난다고 하는데, 어쩌면 코로나로 인해 혼자 있는 이 시간이 나에게 큰 혜택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잠도 안 오고 누워서 멍 때릴 때면, 그렇게 안개처럼 슬금슬금 밀려드는 생각의 조각들을 일기 적듯 적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쭈그려 앉은 세 살짜리가 여기저기 레고 블록 끼워 맞춰 보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Lyon-France, 2022


그래서 하루 이틀 노트북을 들고 투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코로나 시절의 골방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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