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쉼(Rest)은 다음 내 근무(Duty)의 연장선 상에 있습니다.
‘기장님, 수고하셨습니다. 푹 쉬세요.’
호텔 키를 받고 나면 각자의 방으로 일제히 흩어지며 늘상 의례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열두 시간을 넘게 날아온 이곳 런던 히드로. 겨우 2박 3일 왕복 스케줄이라니 보통 사람이 들으면 놀랄 만한 곳입니다. ‘영국 런던을 어떻게 그렇게 잠깐 잠만 자고 날아오나’할지 모릅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주 7회 운항'이라는 달콤한 키워드에 가려진 아는 사람만 아는 이 죽음의 스케줄을. 24시간의 귀한 휴식(Rest) 시간이라도 아끼고 아껴 소중히 써야겠지요.
오늘 우리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잠시 눈 부칠 호텔은 런던 히드로 공항 옆구리에 딱 붙어 있는 호텔입니다. 이륙하는 항공기의 '굉음'을 꿈에서도 들을만한 악명 높은 곳. 너무도 공항과 가까워서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이국적인 정취 하고는 눈곱만큼 찾아볼 수 없는 곳. 하지만 짧은 스테이를 마치고 다음 날 공항으로 다시 출근하기는 좋은 그런 곳. 아무튼 그런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방키를 한 손에 쥐고는 눈이 퀭한 서로를 다독이며 각자의 방으로 하나둘씩 사라집니다.
그렇게 각자 방문을 열고 차가운 방 한켠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주섬주섬 '온전한 쉼(Rest)'을 준비합니다. 비행의 순간이 승무원들 모두가 함께였기에 이 먼 곳까지 날아올 수 있었다면, 지금 이곳에서의 쉼은 순전히 나 홀로의 몫이고 나만의 소중한 순간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됩니다. 쉼에 대한 나만의 비법노트를 가지고 풀아가야 할 할 그런 소중하고도 비밀스러운 시간입니다.
캠퍼들이 새로운 정박지에 도착하면 텐트를 피고 불을 피우듯이, 깜깜하고도 고독한 방안에 들어오고 나면 저 역시 일련의 루틴에 따라 짐을 푸는데요. 하나둘씩 은은한 조명을 켜고 슬그머니 핸드폰을 꺼내 와이파이를 연결한 다음, 차갑게 얼어버린 방 공기를 따뜻한 음악의 온기로 데웁니다. 그렇게 '비행 모드(Flight mode)'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쉼 모드(Rest mode)'로 내면의 스위치를 변경하고 나면, 그제야 슬금슬금 몰려드는 '두 가지 종류의 여독'과 마주하게 됩니다.
첫 번째 마주하는 '여독'은 보통 사람들이 '많이 피로하다'할 때, 사우나를 간다던지 마사지를 받는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풀 수 있는 신체적 피로 <Jet-lag>입니다. 이 타입은 장시간 여행으로 축적된 신체적 호르몬으로 인한 ‘축축 처짐 또는 천근만근 한 몸뚱이’로 느껴지는 피로 타입인데요. 비행기라는 '타임머신'을 타고나면 순식간의 시간적, 장소적인 혼란을 통해 우리 몸에서 반응하는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할까요? 장거리 비행 이후에 도사리고 있는 이 피로는 일반 여행객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장거리 승무원들에게는 익숙한 종류의 것들입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이러한 신체적 피로는 충분히 늘어지게 한숨 자고 나면 풀리곤 하는 조금은 다루기 쉬운 형태입니다.
하지만 제가 주로 경험하는 두 번째 '여독'은 첫 번째와 조금 결이 다른데요. 제가 나름 <Soul-lag>이라 명명한 또 다른 영역의 피로입니다. 긴 여행 후에 정신적 면역계에서 발동되는 정서적 피로입니다. 일종의 완벽주의와 긴장, 일에 대한 집착, 대인관계의 피로, 불안감, 스스로의 비교와 자책, 허탈감, 정신적 허기감과 같이 비행 후 부지불식 간에 몰려드는 마음의 여독들입니다. 길고 험난한 여행을 마치고 침대에 누울 때 느끼는 왠지 모를 울적함이라고 할까요? 이렇게 마음에 누적된 <Soul-lag>은 첫 번째 피로와 달리, 쉽게 단순 잠으로는 풀리지 않는 고약한 타입이더라고요.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때로는 책을 통해, 때로는 기도를 통해 정서적인 방법으로 이 두 번째 여독을 풀어야만 다시 날아갈 수 있는 여력이 생기곤 하더군요.
숲(Forest)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입니다. 쉼(Rest)이 포근히 안겨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For Rest’ 30분 아니, 20분이라도 좋습니다. 다행히 런던 현지의 아침 공기가 그리 차지 않아서, 구글맵으로 호텔 근처의 숲을 찾았습니다. 오늘은 여기가 나만의 쉼의 공간이자 비밀의 정원입니다. 세상의 공간과 차단된 숲을 슬금슬금 걷다 보면 마음 깊숙이 바싹 타들어갈 것 같았던 'Soul-lag'도 어느새 숲 속 어느 나무 한그루, 낙엽 하나에 스며들곤 하더군요. 그 스며든 깊이만큼이나 숲은 제게 다시 날아갈 용기와 영혼의 자양분을 기꺼이 제공합니다.
'힘이 들 때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쓰다가 이내 서글퍼지는 것보다,
산책이 더 위로되기도 한다.
자연은 너 왜 그러냐고 의심하지도 않고, 다그치지도 않는다.
외면하지도, 나무라지도 않는다.
상처 주지 않는 친구들은 늘 자연뿐이니.'
한없이 품어 안는 자연의 포근함. 촉촉해지는 마음. 무언가 애쓰지 않아도 되는 여유. 어떤 비용도 없이 산책길이 제공하는 사색. 아무도 모르는 곳, 아무도 찾지 않는 나만의 공간으로부터 오는 해방감.
-Rita's Garden, 안 리타
‘현재의 쉼(Rest)은 다음 내 근무(Duty)의 연장선 상에 있습니다’. 지독히 머리를 맴도는 회사 매뉴얼 한 장, 젭슨(Jeppesen) 공항 절차도 중요하지만, 나만의 쉼의 방법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 방법으로 진정한 쉼을 얻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입니다. 제 아무리 천재 조종사 '매브릭' 할아버지가 와도 온전한 쉼이 없이는 최첨단 비행기조차 금세 고철덩어리가 되고 말 거니까요.
누구나 때때로 번 아웃되거나, 제대로 된 쉼이 부족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쉼이 부족해지면 일할 때, 사람을 대할 때, 혼자 있을 때, 마음이 조급해지고 여유가 없어지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마치 배터리 2% 남은 핸드폰처럼 불안에 휩싸이고 나면, 누군가의 따뜻한 조언도 듣기 싫은 잔소리로 들리곤 하는데요. 나만의 그 배터리 경고를 재빨리 감지해야 바로 충전 모드로 아니, 쉼 모드(Rest mode)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비행을 하면 할수록, 더더욱 쉼(Rest)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근무(Duty) 이상으로 말입니다.
24시간의 짧은 스테이를 마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오다 출근길에 만난 기장님께 오늘도 진심을 담아 여쭙습니다.
“기장님, 잘 쉬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