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책 리뷰
2주에 한 편씩, 열달 동안 편지를 주고 받은 것을 문학동네 웹진에 올림. 그것들을 한 데 엮어 만든 책.
우리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탓에 삶을 대하는 태도도 가지각색이다. 그 중 정반대 되는 사람들끼리 나눈 편지를 엿 본 기분이다.
이후에도 둘은 여전히 좋은 친구일까..? 아닐 것 같다…너무 다른 사람들.
읽으면서 “지금 당장! 책을 덮고! 뭐라도! 이렇게! 쓰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다행히 나는 52% ‘읽는 사람‘, 48% ‘쓰는 사람‘인 정체성을 가진 탓에 “간신히” 들썩 거리는 엉덩이를 부여잡고 다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
이슬아
전문 작가, 1992년생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 <가녀장의 시대>
구린 걸 구리다고 매우 능숙하게 말하는 사람, 시종일관 남궁인을 디스함. “조선 힙스터”
폐소공포증을 앓고 있음. 엘리베이터, 공중화장실, 지하철, 계단실에 있으면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이 안 쉬어짐을 느낌.
이슬아의 글을 읽으면 이상하게 맛이 느껴진다. 읽는 행위는 시종일관 시각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상하게 미각이 느껴지는 것이다. 무슨 음식이냐고 따져 묻는다면 전라도 음식 같다고 말하고 싶다. 간이 쎈데 한 숟가락만 더..! 딱 한 숟가락만 더..! 하게 만든다.
어휘 선택을 기가 막히게 한다. 어떻게 이런 맛깔나는 표현을 생각해내지? 감탄하게 만든다.
찐팬이 많고 그만큼 찐안티가 많을 것 같은 작가.
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이자 작가, 1983년생
<제법 안온한 날들>, <만약은 없다> 등
적당히 미남이라 이슬아로 하여금 웃길 때 웃고, 안 웃길 때 안 웃을 수 있게 함.
구린 게 구린지 모르진 않지만, 입 밖으로 내기에는 망설이는 사람. 그러면서 혹여나 누군가 구림을 꾸짖을까봐 항상 전전긍긍하며 사는 사람.
태어나서 명품을 한 번도 사본 적 없는 사람. 국산 중형차를 10년째 타고 시계는 9년 전에 중고나라에서 산 것을 참.
냉장고에서 발견한 6개월 전 오징어 볶음을 발견했을 때 곰팡이만 걷어내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잠깐 고민하는 사람. 남궁상.
착한 사람, 조금 재미 없는 사람, 따뜻한 사람. 잔잔하고 궁상 맞은 사람.
자기 탐구를 즐기고 그것을 마구마구 표현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사람.
읽을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발제문을 적다보니 유효타가 많았다…!!
싫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팬이 많을 것 같지는 않은 작가.
친절한 사람들이 아프지 않은 세계에 살고 싶다. 그런 세계에서는 친절한 사람과도 좋은 싸움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장을 잘 쓸 수록 독자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이기 쉬워집니다. 실제로 만난 남궁인이 순두부찌개적인 반면 글 속의 남궁인이 까르보나라적인 것도 그래서일 거예요.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저는 어김없이 소량의 징그러움을 느낍니다.
폐소공포증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을 거 아니에요. 제 몸과 마음이 여유가 있으니까 이러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까, 무서워할 여유요.
저에게 행복은 아프거나 괴롭지 않은 상태입니다. 아픈 곳도 괴로운 문제도 없는 날에, 그것이 어마어마한 행복임을 알아보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습니다.
지금껏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여전히 첫 책입니다. 우리 둘 다 마찬가지죠. 이 사실이 가끔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글의 성취와 판매 부수가 언제나 나란히 가는 건 아니지요. 그래도 궁금해집니다. 우리는 데뷔작보다 성장하고 있는 걸까요? 선생님의 글쓰기는 갈수록 나아지고 있습니까? 작가로서 자신을 어떻게 갱신하고 계신가요? 갱신이라는 것은 한 번 했다고 끝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갱갱신 갱갱갱신을 계속해야 좋은 작가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나로 인해 상대가 놀라거나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걸 보며 얻는 커다란 만족감이 연애에는 있지 않습니까. 너무 태연한 상대의 얼굴을 보면 멱살을 잡고 싶어지죠. 좀 파괴적인 이 속성이 때때로 즐겁지 않으신가요. 파괴만큼이나 회복도 잘되는 곳이 연애의 시공간이잖아요.
좋은 이야기는 저를 바꿔놓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처럼 저도 우정과 함께 변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정의 범위는 갈수록 커다래지고 있습니다. 가까운 대상, 먼 대상, 만나본 대상,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자꾸 마음에 걸리는 대상, 오래 산 대상, 짧게 산 대상, 사람 아닌 대상, 이미 세상을 떠난 대상… 이렇게 적고 나니 우정의 능력이야말로 작가들이 갈고닦아야 하는 무언가처럼 느껴집니다.
말을 많이 한 날, 특히 커다란 매체를 통해 내 말이 확대재생산된 날에 저는 잠이 안 오던데요. 선생님은 괜찮으신가요? 주워담고 싶은 말은 없으신가요? 후회로 뒤척이는 밤에,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궁금하면서도 알기 조금 두렵습니다.
라떼는의 핵심은 어떤 이가 자신보다 덜 오래 산 사람 앞에서 과거의 무용담 혹은 고생담을 늘어놓으며 상대방 인생의 경험치를 일면 축소하는 말하기 방식이잖아요. 경험의 양이나 길이로써 대화의 우위를 점하려는 태도가 라떼는을 라떼는으로 만듭니다.
지난 편지에서 선생님은 언젠가 ”애인에게 야단맞고 벌을 서거나 쫓겨나기도“ 했다고 쓰셨지요. 첫번째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의 전 애인은 왜 화가 났을까?’ 두번째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죠. ‘이것은 남자의 글이구나.’ 어떤 과오로 벌어진 해프닝이든 간에 남자로 살아와서 쓸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문장을 거리낌없이 쓸 수 있는 건 대개 남자이기 때문일 거예요. 여자의 글일 경우 농담으로 읽히기 어렵잖아요. 제가 그렇게 썼다면 선생님은 분명 저를 걱정하실 것입니다. 그럴 법하니까요.
아내에게 잡혀 산다는 남편의 말이 특정 남성 집단에서 유머 코드로 통용될 수 있어도, 남편에게 잡혀 산다는 아내의 말은 어느 집단에서나 웃음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먼지만큼 사소한 문장이지만 그것을 읽으며 우리가 가진 젠더 권력이 서로 다르다는 걸 알게 됩니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계절이에요. 글을 다시 쓰기도 좋은 계절이고요. 어쩌면 우리는 변하고 싶어서 글쓰기를 계속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과거에 썼던 표현을 쓰지 않음으로써, 혹은 과거에 없던 표현을 새로 만듦으로써 작가들은 새로워지잖아요.
지치고 싶어서 갑자기 대청소를 시작한 날들이 떠오릅니다. 선생님도 가끔은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육체를 지치게 만들지 않나요? 이를테면 저는 애인이 떠날 것 같을 때 혹은 떠났을 때마다 그랬습니다. 청소는 제가 마음을 굳게 먹고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선생님은 주로 저에게 혼나시느라, 반성하시느라, 회상하시느라 바쁘셨지요. 그건 남궁인이 남궁인을 재발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슬아 역시 남궁인을 재발견하느라 참 재밌었습니다. 하지만 남궁인이 이슬아를 얼마나 재발견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남궁인 안에서 이슬아는 어떻게 새로워졌습니까?
하필 두 사람이 만났기 때문에 쓰여지는 이야기가 서간문의 매력이잖아요. 서로를 경유한 문장을 생각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번갈아가며 자기 얘기를 쓰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선생님의 편지 안에서 수신자인 저와 크게 상관없는 썰이 참 길었다는 점이에요.
두려움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동시에 주는 당신
글에는 까닭 있는 솔직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작가님의 글은 매번 어처구니없이 솔직했지만, 갑자기 독자를 어디론가 이끌더니 평양냉면처럼 슴슴한 미지의 포인트를 짚어내며 끝났습니다. 마지막 단락을 읽고 “아, 잘 쓰잖아”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건 재능입니다. 누구나 솔직하고 싶지만, 누구나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득 남을 생각하다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서간문의 본질임을 직면합니다.
물질적인 것은 나를 즉시 파괴해버릴 것 같아요. 그런 방식으로 나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야 한다면, 나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만약 그것들이 내 소유가 된다면 나는 두려워 한시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불안과 우울에 대한 일기를 적곤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좋은 방법은 약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어떨 때는 무서울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싶다가도, 어떨 때는 한없이 약해져 어떤 것과도 싸우고 싶지 않은, 우리의 변화하는 성정이 결국 불안과 공포의 근원인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먹는 약이나 좋은 정신과 의사보다는, 누군가 와락 안아주는 일 같은 것이 우리의 불안을 잠재우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계속 이겨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패배하고 가끔 승리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다시 패배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삶은 눈물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평생 사랑하는 한 사람을 깊게 탐구하는 것이 행복할까요? 아니면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탄하는 것이 행복할까요?
지난 크리스마스에도, 새해 첫날에도 저는 응급실에 있었습니다. 그런 날들의 응급실은 어떨 것 같습니까. 병원 밖 보통 사람들은 행복한 날이지요. 대신 응달에 남겨진 사람들은 얼마나 처절하게 불행에 떠는지 모릅니다. 모두가 들뜬 세상의 변방에서 벌어지는 파괴와 고독을 목격하는 일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자면 그다지 행복하고 싶지 않아집니다. 어떤 죽음을 보고 있으면 자신 또한 영영 행복하기 어려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자신의 사연이 소진될 때가 글쓰기의 진정한 시작일 겁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확장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신의 세계에서 동어반복하며 배회하지 않으려면, 그러다가 불시에 악과 어둠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끝없이 갱신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불의에 둔감해질 때, 우리의 존재는 휘발될 것입니다.
친구들과 놀러가 술을 마셔도 이 순간을 시로 남겨야겠다면서 노트에 적어댔습니다. 보잘것없는 단상이 기록되지 않고 지나가는 일에 발을 구르던 미련한 존재였습니다.
하여간 우리는 늘 뜯어먹고 살 과거가 필요한 것일까요. 그리고 그 찬란한 시간은 우리에게 다시는 오지 않는 것일까요. 저는 빛나는 시간들을 이미 모조리 탕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되돌릴 수 없으니 아무리 찬란했어도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무엇이든 아쉽지 않습니까? 그리고 뇌리에 박힐 순간임을 인지한다면 우리는 더욱 치열하게 살아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것은 그저 그런 어른이 되어가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지금 어떤 순간을 살아야 할지 고민에 빠집니다.
저는 환자 앞에서 말을 던지고 10초 정도는 가만히 생각해보는 의사입니다. 위로하지도 애써 달래지도 않고 그냥 생각합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무심한 제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너를 기록하는 역사가가 되는 거야. 네 옆에 일생을 머물면서 너를 치밀하게 기록하는 사람, 너에 대해 모든 것을 기억하고 또 편찬하는 사람. 나는 기꺼이 생을 다 바쳐 당신이라는 역사의 지극한 사서가 되는 거야.
제가 아무리 궁상을 떨었어도 작가님의 힘든 시절 앞에서는 공손해지는 것처럼, 작가님의 행복한 기억 역시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 유희경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티셔츠 안의 비좁은 공간만큼 저는 당신들을 모릅니다. 외출하기 위해 머리부터 티셔츠를 뒤집어쓰는 순간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날 미지를 돼새겨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안에는 다른 몸, 다른 세계, 그리고 한 우주가 들어 있습니다. 무수한 우주와 마지막은 영원히 반복되고 우리는 끝까지 홀로 외롭게 항해할 것입니다. 우주와 우주 사이의 간극 또한 새로운 우주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것이 아련해질지라도, 아득한 거리에서 빛을 뿜으며 서로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