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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매 Jan 20. 2024

[산책일기] 우체국 심부름을 기다리는 직장인

 7년 전, 휴학생 시절 인턴 사원으로 현 직장에 처음 발을 내딛었습니다. 첫 사회생활에 여러 업무를 익혀야 해서 매우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 저의 마음을 가장 설레게 하는 업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우체국 심부름'이었습니다. 전국 지자체에 계약 서류를 보낼 때 '막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우체국에 등기를 부치러 가는 일이었죠. 요즘에는 이런 잔업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불만을 갖는 직원들도 많은 듯하지만, 유독 산책과 바깥 공기를 좋아하는 저에게는 이만큼 매력적인 '농땡이'가 없었습니다.


 회사에서 우체국까지는 걸어서 15분, 왕복 3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으니 산책러에게는 아주 알맞은 농땡이 코스였습니다. 어떤 선배는 "우체국 다녀오는 김에 경의선숲길도 괜히 들러보고, 돌아오면서 버블티도 한 잔 마시고 오라"는 조언을 해주기도 했죠. 특히나 날씨가 좋은 봄 가을에는 분명 업무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남몰래 나들이를 나온 듯한 기분에 콧노래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 사이 인턴 사원에서 과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저에게 이제 '우체국 심부름'은 1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업무가 되었습니다. 각 팀의 막내 직원들이 휴가를 떠나지 않는 이상 저한테까지 이 업무가 돌아올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분명 제일 좋아하는 업무 중 하나였는데, 몇 년 동안 저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이후로는 한여름 더위와 한겨울 한파를 뚫고 우체국에 갈 일이 없어진 거죠.


 1월, 여느 날처럼 팀 막내에게 "내일 우체국 좀 다녀와줘. 빠른 등기로!" 라는 말을 남기고 퇴근을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느긋하게 누워 뉴스를 보다가 다음 날 '극강의 한파'와 '눈보라'가 동반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간 생각이 있었으니.


'어, 내일 막내 우체국 가야 하는데 춥겠다. 어쩌지?' 


 다음 날 출근길.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 막내를 우체국에 보낼 수 없다는 이유 없는 인류애, 간밤에 우체국 심부름 길이 그리워진 변덕스러운 마음 때문에 결국 한겨울 심부름꾼을 자처하기로 한 것입니다. 사무실에 도착해 팀원들에게 "우체국.. 제가 다녀올게요! 급한거 아니니까 점심시간에 갔다 올게요." 라고 말하니 눈이 동그래진 막내 직원이 저를 뜯어 말리더라구요. "저 오늘 우체국 가려고 장갑이랑 목도도 가져오고, 신발도 골라 신고 왔는데... 과장님, 제가 갈게요!" 대체 우체국 심부름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해 준비해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20분 전, 주섬주섬 짐을 챙겨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을 작게 남기고 길을 나섰습니다. 생각보다 길이 미끄럽고 강한 눈보라가 얼굴을 때려 아주 잠시 후회하기도 했지만 꿋꿋하게 걸어 나갔습니다. 분명 지름길이 있지만 일부러 돌고 돌아가고 싶었어요. 우체국 심부름을 떠나는 산책길에는 '평일 오전 홍대 앞 길거리에는 어떤 사람들이 오가는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거든요. 전날 밤 과음하고 널브러진 젊은이들은 아무리 늦어도 이미 집에 돌아갔을 시간이고 직장인의 점심시간까지는 30분 정도가 남은 데다가 대학생들은 종강 후 방학을 시작했으니 그리 북적거리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이 길을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왠지 바람 쐬러 나온 이 기분, 최고야' 라구요. 그런데 어쩐 일인지 여전히 극도의 낭만주의자인 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아, 평일 이 시간에 홍대 앞에 목적없이 걸어도 통장에 돈이 쌓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였습니다. 일하기 싫은 직장인의 비애일까, 30대에 들어서면서 내가 변해버린 걸까. 이렇게 눈 내리는 날에 저런 낭만 없는 생각을 하다니. 스스로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괜히 좁은 골목길로 걸어갔다가 백화점 로비도 가로질러 보고 돌아가는 길에 어떤 점심 메뉴를 먹을지 고민하며 새로 생긴 가게 앞도 어슬렁거리다보니 어느덧 우체국 앞. 역시 산책러에게 15분은 참 짧은 시간입니다.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심부름을 마치고나니 점심시간이 아직도 1시간 20분이나 남았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도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간단히 김밥 한 줄을 사먹고 다시 열심히 걸어 숨을 헐떡이며 사무실에 돌아와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유독 회사 내 다양한 사건사고로 시작한 새해가 버겁게 느껴지던 찬라에 이 날의 산책은 제게 큰 쉼이 되어준 듯했습니다. 이 날의 산책길은 아무것도 모르고 큰 꿈을 꾸던 휴학생 김애매와 현재의 김애매가 만나는 길이었고, 그간 몸도 마음도 변해버린 자신을 돌아보는 길이었으니까요. 우체국 심부름이 마냥 즐거웠던 지난 날의 나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어떻게 하면 평일 오전에 숨만 쉬어도 돈 버는 사람이 될지 고민하는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이겠죠. 어쩌면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못난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말 다양한 이유로 산책을 합니다. 특히 '내 마음 속 나와 솔직하게 만나기 위한 산책'을 참 좋아해요. 산책을 하며 꺼내본 나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 잠시 낯선 공기를 들이 마시고 용기있게 마주하다보면 뭐든지 다 좋고 괜찮게 느껴지니 이런 '셀프 치유'가 따로 없습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일단 걸어 보라던 어떤 의사 선생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매번 느끼곤 합니다. 그나저나 다음 우체국 심부름은 언제 가게 될까요? 몰래 버블티를 마시고 돌아오는 것보다 평일 낮, 나를 마주하는 산책이 그리워져 막내 직원의 업무영역을 침범할 것만 같은데 어쩌면 좋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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