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직장인들이 마찬가지이겠지만 저는 유독 점심시간을 사랑하는 K-직장인입니다.
오전 업무를 잠시 멈출 수 있어서, 맛있는 식사가 기다리고 있어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테지만, 저는 유독 '다른 사람들과 밖에 나간다'는 사실만으로 점심시간을 좋아합니다. 사무실이 홍대 인근에 있어 조금만 걸어가도 SNS 핫플레이스에 갈 수 있는 데다가 업무 시간과 달리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수다를 떨 수 있으니 말이죠. 극도의 외향형이기 때문에 시끌벅적 오가는 대화 속에서 에너지를 얻는 편이라 더욱 그런 듯합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일단 "점심 먹읍시다!" 한 마디에 바로 외투를 꺼내 입고 문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점심시간과 조금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졌습니다. 업무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지거나 체력적으로 지치는 때가 오면 '혼자 있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 샘솟더라구요. 보통 조용히 혼자 있고 싶다는 마음은 퇴근 후에나 찾아오는 줄 알았는데 꽤나 낯설고도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점심시간에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아무렇게나 길을 나섰습니다. 정말 아무 곳에나 가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어야겠다는 다짐으로요. 오전 11시 40분에 찾은 카페는 텅 비어 있었고, 졸지에 저는 첫 손님이 된 기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너무 익숙치 않아서일까요? 새로운 일상 속 도전에 긴장이라도 한 것처럼 주문하는 목소리마저 떨리더라고요.
일단 출출한 속을 달래기 위해 샌드위치와 피치스커스 티 한 잔을 주문하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책을 꺼냈습니다. 평소 같으면 양쪽 귀에 에어팟을 꽂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들었겠지만, 이 날만큼은 카페에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와 약간의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 글을 읽어 나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대로 여행 온 외국인 가족의 꼬부랑 발음, 식사를 마치고 찾아온 직장인들의 하소연, 주인과 산책 후 잠시 들른 강아지의 으르렁소리 등으로 가득 찬 카페는 낯선 점심시간 풍경을 더욱 짙게 만들어주었죠.
아, 수다쟁이인 내가 이토록 조용한 점심시간을 보낸 적이 있던가. 오전과 오후 업무시간 사이에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새삼 1시간 30분의 점심시간이 길고도 소중했습니다. 그동안 왜 힐링타임은 퇴근 후에만 가질 수 있다고 믿어온 것인지 모를 일이었어요. 게다가 정문정 작가의 <더 좋은 곳으로 가자>에 오전에 저를 힘들게 하며 엉켜버린 인간관계 실뭉치를 풀고 오직 제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말들이 가득해 짧은 강연을 듣고 온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유튜버는 한 달에 한 번 '나와의 데이트'를 즐긴다고 합니다. 나라는 데이트 상대를 위해 좋은 것, 맛있는 음식에 돈과 시간을 쓰는 날을 정한 거죠. 돌이켜보면 자기 자신과 데이트를 나가는 그녀가 유독 가볍게 발걸음을 내딛던 모습이 내심 부러웠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데이트는 퇴근 이후 저녁시간이나 약속이 없는 주말에만 누릴 수 있는 시간이라 여겼는데, 점심시간 1시간 30분 동안에도 나와의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을 감추기 어려워졌습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첫 사회 생활을 시작할 때 동료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사회생활'이라 배우면서 이 또한 잘 해내야겠다는 강박을 가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수많은 점심시간이 쌓여 동료들과 라포를 형성하고, 인생의 지혜를 배울 수 있었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일상 속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나만의 시간, 나와의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또 하나의 쉼과 지혜를 배워가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죠. 혼자라서 따분하기보다는 혼자라서 더 풍성했던 점심시간의 충격적인 기억을 되뇌봅니다.
나를 잘 알고, 나를 잘 달래면서 살아가는 삶은 이런 작은 순간들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