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약판매 41권에서 시작된 나의 검열

나는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by 청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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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본부장에게서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예약 판매가 시작되면서 본부장은 판매된 부수를 일주일 간격으로 알려주었다. 오늘이 예약판매 마지막 날이다. 1월 13일까지 예약 판매 부수는 41권이라는 내용이었다. 계약상 200권 중 팔린 수량을 제외한 나머지는 저자가 할인된 가격으로 사야 했다. 증정본 5권을 포함해 164권이 집으로 배송되고 구매 비용은 이백만 원이 조금 넘었다.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금액은 정확했다. 계약할 때 이미 알고 있던 조건이었지만, 막상 숫자로 받아 보고 계좌 이체를 하려니 생각이 달라졌다. 책을 내는 방법이 이것뿐일까 하는 질문이 자언스럽게 떠올랐다.

출간 계약서에 서명하던 날을 떠올렸다. 예약 판매가 200권을 채우지 못하면 결국 내가 사야 하는 구조라는 걸 알고 있었다. 41권이나 팔렸다는 생각에 잠깐 웃음이 났다. 주변에 크게 알리지도 않았다. 단체 문자를 보내지도 않았고, 사 달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41권이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다음 줄을 읽는 순간 마음이 다시 가라앉았다. 숫자는 늘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팔린 권수보다 남은 권수가 더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왜 남는 쪽부터 계산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아침에 전화 중국어 수업을 하다 선생님이 인세는 어떻게 받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선 듯 답하지 못했다. 수업이 끝나고 계약서를 다시 찾아보았다. 그날의 나는 빨리 서명하고 싶어 했던 사람 같았다. 줄마다 의미를 따져보지 않았다. ‘출간’이라는 단어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달랐다. 한 줄 한 줄을 천천히 읽었다. 그때는 보이지 않던 문장들이 이제는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기쁨은 순간이었고, 계약은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이제야 실감했다.

601권부터 인세가 발생한다는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19,000원에 8퍼센트. 머릿속으로 계산이 잘되지 않아 다시 계산기를 켰다. 1,520원이라는 숫자가 떴다. 한 권이 팔릴 때마다 들어오는 돈이었다. 숫자를 보고 나니 웃음이 나왔다.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그제야 책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내가 붙잡고 있던 건 책이 아니라 숫자라는 걸 알았다. 책은 이야긴데, 계약서는 숫자였다. 나는 숫자 앞에서 자꾸 작아졌다.


본부장은 메일에서 한국도서출판정보센터에서 판매량을 확인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책이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연두색과 진분홍 표지가 화면에 나타났다. 같은 제목의 책도 보였지만 내 눈에는 내 책만 들어왔다. 이백만 원을 이체하며 느꼈던 씁쓸함은 그 순간 사라졌다. 책이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 하나로 마음이 바뀌었다.


신간 목록을 더 살펴보았다. AI 시대에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다룬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책 제목에 ‘글감독’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AI로 동화와 소설, 만화를 만드는 법을 소개하는 책 같았지만 핵심 요지는 AI가 만든 결과물일수록 누군가는 그것을 검열해야 한다는 내용 같았다. 만들어내는 일보다 감독하고 검열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인공지능 시대를 겨냥한 책을 내려고 목차를 받아 놓은 상태다. 한참 동안 이 책의 표지를 보고 내 책의 방향을 생각해 보았다.


그때 박 계장이 조간신문을 가져다주었다. 박계장은 종이신문을 구독한다. 나에게도 읽어 보라고 권한다. 사설을 보고 넘기다 작은 칼럼 하나가 눈길 걸렸다. 제목은 ‘AI라는 호랑이 등 위에서’였다. 저자는 한문 고전 번역에서 AI가 아직 허술하다고 했다. 전문가의 눈에는 틀린 부분이 보이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럴듯한 문장을 그대로 믿는다고 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뜨끔했다. 나도 모르면 믿어버리는 쪽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럴듯하면 넘어가고, 편하면 확신해 버린다.


글을 읽으며 생각이 이어졌다. AI 시대에 필요한 존재는 AI가 아니다. AI가 만들어 낸 결과를 인간의 관점에서 고르고 걸러내는 사람이었다. 검열자이자 감독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인간이 그 역할은 하려면 지금보다 더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훈련하고 연습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위해 해온 행위는 독서와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이 행위를 AI 시대에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쓴 글을 읽어 내야 한다. 읽은 후 다시 글로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AI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 검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만든 문장을 충분히 읽어 본 사람만이 AI의 문장을 판단할 수 있다. 요즘 세상은 점점 극단으로 향한다. 전쟁과 혐오가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이럴수록 나는 더 읽고 더 써야 한다고 느낀다. 내 생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 스스로 검열해야 한다.

돈이 들어도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직장을 다니는 이유 역시 그 하나로 정리되었다. AI가 만들어 놓은 결과를 그대로 믿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나 자신의 생각을 내가 먼저 검열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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