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이 흘러가는 방향을 생각하다
아침에 눈을 떴다. 날이 추워질수록 이불 속으로 더 들어가고 싶다. 울리는 알람을 끄고 일어났다. 이불을 갰다. 남편이 다른 방에서 나오며 오늘 버스 파업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일어나 카카오톡 문자부터 확인하는데 남편은 이미 아침 뉴스 속보를 보았나 보다.
나는 늘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오늘은 지하철을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하철역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전광판에는 열차가 세 정거장 전에 있다는 안내가 떠 있었다.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은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적당한 문 앞에 섰다. 열차가 도착했고 내 앞에서 멈췄다.
제기역에서 내려 구청까지는 걸어서 십 분 정도다. 어제 내린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웠다. 어떤 가게 앞에는 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떤 가게 앞에서는 누군가 염화칼슘을 뿌리고 있었다. 또 어떤 가게 앞은 눈을 밟지 않고 걸을 수 있게 눈이 치워져 있었다.
눈이 오면 구청 직원들은 지정된 구역으로 나가 눈을 치운다. 근무 시간과 상관없다. 비상이 걸리면 나가야 한다. 겨울마다 반복되는 일이다. 솔직히 귀찮다. 그래서 나는 눈이 싫다.
어둑한 하늘. 인도는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그 위로 까만 길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길을 따라 나는 편하게 걸었다. 눈을 치우는 일은 귀찮다. 하지만 치워진 길을 걷는 일은 분명 편했다. 그 길을 걷다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눈이 와서 비상이 걸리면 마지못해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발걸음을 떠올리며 가벼운 마음으로 눈을 치우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청 입구에는 채소와 과일을 파는 가게가 있다. 나는 그곳을 ‘싸다구 가게’라고 부른다.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다. 물건이 아주 좋지는 않다. 대신 싸다. 우리 집 근처에도 이런 가게가 있다. 나도 자주 이용한다.
아침 이른 시간인데도 가게는 이미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현지 팀장이 가게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진분홍 시장바구니가 묵직해 보였다.
“팀장님, 아침에 벌써 장을 봤어요?”
내가 말을 걸자, 현지 팀장은 놀라더니 나를 보고 이내 웃었다.
“누군가 했더니 너였구나. 나 여기서 장 잘 봐. 남편 도시락도 싸야 하고, 여동생이 매일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거든.”
현지 팀장에게는 딸이 둘 있다. 아이들은 이미 다 독립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살림은 어머니가 다 해주셨다고 했다. 자기는 직장만 다니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아이들 다 나갔는데, 이제야 그때 못 했던 살림을 하시는 것 같아요.”
내 말에 현지 팀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서 하는 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요리를 잘하지는 않지만, 자기 몫이라 여기며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얼굴이었다.
나도 아이들과 떨어져 산다. 지금은 남편과 둘이 산다. 주중에는 거의 밥을 하지 않는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반찬 걱정도 없다. 투정할 사람도 없다. 가끔 남편이 먹을 게 없다고 말하지만, 그냥 무시할 때가 많다.
그런 나에게 현지 팀장의 모습은 다르게 다가왔다. 언니이자 아내로서, 언젠가는 한 번쯤 맡게 되는 역할을 피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구청을 오가며 그날 먹을 재료를 하나씩 산다는 말에서도 지루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하기 싫은 일을 그녀는 자기 일처럼 하고 있었다.
왜 우리는 다를까, 생각해 보았다. 같은 하루를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자기 몫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피하려 한다.
그녀는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고 자랐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충분히 도움을 받으면, 언젠가 그걸 돌려주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받은 만큼 흘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사람 마음속에는 있는 것 같다.
오늘 아침, 나는 치워진 눈길을 편하게 걸어왔다. 그 길 덕분에 미끄러지지 않았다. 그 길 덕분에 생각도 조금 달라졌다. 눈이 오면 싫어하기만 했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도움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이 남을 도울 수 있고,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말이 이해되는 아침이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한 사람으로 자라기까지 수많은 손을 거친다. 그렇게 자란 뒤에는, 받은 것을 다시 건네는 삶이 시작된다. 그래서 인생은 돌고 도는 것처럼 보인다.
받기만 하며 살 수는 없다. 남을 돕는 순간을 피하지 않을 때, 사람은 어른이 되어 간다.
하지만 남을 돕겠다는 말은 말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실행은 늘 어렵다. 예전의 나는 이런 생각도 글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글을 쓴다. 이 아침을 붙잡아 기록한다.
이 정도면, 나는 조금은 사람답게 자라고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