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부터 적었다.

by 청아이

주말을 마치고 월요일에 출근했다. 쓸 말이 없었다.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막상 글을 쓰려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두 서너번 돌렸다. 주말에는 친정엄마 생신과 시어머니 생신이 있었고 요약독서법 8시간 강의를 들었다. 저자 특강을 위한 PPT도 만들었다. 한 일은 분명 많았다. 그런데 무엇부터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꺼번에 많은 일이 몰리면 더 쓰지 못하는 사람 같다. 바쁜 날은 기억이 많아도 마음이 없다. 반대로 아무 일 없는 날에는 곰곰이 생각한다. 스치고 지난 간 마음은 없는지 찾아본다. 글은 사건이 아니라 마음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게 된다.

평범한 하루가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네준다. 조용한 하루에는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때 어떤 생각이 스쳤는지 떠올릴 수 있다. 나는 단순하고 조용해야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방학마다 일기 숙제가 있었다. 아들은 저녁이 되면 늘 쓸 게 없다고 했다. 일기장을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있는 그를 보면 그의 숙제인데도 나의 숙제 같았다. 아들이 일기를 쓸 수 있도록 내가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해주곤 했다. “ 형진아 오늘 할머니네 갔잖아. 그거 써.”라고 말했다. 그러면 아들은 “엄마 어제도 갔는데.”하고 말했다.

매일 똑같은 하루라서 쓸 것이 없다고 했다. 방학이 되면 나는 소재를 만들어 주려고 물놀이를 가고 일부러 외식했다. 점심때 짜장면이라도 먹는 날이면 나는 “오늘은 짜장면 먹은 거 쓰면 되겠다.”라고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보고 웃었다. 그날 아들의 일기장 마지막 문장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맛있었다. 참 재미있었다.’다. 나의 숙제도 마친 듯 했다.


아들만 그랬을까. 나도 초등학교 방학 때 쓰는 일기를 제대 쓰지 않았다. 개학식이 다가와서야 몰아서 썼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는 아들이나 나나 같았다.

날짜와 날씨를 쓰고 나면 할 말이 없었다. 몰아서 쓰는 일기는 방학 숙제 중 가장 힘들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일기 숙제도 끝났다. 홀가분했다.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은 일상을 옥죈다는 걸 알겠다.


그러다 대학에 가서 다시 일기를 쓰게된 계기가 있었다.. 마음이 괴로웠다. 좋아하는 마음과 숨기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있었다. 그 마음을 어디에도 둘 수 없어서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이성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중과 여고를 나왔다.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남녀 공학을 원했다. 성적이 안 돼도 여대는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다. 정원 50명 중 32명이 남자였다. 기대와 달리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동기들과 동아리 방을 기웃거렸다. 신입생이 동아리 방 문을 열면 선배들이 일제히 바라봤다. 나는 AFKN 청취 반에 가입했다. 영어 공부 때문은 아니었다. 회장 선배가 잘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도 친절했다. 나는 그가 좋았다. 하지만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나를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일은 자존심 상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가 건네는 따뜻한 말이 좋았다. 그러면서도 모두에게 하는 친절이라고 스스로를 눌렀다.

그가 밥을 먹으러 가자고 말해도 튕겼다. 수업이 없는데도 그를 보러 학교에 간 날도 있었다. 나는 나보다 잘난 사람만이 그를 좋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그에게 폐가 되는 일 같았다. 그래서 더 도도한 척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여자와 엮인 소문이 돌면 괜히 짜증이 났다.

그 마음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좋으면 좋은 건데 나는 숨겼다. 그 마음을 일기장에 적었다. 열쇠 달린 일기장을 샀다. 말하지 못한 말을 거기 쏟아냈다. 그때는 일기를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쓰고 나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두세 장을 쓰면 숨이 돌아왔다.


일기는 사건을 적는 글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적는 글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오늘처럼 쓸 말이 없다고 느껴지는 날에도 글은 쓰려고 시작한다.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의 일기는 하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썼다. 대학 시절의 일기는 마음의 결을 따라 썼다. 그 글이 나를 위로했다.


하루에 일이 많으면 마음을 살필 틈이 없다. 반대로 조용하고 반복되는 하루에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날 내 마음이 어땠는지를 돌아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쓸 말이 없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아니라 마음을 바라볼 여유가 없는 하루였기 때문이다.

글이 막힐 때는 삶이 비어 있어서가 아니다.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다. 그 사실을 오늘의 모닝저널에 적어 둔다.

작가의 이전글한 번 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