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보다 먼저 온 당황에 대하여
여직원과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왔다. 아파트 현관 앞에 상자 다섯 개가 쌓여 있었다. 내 책이었다. 160권이다. 숫자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어디에 두고 어떻게 소진해야 할지 생각하며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남편의 검은 운동화가 보였다. 상자를 들여놓아 달라고 말했다. 남편은 말없이 상자를 옮겼다. 책은 거실로 들어왔다. 나는 그제야 상자를 풀었다.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알록달록한 책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내 이름이 찍힌 표지가 손에 닿았다. 책 여섯 권을 꺼내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고 사진을 찍었다. 작게나마 종이책이 나에게 온 걸 남기고 싶었다.
겉표지가 구겨지지 않도록 살짝 넘겨 '들어가는 글'부터 읽기 시작했다. 내가 읽고 있으면 남편도 함께 읽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남편은 상자를 옮긴 뒤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나와 책만 남았다.
책을 읽는 내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들어가는 글부터 떡떡 걸렸다. 눈은 문장의 앞과 뒤를 오갔다. 퇴고 때는 분명 매끄러웠다. 내 글이지만 내 글 같지 않았다. 1장 1꼭지를 펼쳤다. 그나마 여러 번 고친 꼭지다. 그런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겼다. 책을 이렇게 긴장하며 읽은 적은 없었다.
1장을 다 읽고 고개를 들었다. 거실에 있던 다섯 박스가 두 박스로 줄어 있었다. 남편에게 책을 어디에 두었느냐고 했다. 딸 방 책상 밑에 넣어 두었다고 했다. 내 책 세 박스가 딸 방 책상 밑으로 치워져 있었다. 난 거실에서 더 두고 싶었다. 예쁜 상자도 아니었다. 부피도 적지 않았다. 베스트 셀러가 될 책도 아니다. 하지만 난 나의 책을 나의 곁에 두고 더 보고 싶었다. 같이 기뻐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 설득했다. 책을 낸 일은 결국 내가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출판 계약부터 홍보까지 모든 과정이 처음이었다. 나는 끝까지 익숙해지지 못한 채 책을 냈다. 무엇을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몰랐다. 이은대 작가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고 출판사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도 했다. 홍보하라고 해서 했고 지인에게 책 이야기도 꺼냈다.
사람들은 예약판매를 잘 몰랐다. 책이 왜 안 오느냐고 물었다. 검색은 되는데 왜 아직 출간이 아니냐고 했다. 나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사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삼촌들에게는 내가 직접 책을 사서 카카오 선물하기로 보냈다. 삼촌들은 주소 입력을 못 해 책이 가지 못했다. 그 과정마저 난 서툴렀다.
아침에 책 세 권을 가방에 넣고 출근했다. 한 권은 어제 저녁밥을 사준 보리 언니에게 주었다. 두 권은 세정과와 세무과 과장님께 사인을 해서 드렸다. 사인을 하며 또 망설였다. 책에 어떤 말을 써야 할지 몰랐다.
보리 언니에게는 ‘한번 해 보세요’라고 썼다. 쓰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독자에게 해 보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이은대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과장님들 책에는 ‘당신은 이미 하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노트에 연습한 사인을 그대로 옮겼다.
예전의 나는 책을 선물로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읽고 싶지 않은 책을 받으면 부담스러웠다. 내게 좋았던 책이 남에게도 좋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독서를 좋아한다고 모든 책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사인을 해서 책을 건네고 있다. 좋아하든 말든 책을 내밀고 있다.
예전의 나는 책을 받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나는 책을 건네는 사람이 되었다. 그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글을 쓰는 것과 글을 읽는 것, 책을 보는 것과 책을 내는 것의 차이는 크지 않아 보인다. 동사 하나 차이다. 하지만 해 본 사람은 달라진다.
첫 출간이라 모든 일이 어설펐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분명한 게 하나 있다. 남들이 좋아하든 말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는 책을 팔았고 누구에게는 책을 건넸다. 그때의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숙했고 서툴렀다. 다음에 또 책을 내면 조금은 덜 당황할 것이다. 한 번에 잘할 수는 없다.
나는 이제 안다. 이미 해 본 사람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