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기지 않기로 한 선택

쓰는 사람과 쓰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서

by 청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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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미희 계장이 모닝커피를 하자고 했다. 용두복지센터 2층으로 갔다. 미희 계장이 먼저 와 있었다. 나를 보자 텀블러를 달라며 카운터에 맡겼다. 나를 보자마자 어떻게 일하면서 책까지 냈냐고 물었다.

미선 계장은 나를 테이블로 안내하고 나서 카운터로 갔다. 커피가 담긴 내 텀블러와 자신의 커피잔을 들고 왔다. 텀블러를 다소곳이 내 쪽으로 밀면서 눈은 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우리는 각자의 커피를 한 모금씩 마셨다. 침묵은 짧았으나 쓴 사람의 마음과 쓰지 않은 사람의 마음이 충분히 오갔다.

미희 계장은 자기도 예전에 글쓰기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요즘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책을 쓰고 싶어 하는 것 같다며 말을 꺼냈다. 학교 다닐 때는 글짓기 대회에 나가 상도 탔다고 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일기장도 솔직하게 쓰지 못하겠다고 했다. 누가 볼까 봐 겁이 난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대학 시절 동아리방 선배를 짝사랑할 때였다. 일기장에 자물쇠를 달고 가지고 다녔다. 털어놓지 않으면 마음이 너무 답답했다. 쓰고 나면 조금 후련했다. 그것도 잠시 다시 누가 볼까 봐 두려웠다.

얼마 전 친정 오빠도 내 책을 보더니 비슷한 말을 했다. 왜 이런 상처받은 이야기까지 다 쓰냐고 물었다. 보이스피싱 이야기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감추고 싶은 마음이 있을 텐데 괜찮겠냐고 했다. 나는 잘하고 잘난 이야기를 쓰면 독자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써야 공감이 생긴다고 했다. 누군가 공감했다는 말을 들을 때 글 쓴 보람이 생긴다고 했다. 오빠는 그래도 자기는 구차하게 상처받은 글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삼촌들에게 내 책을 우체국에서 보내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연 계장을 만났다. 나를 보자마자 퇴직 후에 할 일이 있어서 좋겠다고 했다. 자신도 퇴직 후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고민이 많다고 했다. 나는 누구나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지연 계장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용기는 없다고 했다.

그 말이 낯설지 않았다. 미희 계장도 친정 오빠도 지연 계장도 같은 말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재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쓸 때 그것을 치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마음을 굳건히 지켜준 사람이 있었다.


이은대 작가가 말했다. 이은대 작가는 감옥에서 책을 읽으며 울었다고 했다. 더 일찍 책을 읽었다면 이곳까지 오지 않았을 거라며 지난 시간을 후회했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허전할 때 공허할 때 나도 책을 찾았다. 시간이 생기면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 손에 든 책은 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책에 있는 문장을 쓰면서 마음을 달래고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찾았다.

하지만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써 놓은 글을 여러 번 지웠다 다시 썼다. 밤에 쓴 문장을 아침에 다시 읽으면 낯설었다. 이게 정말 그날의 마음이 맞나 의문이 들었다.

감정을 드러내면 누군가 다칠 것 같았다. 이름을 쓰지 않아도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감정을 덮으면 글이 비어 보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사이에서 오래 머물렀다. 어디까지 써야 하고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 길었다.


첫 출간이다. 많이 부족하다. 이 책으로 누구도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그건 욕심이라는 걸 안다. 못 썼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 이런 과거까지 썼냐고 할 수도 있다.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도 이건 작가로서 내가 견뎌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모두를 아우르는 글은 아직 쓸 수 없다.

나는 이미 책을 쓰며 위로를 받았다. 이 책은 나를 위로받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내가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건네기 위해서다.


삼촌은 전화를 걸어 나에게 말했다. “네가 그렇게 고생한 줄 몰랐다.”라고. 그 말에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충분히 살아냈다. 지금의 내가 좋다. 아프고 어려운 시간을 지나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누구나 상처를 안고 산다. 모두가 숨기기만 하면 세상에는 가짜 이야기만 남는다. 누군가 먼저 힘들다고 말해야 다른 누군가도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내 상처를 쓰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첫 출간으로 남아 있는 상처가 사라진 건 아니다. 다만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책에서 받은 만큼 나도 책으로 전하고 싶다. 소재가 없어도 써야 하고, 시간이 없어도 써야 한다.

쓰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도 아니고 특별한 이야기를 쓰는 사람도 아니다. 더 이상 숨지 않기로 한 사람이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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