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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e Jan 24. 2024

디자이너 대우가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디자인, 에세이 #1

얼마 전 네덜란드 디자인에 관한 공부를 하던 중 '네덜란드 디자인 여행'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본문 내용 중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한 둘이 아니었지만 단연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마이클 록'이 네덜란드 디자이너들을 모이게 해놓고 그들을 비평하는 강연을 한 것이었다. 그 비평의 방향은 네덜란드 디자인의 원로 디자이너들이 아닌 당시 2004년 '익스페리멘탈 젯셋'과 같은 동시대 활동을 하는 디자이너들이었다. 내용을 간략히 추려보자면 네덜란드 디자인은 이제 더 이상 세상과 사회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네덜란드는 공공디자인이 훌륭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는 원로 네덜란드 디자이너들이 부단히 디자인 - 세상(디자인 밖의 것)을 참조하려 부단히 노력한 결과이다. 허나 마이클 록은 동시대 네덜란드 디자이너들은 소가 소를 원료로 하는 사료를 먹었을 때 생기는 광우병을 예로 들어 디자인이 디자인 밖의 것과 참조하지 않고 디자인 스스로를 참조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얘기하고 있었다. 이것이 비판의 주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20년 전의 강연 내용이지만 현 한국 디자인을 충분히 담을 수 있어 보인다고 생각이 들었다.


왜 한국에서 디자이너의 대우가 낮은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회적 공헌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디자이너에게 사회적 공헌을 요구하지 않을뿐더러 디자이너 스스로도 사회적 책임을 망각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바라보는 디자이너는 어떤 사람들인가 아무래도 예술적 표현을 업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대중적인 인식일 것이다. 그러나 디자인 개념은 시대마다 변화하여 현대 디자인은 아트적인 역할이 굉장히 축소되고 비주얼 요소들로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오히려 엔지니어링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디자이너들에게 사회의 비주얼 시스템을 제작하는 엔지니어링을 기대하고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디자이너 스스로 자신의 작업이 사회와 관계맺고 있다고 느끼고 책임감을 인지하고 있을까? 이 또한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태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는 한국에 디자인 개념이 수입되어 올 때부터 디자인을 '포장지'로써 들여왔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디자인은 박정희 때에 산업개발계획 중 수출의 한 전략으로써 처음 그 개념을 들여오게 되었다. 생산된 제품을 해외에 팔기 위해 그 포장지를 만들기 위해서 당시 서울대학교에 디자인학과의 시초인 도예 학과 전공이 생겨난 것이다. 한국은 글로벌 디자인 역사와 함께 개념을 발전시켜 온 것이 아닌 애초부터 수출을 목적으로 기업의 제품 판매를 위하여 디자인을 차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급속도로 성장한 한국 사회는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을 챙겨가지 못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싹이 트인 한국 디자인에서 사회적 역할은 발아되지 못한 씨앗이 되어버린 것이다.


두 번째로는 한국 디자이너 스스로 사회적 책임감을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사회적 공헌이란 공공디자인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작업 그 자체가 사회적일 필요는 없지만 그 책임감을 인지하는 것은 중요한 이야기이다. 가령 카페 브랜딩 작업의 일환으로 일회용 테이크아웃잔을 디자인한다고 하자. 결국 버려지고 쓰레기가 되어지는 테이크아웃 잔이기 때문에 디자이너는 과도한 그래픽을 지양함으로써 잉크 사용의 최소화나 친환경 소재 등으로 제작 과정부터 작업이 사회에서 버려지는 순간까지 고려하려 작업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도 디자이너들은 사회적 영향력과 역할을 작은 부분에서부터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디자인 작업물이 사회나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될지 의식하지 않고 그저 놓아 보내어버린다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수한 작업물들이 일상과 사회를 어지럽히게 되는 것이다. 디자이너는 스스로 그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쓰레기를 더 만들고 자원을 더 소모하며 자극적인 것들로 일상의 경관을 해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을 대우해주는 사회는 없다. 


길거리의 간판들이 시각 공해로 느껴진 경험은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는 문제 의식 중 하나이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질문한다면 디자이너의 책임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러나 디자이너들이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피고용자일 뿐이고 그 역할에 충실한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꼬리를 물게 되는데 이는 또 디자이너에게 사회적 역할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한국 디자인은 이러한 위치 속에서 스스로 갇혀버리고 말았다. 앞서 마이클 록이 이야기한 디자인이 세상 밖과 참조하지 않고 계속 스스로를 참조하는 것 즉 광우병이 걸린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디자인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는 이상이 아닌 현대 인류사가 반증하는 사실이다. 디자인은 세상이 변화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디자인 또한 변화하는 세상에 맞추어 그 개념과 역할을 변화해 왔다.


하지만 한국 디자인은 한국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싹이 트진 못한 땅에서 이제 디자이너 스스로 사회적 역할과 공헌이라는 씨앗을 심을 수밖에 없다. 모두가 기대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그 역할을 자처하여야 한다. 사회적 역할을 짊어짐으로써 디자이너 스스로 대우를 높여야 한다.

혹은 돌연 한국 사회가 디자이너에게 사회에 무슨 역할을 하고 잇냐고 물을 때가 올 수도 있다.

산업개발 이후에 변화한 시대에 맞춰서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잇느냐고.

여전히 더욱더 열심히 '포장지'를 만들었습니다라고 답하기 보다는 세상과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고 답하는 때가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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