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 대회를 다니며 다양한 유형의 부모들을 관찰하게 되었다. 단순히 라이드를 해 주고 끼니를 챙겨 주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는 부모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코치형
부모인지 코치인지 헷갈릴 정도로 코치 역할을 하는 부모. 주로 아버지들이 많지만, 가끔 어머니들도 있다. 아이의 게임이 끝나면 기보(notation sheet)를 받아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하고, 함께 분석 및 복기한다. 게임 후에는 아이의 플레이에 대해 논평하기도 한다. 특히 부모의 직업이 교수인 경우, 코치 스타일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다.
선수형
부모 스스로도 체스 플레이어인 경우로, 자녀가 출전하는 대회에는 거의 함께 참가한다. 대부분 자녀보다는 실력이 많이 부족하고, 부모의 레이팅은 시간이 지나도 거의 오르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드물게 부모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 체스 연맹에 등록하지 않은 경우에는, 대회에 같이 출전하지는 않지만 자녀를 기다리면서 하루 종일 온라인으로 체스 게임을 하는 부모도 이 범주에 속한다. 나도 초반에는 종종 공식 경기에 동반 출전했지만, 개인적으로 성적이 잘 오르지 않고 스트레스가 심해, 어느 순간 그만두었다.
타이거맘형
자녀의 경기 하나하나의 승패에 매우 민감하다. 체스가 사실 굉장히 잔인(?)한 스포츠이고, 특히 졌을 때 정신적인 데미지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인데, 본인이 생각할 때 이겼어야 할 상대에게 자녀가 지고 오면 매우 화를 낸다. 가끔 너무 어린 아이가 게임에서 지고 나오자 엄마가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야단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러울 때도 있다.
어떤 부모는 대국 시간을 아이 평가의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아이가 금방 지고 나오면 ‘최선을 다하지 않고 대충 설렁설렁 했구나’라고 생각해 화를 내거나 혼내는 것이다. 질 때 지더라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 많이 생각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졌을 때 빨리 나가면 혼날까 봐 일부러 마지막 수를 두지 않고 시간을 최대한 끌며 천천히 두거나, 게임이 끝난 후에도 대국장을 나가지 않고 부모를 피해 숨어 있기도 한다.
체스에 올인했는데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으면 실망스러운 것이 당연할 부모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체스할 시간에 공부했으면’ 하는 본전 생각이 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가 본인 직장에서의 성과를 희생하며 휴가를 내고, 비행기 타고 호텔을 잡아가며 토너먼트에 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패에 일희일비하는 태도는 아이를 분발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기 쉽다.
헬리콥터형
대국장을 떠나지 않고, 체스 두는 자녀 근처에 머물며 몇 시간이고 게임을 관찰하는 부모들이 있다. 주로 코치형 부모나 타이거맘 유형에서 볼 수 있다. 본인이 체스에 나름 일가견이 있어서 한 수 한 수 진행 상황을 보며 누가 더 유리한지 실시간으로 계산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와 대결하는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게임 내내 테이블 주변을 맴돌기도 한다. 실제로 어린아이들의 경우, 상대 부모가 옆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으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기도 한다. 주로 초등학생 부모들에게서 보이는 행동이지만, 가끔은 꼴사납게 고등학생이나 심지어 대학생 부모의 경우에도 관찰되곤 한다.
스텔스 정찰기형
헬리콥터형의 변형으로, 주로 소심한 부모들에게서 관찰된다. 즉, 대국장에서 자녀의 눈에 띄게 경기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눈에 띄지 않는 거리나 방향에서 경기를 지켜본다. 심지어 대국장 안에서 지켜보지 않고, 밖에서 문틈이나 구멍(?) 사이로 몰래 지켜보는 경우도 있다. 헬리콥터형은 주로 어머니가 많은 반면, 스텔스 정찰기형은 의외로 아버지들도 많다.
보살형
자녀의 시합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유형. 토너먼트 장소에 데려다주고 대기 장소에서 기다리더라도, 게임 결과에 초연하며 자녀가 이기든 지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로 고년차 장수생을 뒷바라지하듯 오랜 시간 체스 부모 역할에 지쳐 마음을 내려놓은 경우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아직 초년차라 그런지, 아들의 게임 하나하나 결과에 일희일비하는 편인데, 보살형 부모는 이미 오랜 마음고생 끝에 열반(?)의 경지에 오른 경우라 하겠다.
뻐꾸기 (탁란)형
아이가 어린데도 토너먼트에 같이 오는 걸 귀찮아해, 주로 주변 사람들에게 라이드와 시합 날 자신의 아이를 좀 돌봐 달라고 부탁한다. 도시락을 싸 주는 것도 귀찮아 돈을 주거나, 심지어 점심으로 육포를 싸 보내기도 한다. 아이들이 혹시라도 다치거나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아이를 돌봐야 하는 입장에서는 본의 아니게 베이비시터 노릇을 해야 한다.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부탁받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고, 계속 부탁하면 얄밉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돌아가며 번갈아 라이드도 하고 아이를 맡자고 말은 하지만, 우리 경우는 적어도 부모 중 한 사람은 대회장에 따라가는 스타일이라 굳이 라이드가 아쉽지 않다. 그래서 탁란형 부모를 몇 번 연속으로 도와준 이후로는 티 안 나게 피해 다니게 되었다.
방치형
시카고의 경우, 13세 미만은 보호자가 체스 토너먼트장에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 즉, 중고등학생은 상관없지만, 초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토너먼트 장소에 자녀만 내려다주고 하루 종일 모습을 보이지 않는 부모도 있다. 적어도 뻐꾸기 탁란형 부모는 혹시 무슨 일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다른 부모에게 아이를 봐 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서 보호자가 있는 셈이지만, 방치형 부모는 라이드만 해주고 사라지기 때문에 다른 부모들도 그 아이 부모의 얼굴을 거의 본 적이 없고, 사실상 하루 종일 아이가 방치된다. 주로 주말에도 쉴 수 없는 소규모 자영업자 부부들이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물론 대부분의 동네 토너먼트에서는 아이들이 자주 만나 친하게 지내는 또래들이 있어서 게임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함께 어울려 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지만, 사실 대회 주최 측에서는 골치 아픈 상황이다. 혹시라도 대회 중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 소재(liability issue)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관찰한 방치형 부모들은 도시락을 챙겨 주는 경우도 드물고, 보통 20달러 정도 현금을 자녀에게 주며 알아서 점심을 사 먹으라는 식이다. 한 번은 대회가 호텔에서 열렸는데, 호텔 내 모든 가게와 자판기가 카드만 받는 방식(cashless)이라 아이가 현금 20달러를 들고도 점심을 굶을 상황이 발생하였다. 결국 내가 대신 신용카드로 결제해 주었다. 이민 1세대로서 주말에도 부부가 함께 일해야 하는 고충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아이를 지나치게 방치한다는 생각에 안타까울 때가 많다.
머슴형
주로 아버지들 사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유형이다. 대회장까지의 라이드와 음식 배달은 기본이고, 자녀의 게임 시작 전에는 자녀 대신 대국 테이블에 미리 와서 체스 보드와 시계를 세팅하고, 필기구 및 기보 용지도 가져다 놓는다. 대국시간 직전까지 자녀가 상대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고 맞춤전략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인데, 나 역시 가끔 아들 대신 보드 세팅을 해주곤 한다. 경기 전 아버지들이 나란히 서서 자식들의 보드를 세팅하는 모습을 보면, 서로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당신도 집에서 노예(?)군요’ 하고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