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이다. 특별히 돈이 많이 들거나 장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신체적 차이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아 나이, 성별,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다. 두뇌 게임인 만큼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이 많은 편이며, 성인 플레이어 중에는 교수, 변호사, 펀드 매니저 등 전문직 종사자가 적지 않다. 학생들도 영재학교나 명문 대학교 출신이 많은 편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연령대는 7살 어린이부터 80대 노인까지 다양하다. 대부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상위층이 많지만, 체스 레슨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나 심지어 노숙자도 있다.
노인과 아이
체스는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이다. 체스 대회에서는 7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선수끼리 맞붙는 경우도 흔하다. 시카고에도 전국 랭킹에서 상위권에 드는 7~8살 꼬마들이 있는가 하면, 80세가 넘은 어르신들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꾸준히 참가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어린이나 노인이라고 봐주거나 적당히 상대해 주는 일은 없으며, 7살 꼬마 여자아이와도 냉정한 승부를 펼쳐야 한다.
부자와 거지
체스는 결코 부자들만의 스포츠가 아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체스 실력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물론 고수에게 비싼 개인 교습을 받으면 도움이 되지만, 체스판 위에서는 오로지 실력만이 승부를 결정한다. 많은 선수들이 경제적 여유가 있지만, 저소득층 출신도 적지 않다. 특히 체스를 직업으로 삼아 돈을 벌기는 쉽지 않다. 그랜드 마스터가 되어 개인 교습을 해도 시간당 100~150달러 정도에 불과하며, 이는 미국에서 집수리공이나 배관공보다 적은 수준이다. 차라리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것이 현실적이다.
심지어 대회 참가자 중에는 노숙자도 있었다. 낡고 냄새 나는 옷차림에, 집 없이 본인의 전 재산이 담긴 커다란 수화물 가방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전형적인 홈리스였다. 하지만 체스 토너먼트에서는 군말없이 받아준다. 미국 특유의 차별 금지 문화 덕분인지, 냄새가 나는 것도 서로 내색하지 않는다. 이분은 평소 오대호 미시간 호숫가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내기 체스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고 한다. 집이 있든 없든, 체스에 대한 열정만 있다면 누구든 환영이다! (안타깝게도 이분은 2025년 초, 유난히 추웠던 시카고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하늘 나라로 가셨다.)
남자와 여자
체스는 전쟁을 모델로 한 게임이다 보니 플레이어 대부분이 남성이다. 체스판에서 여성 비율은 1990년대 내 학창 시절의 과학고나 카이스트의 남녀 비율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아들이 체스를 계속 좋아한다면 대학에 가서도 체스 동아리를 할 텐데, 그러면 캠퍼스 커플이 되기는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인 체스 선수들은 독신이거나, 아니면 아내를 ‘주말 과부’로 만들고 출전하는 경우가 많다. 체스 한 게임에 3~4시간씩 걸리고, 주말 내내 대회에 참가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어떤 선수는 체스 대회에 간다고 하면 아내가 “오늘도 체시카(Chessica, 체스+제시카?) 만나러 가느냐?”라고 농담할 정도다.
사실 체스 커뮤니티에서 남녀 불균형은 심각하다. 여자아이가 체스를 열심히 하는 경우에도 대부분은 아버지가 체스에 관심이 많은데 아들이 없거나 어리기 때문에 딸에게 체스를 가르치면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드물기는 하지만 부부가 함께 대회에 다니는 경우도 있고, 가족 모두가 출전하는 경우도 있다. 부부와 가족 간의 관심사가 일치하는 아주 부러운 사례다.
형제와 남매
형제가 함께 체스 대회에 참가하는 장면은 흔히 볼 수 있다. 어떤 가정은 형제 둘 다 마스터로 성장하기도 하고, 위스콘신의 한 집안은 첫째 아들이 마스터일 뿐 아니라 네 형제자매(2남 2녀) 모두가 체스 선수로 활동하기도 한다.
대체로 형이 먼저 체스를 시작해 두각을 나타내고, 동생은 그런 형을 따라다니며 자연스레 체스를 배우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형이 체스 대회에 나가면 부모들이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와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으므로, 자연스럽게 체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듯하다.
물론 반대로 형은 체스에 전혀 관심이 없고, 동생만 체스를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런 경우에는 형이 굳이 동생의 체스 대회에 따라오는 일은 없으므로, 두 형제를 동시에 보는 일은 없다. 그래서 몇 년간 체스 대회에서 매번 만나는 사이인데도, 형이나 누나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남매의 경우에는 양상이 달라진다. 대개 오빠가 먼저 체스를 시작하고 여동생이 따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초기에는 경험과 나이 차이로 인해 오빠가 실력 우위를 점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여동생이 오빠를 추월하는 일이 발생한다. 어린 시절 여자 아이들이 정신연령이 더 높고 경쟁심이 강한 경우가 많아, 이런 역전 현상은 의외로 흔하다. 흥미로운 점은, 그 시점 이후 오빠가 체스 자체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체스에 흥미를 잃어서라기보다는, “여동생보다 못한다”라는 주변의 인식을 스스로 받아드릴 수 없는 문화가 암묵적으로 어린 남매 사이에서도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누나와 남동생이 함께 체스를 두는 경우에는 특별한 상관이 없다. 누나가 더 잘하든, 남동생이 더 잘하든, 두 사람은 대체로 꾸준히 대회에 동반 출전한다. 이는 ‘누나보다 뛰어난 남동생’ 혹은 반대로 ‘누나보다 못한 남동생’ 모두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남자 형제가 없는 자매가 함께 체스 대회에 출전하는 경우는 아직 본 적이 없다.
혼성팀
체스판의 심각한 남녀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여자 선수들에게 여러 가지 인센티브가 있다. 예를 들어 여자들은 따로 타이틀을 수여받기도 하고, 여학생 전용(Girls Only) 토너먼트를 열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센티브는 대회에서 혼성팀(Mixed Double) 분야인데, 남녀가 짝을 지어 출전하면 두 사람의 성적을 합산해 순위를 매기고 상금을 준다. 여자 선수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남자 선수는 혼성팀으로 같이 출전할 여자 선수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반면, 대부분 여자 선수들은 잘하는 남자 선수들을 골라 혼성팀으로 신청해 비교적 손쉽게 상금을 노릴 수 있다. 아들도 혼성팀에 넣고 싶으면 여자 선수 부모에게 미리 다음 대회 때 같이 하자고 구두로 약속을 받아 놓아야 했다. 그래도 막상 다음 대회 때 만나 보면 이미 더 잘하는 다른 남자 선수와 짝을 지은 경우도 있다. 물론 그랜드 마스터 정도가 되면 여자 선수들이 서로 하자고 한다. 2025년 어느 대회 첫날 호텔 로비에서, 알고 지내던 7살 여자애와 그 아이 엄마를 만났다. 혹시 혼성팀 신청했냐고 아이 엄마에게 물어보니, 이미 일리노이주 최고 그랜드 마스터와 신청했다고 했다. 내가 장난삼아 아이에게 직접 “우리 아들은 어때서? (You don’t want to sign up with my son?)”라고 웃으며 물었더니, 여자아이가 정색하며 “레이팅 2700 넘나요? (Is he 2700?)” 하고 되물었다. 2500을 넘기면 그랜드 마스터가 될 수 있는데, 여자아이가 짝 지은 파트너는 2700이 넘는, 소위 ‘슈퍼’ 그랜드 마스터였다. 7살짜리에게도 체스는 오로지 레이팅이 장땡(?)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