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팅(점수) 지옥

by Han Lee

한국에서 익숙한 태권도나 바둑에는 급수나 단이 있다. 일단 등급을 따내면, 그 뒤로 시합에서 아무리 져도 다시 내려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태권도 1급 선수가 연달아 져도 2급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체스는 조금 다르다. 체스에서는 고정된 급수가 아니라 숫자로 된 레이팅으로 실력을 표시한다. 이 숫자는 경기 결과에 따라 계속 변한다. 쉽게 말해,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점수를 일부 빼앗아 오는 방식이다. 점수가 얼마나 움직이는지는 계산이 다소 복잡하지만, 대략적으로 레이팅이 비슷한 두 사람이 대국하면 10점에서 20점 정도 이동한다. 레이팅 차이가 클 경우 높은 사람이 이기면 당연한 결과이므로 점수 이동이 작다. 즉, 이긴 사람은 많이 오르지 않고 진 사람도 많이 잃지 않는다. 반대로 낮은 사람이 이기면 점수 이동이 크다. 높은 사람은 점수를 많이 빼앗기고, 낮은 사람은 레이팅이 크게 오른다. 비길 경우에도 높은 쪽은 조금 잃고, 낮은 쪽은 그만큼 얻게 된다.

이 시스템의 부작용은 레이팅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과의 경기를 기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높은 사람 입장에서는 이겨도 얻는 게 거의 없지만, 지면 큰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낮은 선수는 잃을 게 없다. 져도 손해가 별로 없고, 혹시 비기거나 이기면 큰 이득을 본다.

이런 이유로 많은 선수들이 자신보다 더 레이팅이 높은 상대가 많은 부문에 출전하려 한다. 이를 ‘플레이업(Play-up)’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대회를 초급·중급·고급으로 나누면, 초급자는 중급부에, 중급자는 고급부에 참가하려는 식이다. 결과적으로 중급부가 사실상 초급부처럼, 고급부가 중급부처럼 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토너먼트는 레이팅에 따라 지원할 수 있는 섹션에 제한을 두거나, 어느 정도 허용하되 추가 요금을 받기도 한다. 다만 플레이업이 현실적으로 별 이득이 안 된다는 견해도 많다. 실제로 자신보다 높은 부문으로 출전한 사람은 대부분 계속 져서 오히려 레이팅이 떨어지기가 쉽고, 자꾸 지다 보면 점수가 내려가 결국 자신처럼 플레이업 했다가 연패한 사람과 붙게 된다. 즉, 등록한 섹션에 상관없이 후반으로 갈수록 원래의 자기 실력과 비슷한 사람과 경기하게 되는 것이다.

체스 레이팅의 또 다른 특징은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라는 점이다. 내 점수가 오르면 상대 점수는 그만큼 내려간다. 그래서 실력이 아무리 늘어도 레이팅은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다. 극단적인 예로, 한 시골 마을에 등록된 체스 플레이어가 단 두 명뿐이라서 둘이서만 계속 토너먼트를 연다고 가정하자. 두 사람이 실력이 비슷해 승률이 50%라면, 둘 다 매일 체스를 공부해 실력이 계속 늘더라도 레이팅은 거의 오르지 않는다. 서로 이기고 지는 과정에서 점수를 주고받기만 하기 때문이다. 둘 다 고수가 되어도 레이팅 상으로는 여전히 초보일 수 있다. 즉, 레이팅은 절대평가가 아니라 ‘자기가 노는 물에서의 상대평가’인 것이다.

실제로 시카고에서 대회를 몇 번 나가보면,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매번 비슷한 사람들이 참가한다. 그중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상대와는 승부가 애초에 뻔하기 때문에 레이팅에 큰 영향을 주기 어렵다. 레이팅을 올리려면 결국 실력이 비슷한 상대를 이겨야 하는데, 스위스 방식 토너먼트를 하면 자연스럽게 실력이 비슷한 사람끼리 매치되므로 같은 사람과 자주 붙게 된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 실력이 늘어도 상대도 비슷하게 늘면 서로 점수를 주고받기만 해서 레이팅을 꾸준히 올리기 어렵다.

또한 체스 레이팅에는 ‘플로어(Floor)’라는 장치가 있다. 이는 레이팅이 일정 수준 이하로 더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최소치다. 보통 중급자 이상이면, 과거 자신의 최고 레이팅에서 200점을 뺀 뒤 백 단위를 버린 값이 플로어가 된다. 예를 들어 최고 레이팅이 2000 이상이었던 선수가 있다면, 그의 플로어는 1800이다. 이 제도는 오랜만에 복귀한 선수가 감각이 돌아오기 전 잠시 연패를 해도 레이팅이 지나치게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장치다.

플로어는 불공정한 꼼수를 막는 역할도 한다. 어떤 선수가 큰 상금이 걸린 대회를 앞두고 일부러 연패를 거듭해 레이팅을 낮춘 뒤, 낮은 섹션에 참가해 상금을 따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레이팅이 플로어로 보장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실력에 비해 높은 레이팅 때문에 대회에 나가면 자신보다 레이팅이 낮은 상대에게 계속 지는 수모를 겪을 수 있다. 다른 선수 입장에서는 ‘레이팅은 높지만 실력은 떨어지는, 점수 따먹기 좋은 로또 복권’ 같은 존재로 보일 수 있다. 참고로 플로어가 적용된 사람은 레이팅 끝자리가 백 단위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누군가 레이팅이 정확히 1800이라면, 과거 2000 이상이었지만 최근에 계속 지면서 1800이 플로어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로 왕년에 잘했으나 이제는 실력이 떨어진 노인 선수에게서 볼 수 있다. 일부 레이팅 올리기에 극성인 선수들은 이런 플로어 선수가 많은 대회를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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