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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세상 Nov 10. 2024

어린 시절의 기억

  나의 평화가 있는 곳--전동길, 전동집


사람의 자아는 기억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돌이켜 보니 내 어릴적 기억은 따뜻하고 행복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사춘기에는 집안에 아름답지 못한 일들이 많았고 그것이 나를 집 밖으로 내몰았지만 나의 가장 밑바닥의 정서는 더 어린시절의 기억들로 만들어졌다. 그 기억 속에 깊게 뿌리 내린 나무처럼 나는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비틀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었다. 대학에서 두번이나 퇴학을 당하고, 구속을 당하기도 했고, 첫딸을 낳고 그 애기에게 먹일 분유가 떨어져가는데 수중에 돈 한푼이 없던 시절에도, 나는 위축되거나 겁이 나거나 내가 선택한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돈이 없어도, 그럴듯한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가 없어도 자존감으로 충만했던, 나의 젊은 시절은 부모님과 동생들, 할머니, 우리집에 드나들던 수많은 사촌들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넘치는 사랑으로 내 기억을 채워준 가족들, 특히 엄마와 동생들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전주 서학동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기억하고 있는 것은 전동에서 살았던 때부터의 일이다. 아마 3-4살 무렵부터 국민학교 3-4학년 때까지 전동에서 살았다.   

중앙동 사거리에서 남문 쪽으로 올라가면서 형성된 전동의 중심 거리는 1층짜리 허름한 목조 건물들이 양쪽으로 상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대체로 앞에는 상점이 뒤쪽으로는 살림집이 붙어 있었다. 우리 집은 그 전동거리 중심에 있었다.


우리 집 맞은편에는 기가 막힌 맛의 소보레 빵과 카스텔라를 만들던 빵집이 있었다. 

특히 갈색의 윗부분은 약간 눌은 듯 가장자리가 바삭하면서도 고소하고, 노란 몸통은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아버리는 듯했다. 카스텔라는 일요일 아침마다 엄마가 내게 베푸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아직까지 나는 그 집 빵 보다 더 맛있는 빵은 없다고 생각한다. 

빵집 옆에는 반짝이는 새 자전거도 팔고 중고 자전거를 사고팔기도 하고 고쳐 주기도 하는 자전거 포가 있었다. 


우리 집 뒤쪽으로는 끼니때마다 참을 수 없이 군침을 흘리게 만드는 냄새를 풍기는 짜장면 집이 있었다. 

그 집의 뜰이 우리 집의 골방 창문으로 내다 보였는데 그 창을 통해 짜짱 냄새가 흘러들었다. 

어쩌다 그 중국집에서 짜장면 소스를 한 냄비씩 사다 뜨거운 쌀밥에 얹어 비벼 먹으면 얼마나 맛나든지...

짜장 얘기를 하다 보니 겨울이면 담갔던 털달린 민물 간장 게장이 생각난다. 고소한 알과 내장이 듬뿍 들어있던 뚜껑에 비벼먹던 밥맛... 털이 달린 집게발을 쪽쪽 빨 때 살과 함께 입안에 들어오던 지독하게 짜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그 맛...할머니가 술지개미를 얻어와 담던 일본식 무 장아찌(나나스께라고 불렀다)도 있었다. 기억에는 없고 들은 이야기이지만 어렸을 때 나는 뜨거운 것을 무서워해서 밥도 입으로 불어 식혀주어야 먹었다고 한다. 지금도 사실 뜨거운 국이나 커피는 잘 못 먹는다. 밥위에 놓아주는 장조림 고기를 실처럼 가늘게 찢어줘야 먹었다고도 하고...입이 짧은 아이로 오랫동안 낙인이 찍혔고 엄마는 아직도 내가 먹는 것이 시원찮다고 하시지만 지금 나는 사실은 아무 거나 잘 먹고 많이 먹는다. 청년기 이후의 가난이 그것만큼은 나를 변화시킨 것 같다.


그 골방에는 주로 쌀가마나 곡식 자루, 자주 쓰지 않는 살림 도구들이 들어 있었는데 작은 나무 책상도 하나 있었다. 

나는 가끔 그 방에 혼자 틀어박혀 동화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 방 창으로 우거진 나무가 보이고 늦여름에는 활짝 핀 장미향이 들어오기도 했다. 넓긴 했지만 작은 화단 밖에 없는 우리 집 뜰에 비해 키 큰 나무와 꽃이 풍성한 뒷집의 뜰은 내 동경의 대상이었다. 


전동 큰길-큰길이라고 해봤자 그때 기준이지 아마 일 차선 도로에 불과했을 것이다-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애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자동차는 거의 없었지만 자전거나 말이 끄는 달구지가 심심치 않게 다니는 번잡한 길이었다. 

보석이나 시계, 안경을 취급하는 상점도 있고 양품점이며 양복점 등 여러 상점들이 번창하던 거리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번화가이었다. 

그 번잡한 길에서 애들은 해가 긴 여름날에는 저녁밥술을 놓은 이후에도 어두워져서 부모님들이 소리쳐 부를 때까지 숨바꼭질도 하고 줄넘기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놀이를 하며 뛰어다녔다. 

나는 어린 시절 놀 때만큼은 몸을 사리지 않았나 보다. 정신없이 놀던 어느 날 나는 자전거와 부딪혀 이마가 크게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 찢어진 자리를 열몇 바늘을 꿰맸는데 그것이 그 이후 내 몸에 기록된 많은 흉터 중 첫 번째 것이다.

이마에 큰 반창고를 붙인 오래된 사진을 찾았다. 옷을 보니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의 사진이다.

전동 성당 안에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유치원(성심유치원)이 있었는데 그 유치원복을 입고 있다. 

유치원에서의 생활은 별로 기억에 남은 게 없다. 그곳에서 주로 배운 율동이나 노래가 내겐 별로 흥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내게 유치원에서 배운 율동이나 노래 좀 해보라고 아무리 부탁해도 나는 "엄마, 나한테 그런 거는 시키지 마. 다른 건 다 해도 그런 건 못해"라고 했다든가. 나는 정말 그런 방면으로는 소질도 없고 숫기도 없었다. 다만 유치원에서 부르던 원가의 후렴구는 기억이 남았다.

"성심 유치원, 성심유치원,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의 꽃동산~"

오히려 동생과 함께 성당 건물 뒤쪽 뜰과 꽃밭에서 풀을 뜯어 소꿉놀이를 한 기억, 유치원 옆 작은 놀이터에서 삐그덕 거리는 그네를 타며 놀던 기억이 더 선명하다.


처음에 살던 전동 집은 가게에 방 둘이 딸리고 작은 부엌과 펌프가 있는 손바닥 만한 마당이 있었다. 

그 집에서 산 지 얼마 후에 그 집 옆 골목으로 깊숙이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뒷집으로 이사를 했다. 원래 살던 집과 새 집은 허름란 판자로 된 담을 사이에 두고 있었을 터인데 담장을 일부 헐고 한 집처럼 드나들 수 있게 문을 하나 달았다. 

옛 집에는 작은 아버지 부부가 들어와 살았다. 새 집은 마당이 넓고 방이 여러 개인 별채가 딸린 큰 집이었다. 

이 집에서 셋째이자 장남인 남동생이 태어났다. 

그 아이가 태어나던 날 새벽, 고대하던 아들 손주를 반기던 할머니의 환호와 박수소리, 겅중거리며 추던 춤사위가 생생하다.

바로 아래 여동생은 나와 세 살 터울인데 그 동생이 어느 집에서 태어났는지는 기억이 없다. 다만 그 아이가 어렸을 때 악몽을 꾸고 방안을 헤매던 일이 전동의 옛날 집에서였다는 기억이 있다. 그러니 아마도 그 집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전동집에서 동생과 나                                                   평상에서 소꿉놀이 중인 동생과 나                    

새 집에서는 너른 마당 끝에 닭장을 짓고 닭을 여러 마리 키웠다. 가끔 달걀을 주으러 닭장에 들어가는 할머니를 따라 들어가기도 했지만 닭들을 무서워해서 가까이 가지 못했다. 한때는 토끼장도 있었는데 토끼들 먹이는 게 쉽지 않아서 그랬는지 오래 키우지는 못했다. 뭘 잘못 먹었는지 토끼가 죽었다고 안타까워했던 할머니가 기억난다.

어른들이 닭을 잡을 때면 옆에서 구경을 했다. 

마당 한쪽에 화덕을 세우고 큰 솥에 물을 끓인다. 목을 비틀어 기절시킨 닭을 끓는 물에 담갔다 건져내 털을 뽑고 배를 가른다. 

그 배 속에 아직 달걀로 성숙하지 못한 노란 달걀노른자들이 투명한 막에 싸여 주렁주렁, 마치 포도송이들처럼 줄줄이 들어 있었다. 

닭을 잡는 광경이 지금도 뇌리에 또렷한 것은 그 포도송이 같은 달걀들 때문인 것 같다. 그 달걀노른자들이 나중에 식구들 국에 몇 개씩 나눠져 들어 있었다. 

먹을 입에 비해 부족한 고기 대신이었다. 


닭장 옆 빈터에는 가을 무렵이면 장작과 불 쏘시개용 나뭇짐이 부려졌다. 아직 연탄이 사용되기 전이었다.

여름이면 마당에 있는 화덕에서 나무를 때 요리를 하기도 했고 겨울에는 방마다 아궁이에 장작을 지폈다. 

어느 가을날 마당에 남은 화덕의 잔불을 꼬챙이로 뒤지며 군밤을 찾던 여동생의 입술에 불티가 날아올라 붙었다. 

먹는 것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은 그 애는 자주 잔불 더미를 쑤셔 군밤을 찾곤 했다. 

나무꾼들이 달구지에 싣고 와 들여놓는 잡목 더미에는 밤송이들이 심심치 않게 끼어 있었던 것이다. 

하필 살이 연한 입술에 불티가 붙어 아래 입술이 커다랗게 부어올랐다. 

동생 옆에서 엄마는 밤새 감자를 숟가락으로 긁어 부치고 뜨뜻해지면 떼어내고 다시 부치기를 반복하셨다. 엄마의 정성 어린 간호 덕에 동생의 입술은 불티가 붙었던 작은 부위가 약간 짙은 색깔로 변색된 것 외에는 별 흉터를 남기지 않고 아물었다. 


대청마루에서 뒤뜰 쪽으로 난 문을 열면 방들의 뒤쪽에 달린 좁은 마루가 길게 뻗어 있었다. 

그 좁은 마루 아래에 방으로 군불을 때는 아궁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대청마루에서 뒤쪽 툇마루로 뛰어다니며 놀았다. 

어느 날인가 뒤쪽 마루에서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가 들려 달려가 보니 동생이 툇마루 밑 아궁이에 거꾸로 박혀 있었다. 

아궁이가 궁금해 마루에 엎드려서 들여다보다가 거꾸로 떨어졌다고 했다. 여름이기에 망정이지 불씨라도 있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그 애는 대청마루 끝 지붕을 받치고 있는 나무기둥을 팔로 안고 빙글빙글 돌다 마루 밑으로 떨어지는 일도 잦았다. 

엄마는 그런 동생을 산만하고 구잡스런 애로 낙인찍었다. 더 나아가 ‘지 언니는 참 침착하고 얌전한데… 둘째는 덜렁거려서…” 수시로 비교 평가해서 어린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그 둘째 딸이 믿었던 큰 딸 보다 훨씬 엄마에게 마음고생 덜 시키고 힘이 되어 주는 딸이 될 것을 그때는 짐작도 못 하셨으리라. 입버릇처럼 언니와 비교하여 평가하는 엄마 덕에 둘째가 자신의 인생을 더 적극적으로 열심히 살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할까.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3학년 때 중앙국민학교는 입학생은 너무 많고 교실이 부족해 2부제 수업을 했다. 

오후반이었던 어느 날 할머니가 담가 놓은 포도주를 거르셨다. 

설탕을 많이 넣어 아주 달콤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 옆에서 포도알을 주워 먹다 급기야 얼굴이 빨개지고 열이 나고 어지러워 학교에 가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나의 6년 개근상은 이렇게 해서 날아갔다.

어느 날에는 막걸리에 설탕을 타고 따뜻하게 데운 것을 찔끔찔끔 떠먹다가 마루에 대자로 들어 누었던 날도 있었다. 

할머니는 그저 맛나다고 내게 그런 것을 권하셨는데 어른이 된 뒤에야 내겐 알코올을 분해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찌감치 술을 접한 탓인지(?) 20-30 대에는 소화도 못 시키면서 상당히 많은 술을 마셨다. 물론 시대가 술을 부르기도 했고.

엄마와 나                                                       내게 유일하게 남은 하머니 사진

    

할머니는 시장에 갈 때면 자주 나를 데리고 가셨다. 집에서 풍남문 쪽으로 난 길을 쭉 가다 보면 남문시장이 있다. 

시장에서 천변 길로 여러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개구리 꼬치구이를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할머니가 가끔 개구리 뒷다리 구이를 사주셨다. 꼬챙이에 4-5개의 개구리 다리를 꿰어 구운 꼬치구이는 겉이 갈색으로 노릿노릿하게 구워져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할머니는 전주 천 변 자갈밭에서 국극이 올려지는 날이면 나를 데리고 그 자발 밭에 앉아 국극 공연을 보았다. 그 시절 본 국극은 환상적이었다. 

큰 천막을 치고 올린 무대 위에 나온 배우들의 화려한 분장과 의상들, 무엇 보다 심금을 울리는 자명고-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막간에는 여러 만병통치약을 파는 행사가 있었다. 무료입장 (혹은 아주 저렴한 입장료-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대신 약을 팔았던 모양이다. 

국극 공연을 언제부터 보지 못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우리 집이 중앙동으로 이사하고 내가 국민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랫동안 나는 국극단이 다시 오기를 기다렸다.


늦가을 무렵 전주 천 변에서는 빨래방이 열렸다. 

하얀 광목으로 된 이불 홑청들을 커다란 가마솥에 넣고 잿물과 함께 삶았다. 

전주 천 변, 위아래 여러 곳에 걸린 대형 가마솥에서는 하얀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키 큰 나무주걱으로 빨래를 뒤집는 사람들, 빨래가 다 삶아지기를 기다리며 수다 떠는 여인네들, 엄마나 할머니를 따라온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떠드는 소리, 다 삶은  빨래를 전주 천 물에 깨끗이 빨아 하얗게 눈부신 빨래를 천 변에 쳐진 줄에 넣어 물기를 빼는 아낙들...

시끌벅적하고 생기가 가득했던 전주 천의 기억이 생생하다. 

왜 그때의 기억이 늦가을이라고 생각되는지 모르겠다. 추웠던 기억 탓일까. 가마솥에서 오르는 하얀 김, 장대 사이로 매어 놓은 줄 위에 펼쳐져 있던 하얀 이불 홑청들이 바람에 날리며 사그락 거리던 소리…그 풍경이 늦가을이나 겨울을 연상시키는 것일까.


그 시절 꿈같은 기억 하나는, 여름밤 대청마루에서 듣던 라디오이다. 

저녁 상을 치운 자리에 할머니와 엄마. 가끔은 이모할머니나 할머니의 친구분이 전등불 아래 나물을 다듬거나 빨래를 개며 라디오를 들었다. 

동생들은 방에서 자는데 나는 어른들 옆에 베 이불을 덮고 누웠다. 

어른들이 주고받는 얘기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라디오를 켜면 라디오를 듣다 잠이 들었다.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전설 따라 삼천리’이다. 전설 따라 삼천리는 당시 우리 집 여인네들의 최애 프로였다. 성우들의 목소리 연기는 얼마나 실감 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지 여름밤의 더위를 식혀주는데 그 보다 더 나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비라도 내리는 밤이면 할머니나 엄마의 무릎 사이를 파고들며 가슴 조이고 들었다. 


그 서늘하고 따뜻했던 밤들, 일찌감치 홰에 오른 닭들이 가끔씩 날개를 푸석거리는 소리, 어른들이 낮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얘기 소리, 가끔씩 새어 나오는 조심스러운 웃음소리, 마당에서 투닥거리는 모깃불 타는 소리. 꿈속처럼 멀어져 가는 라디오 소리와 함께 잠들었던 시간들. 나의 평화로웠던 시간들이 그 집의 기억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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