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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움을 위한 또 하나의 기억

전주 신리 여행

by 다정한 세상


동네 길을 여기저기 걷다 보면 늦가을, 초겨울에 나무 벽난로를 때는 집에서 피어나는 장작 타는 냄새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곤 한다.

뒤 뜰로 통하는 유리문을 열고 나무들이 내뿜는 향내를 들이마신다. 아직 끈질기게 생기를 유지하고 있는 약간의 들꽃 향과 전나무에서 뿜어내는 싱그러운 냄새 사이에 낙엽들이 썩으며 내는 거름 냄새도 섞여 있다.

거름 냄새조차도 나는 좋아했다.


고등학교를 서울로 진학해서 첫 해는 한 방에 네 명이 함께 사는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학교와 가까운 정동 골목에 성공회 성당 수녀들이 운영하는 기숙사에 운 좋게 당첨되었다. 바로 옆에 유서 깊은 성공회 성당이 있고 그 성당의 정원은 봄, 여름, 가을 변하는 계절의 정취를 마음껏 느끼게 해 주었다. 주말이면 예배당에서 미사를 드려야 했다. 수녀님들이 방마다 돌아다니며 우리를 모두 성당으로 내몰고 기숙사 건물 현관문을 잠갔다. 나는 곧잘 미사를 빼먹고 성당 정원의 장미 나무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직까지 연락을 하고 지내는 몇 안 되는 고교시절의 친구 중 하나인 영옥이 이때 같은 방을 쓰던 룸메이트였다. 엄마가 한 달에 한 번씩 장조림이며 소고기 고추장 볶음 같은 밑반찬을 싸들고 나를 찾아오셨다. 기숙사 밥은 언제나 우리를 허기지게 했다. 정서적인 이유가 더 컸겠지만 한창 성장기의 여고생들에게 기름기가 많이 부족한 식단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기숙사 친구들은 엄마가 가져온 반찬을 일주일이면 다 해치우고 다음 달을 기다렸다.

성공회 성당 정원.jpg 정동성당 정원


가끔씩 서울과 전주를 오가는 고속버스 여행은 설레고 낯선 경험이었다. 전주 집에 오르내리는 길마다 고속버스 창을 통해 보던 풍경과 열어놓은 창을 통해 들어오던 냄새들을 사랑했다. 봄이면 갈아엎은 밭에서 풍기던 흙과 거름 냄새, 저녁을 짓느라 아궁이에서 타는 장작 냄새, 검푸른 나무들, 나지막한 슬래브 지붕들 사이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 추수를 마친 휑한 벌판 가운데 옹기종기 모인 집들과 눈부시게 파란 하늘에 매달린 빨간 감 송이들. 서리가 하얗게 덮인 들판 주위로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이 거무죽죽한 가지들을 서로 의지하며 옹기종기 서 있는 풍경도 나는 사랑했다.

초등학교 6학년쯤이었을까.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장래 직업에 대해 글짓기를 시키셨다. 담임 선생님이 내 글을 친구들 앞에서 읽게 하셨다. 글을 잘 써서 라기보다 내가 희망한 직업이 좀 신기했던 것 같다. 다들 나름대로 의사 라든 지 선생님 이라든 지 판. 검사 라든 지 장군 이라든 지… 뭔가 그럴듯한 직업에 대해 말하는데 나는 시골에 가서 자연을 가꾸며 살고 싶다고 했으니… 어린애가 성인이 되어 무언가를 추구하며 치열한 삶을 시작도 하기 전에 은퇴한 자의 안온한 혹은 게으른 삶을 꿈꾸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이미 나는 경쟁심이나 욕망 같은 것에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자족적이고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는 삶을 꿈꾸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평화에 대한 갈망이 현실로부터의 도피 수단이었던 것도 안다. 철들면서 알게 된 아버지의 부정행위와 어머니와의 불화, 몇 달씩 지속되던 부부의 냉전, 자식들 때문에 이 치욕적인 삶을 살고 있으니 네가 엄마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눈물 섞인 호소. 장녀로서 공부 잘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해 엄마에게 보답해야 하는 무거운 짐. 한편으로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시끄러운 집안.

나만의 공간이 절실했던 내게 그 평화를 제공해 준 것은 신리 저수지와 덕진 공원, 시립 도서관과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친구들이었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세속적인 일들에 아웅다웅거리지 않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나만의 세상을 사는 것을 미덕이라 여겼던 생각이 산산이 부서지고 치열한 투쟁의 삶을 선택한 것은 대학에 입학한 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현실 속에서 짓눌리고 고통받으며 살고 있는지를 깨달은 뒤였다. 그러나 인생의 ‘대전환’ 이후에도 나의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복잡한 인간사회로부터의 ‘은퇴’나 ‘칩거’를 향한 욕구가 고개를 들곤 했다. 그 욕구가 단지 현실도피를 위한 것인지 나의 본성인지 지금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다만 성인이 된 후에도 나는 내내 그 욕구와 갈등하고 화해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특히 트럼프가 재집권하고 세계를 혼돈과 반윤리적 플랜으로 뒤흔들고 있는 요즈음, 반헌법적 계엄과 내란을 옹호하는 파시스트 세력이 눈에 띄게 공격력을 키우고 있는 한국 사회의 요즘뉴스를 보는 것은 이제 은퇴해서 평화로운 삶을 즐기고자 했던 나의 일상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나 회피할 수가 없다. 현실을 회피해서 얻을 수 있는 평화는 가짜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평화를 주는 기억들은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을 객관화하며 현실을 인내하고 희망을 갖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전주 근처에 신리라는 곳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 중학교에 다니던 사춘기에 걸쳐 나는 주말이면 가끔 친구들과 어울려 서쪽으로 서쪽으로 신리를 향해 걸었다. 그곳에 특별히 끌리는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잘 닦여진 찻길을 따라 가끔 기찻길도 만나고 옆에 펼쳐진 논. 밭도 보며 몇 시간씩 그냥 걷는 게 좋았다. 늦여름, 초가을 가로수 그늘 밑을 걷기도 하고 뜨거운 햇볕에 까맣게 타기도 하면서 걸었다. 그 길 끝에 저수지가 나오면 우리는 할 일 없이 주변에서 조약돌을 주워 던지기도 하고 여기저기 들꽃들을 들여다보다가 발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걸었다.

등 뒤로 해가 넘어가며 하늘이 붉게 노을에 물들다가 조금씩 붉은색을 잃는다. 머리 위에 희미한 달이 나타나고 하늘이 점점 짙은 코발트 색으로 변하면 여기저기 길가 집들에 불이 켜지고 점점 많은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처마 밑 창호지 창문을 통해 낮은 와트의 불빛들이 노랗게 새어 나오면 우리 중에 노래 잘하는 재이가 낮지만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애는 음악시간에 배우는 노래 밖에 모르는 내게 처음으로 팝송 이라든 지, 윤형주와 송창식이 부른 노래들을 알려준 아이다. 짙은 파란색으로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에 하얀 달이 우리를 따라 흐르는 듯했다. 그러다 환한 전주 시내의 불빛이 가까워지면 하늘의 별들이 하나씩 빛을 잃고 희미하게 사라지고 우리도 각자 자기 집 방향으로 하나씩 사라졌다. 그 평화로움을 가슴에 가득 안고 나는 현실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친구들이 대부분 전주여고에 진학했지만 나는 우리 엄마의 불타는 교육열 덕분에 서울로 진학했다. 그 후 우리는 그전처럼 다시 모이지 못했다. 고등학교 합격증을 받아놓고 입학을 기다리던 그해 2월 어느 날 순옥이의 집에서 함께 뒹굴며 지낸 밤이 우리가 모인 마지막 날이었다.

그 이후 가끔 전주에 가면서도 나는 그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크게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전화가 흔하지 않았기도 했고 전화를 해서 만날 약속을 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가 아니었다. 전화가 있는 집 아이도 친구들과 전화를 주고받는 문화가 아니었다. 그저 학교에서 만나면 대개 누군가 어딘가로 발길을 잡으면 거기에 따라붙곤 했다. 때론 학교 운동장 나무 그늘에 앉아 놀다 배가 고프면 누군가의 집에 가서 해결하기도 하고 그랬다. 약속도 계획도 크게 없이 자유롭게 마음이 가는 대로 우연이 이끄는 대로 그렇게 우리는 만나고 헤어졌다. 나는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때는. 그저 무위의 삶을 즐기고 있었나 보다, 그때도.

방학 때 내려간 전주에서 한 번 길에서 우연히 재이를 만났었다. 우리는 반가워했지만 어색해하기도 했다. 아마도 내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수다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친구들이 떠는 수다를 나는 한없이 들어주고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고 혼자 마음속 한 구석에 치웠다 버리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내게 온갖 얘기를 다 했다. 다른 친구의 뒷담화도 내게는 마음 놓고 했다. 소문이 나거나 와전될 염려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대화를 함께 풀어갈 친구들이 없고 내가 말이 별로 없으니 재이는 어색했을 것이다. 다른 친구들이 함께였다면 그 어색함이 좀 덜어졌을 텐데… 떨어져 있었던 시간들, 새로운 삶을 공유하기에는 만남이 너무 짧고 기약이 없었다.


전주로의 나의 여행은 1년 만에 끝났다. 가족 모두가 서울로 이주하면서 그곳에 가야 할 충분한 명분이 없어졌던 탓이다. 그렇게 나의 신리 여행과 친구들은 과거의 기억이 되었다. 어스름한 초저녁 분홍과 파랑이 섞인 파스텔색 하늘, 검은 하늘에 빛나던 별빛과 창문으로 비치던 따뜻한 전등 빛, 가끔씩 보이던 반딧불이들, 그리고 재이의 낮은 노랫소리와 친구들의 얘기 소리, 푸르고 싱그러웠던 늦여름 밤의 바람 냄새로 남았다.


뒤 뜰에서 들어오는 나무와 거름 냄새, 바람소리가 아무 계획도 필요하지 않았고 아무 욕심도 없었고 아무것에도 매일 필요가 없었던, 그저 내 밖의 풍경과 소리와 냄새에 마음을 쏟았던, 친구들의 얘기에 그냥 귀 기울이는 것으로 충분했던 내 인생 초년의 기억을 불러왔다.

그 기억 속에서 지금의 나를 만났다. 애증으로 몸살을 앓았던 조국을 떠났고 아이들이 모두 독립한 지금 나는 인생에 별 계획이 없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고 여전히 내 얘기를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얘기에 귀 기울이는 것에 익숙하고 밤에 창문을 닫을 때면 훅하고 풍겨오는 짙은 나무들 냄새에 오래전 기억으로 마음이 흐른다. 나의 평화는 항상 그 기억들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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