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주원, 김헌창, 통일신라의 시작과 끝
강릉의 원도심 명주동 골목을 걷다 보면, 발끝에 차이는 돌멩이 하나조차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흔히 강릉을 두고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온다”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천 년 세월을 건너 발효된 깊은 역사의 층위가 놓여 있다. 그 중심에는 ‘왕이 될 뻔한 사나이’, 그러나 끝내 강릉의 영원한 군왕으로 남은 명주군왕 김주원이 있다.
김주원의 가계는 통일신라의 문을 연 태종무열왕 김춘추 계열로 이어진다. 김춘추는 신라 정치사의 대전환을 이끈 인물이었다. 그는 김유신과 손을 잡고 강력한 정치·군사적 연합을 형성했으며, 마침내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당과의 연합을 바탕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며 통일신라의 시대를 열었다. 외세를 끌어들인 대가와 한계를 둘러싼 비판이 뒤따르지만, 삼국 통합의 방향을 현실 정치로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그의 선택은 한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 무열왕계 가문은 훗날 김주원이 강릉으로 오기 훨씬 전부터 이미 이 땅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바로 무월랑과 연화의 사랑이다. 강릉에 부임한 경주 귀족 무월랑은 이곳 여인 연화와 사랑에 빠졌고, 헤어진 뒤에는 잉어가 편지를 전했다는 애틋한 전설이 남았다. 김주원은 이 무월랑과 연화의 아들이다. 오늘날 강릉의 월화거리는 바로 이 두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지역 설화로 기억된다.
또 다른 전승은 순정공과 수로부인의 이야기다. 강릉 태수로 부임하던 길에 수로부인이 절벽 위 꽃을 보고 감탄하자 한 노인이 꽃을 꺾어 바쳤다는 「헌화가」, 이어 바다의 존재에게 붙들려 간 부인을 백성들의 노래로 되찾았다는 「해가」의 이야기는 강릉이 이미 신라 귀족 문화와 깊게 얽혀 있던 공간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강릉이 단순한 변방이 아니라, 경주와 동해를 잇는 문화적 접점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렇게 대를 이어 쌓인 인연은 마침내 김주원에게 가장 결정적인 순간, 하나의 운명적 퇴로가 되었다. 785년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귀족 사회에서 김주원은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삼국사기》는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 왕경으로 들어오려 했으나 큰비로 강을 건너지 못했고, 그 사이 김경신이 먼저 궁궐에 들어가 즉위했다고 적고 있다. 후대에는 이 이야기를 두고 단순한 천재지변이 아니라 정치적 승패를 정당화한 서술로 보기도 하지만, 어쨌든 승자는 원성왕 김경신이었다. 패자가 된 김주원은 중앙을 떠나 명주로 물러났고, 이후 명주군왕으로 불리게 된다.
그의 강릉행은 단순한 유배나 좌절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이곳에는 이미 가문의 기반과 기억이 있었고, 김주원은 그 토대 위에서 명주를 사실상 독자적 세력권으로 키워 갔다. 후대 기록에는 그가 명주와 삼척, 울진 일대를 식읍으로 받았다는 내용도 전한다. 중앙의 왕위는 놓쳤지만, 동해안에서는 오히려 하나의 자치적 권위로 살아남은 셈이다. 강릉이 통일신라 문화의 중요한 거점으로 남게 된 배경에는 바로 이 명주군왕 세력의 존재가 놓여 있다.
그러나 무열왕계의 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822년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일을 명분으로 내세웠고,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하며 새로운 질서를 꿈꾸었다. 이 반란은 단순한 지방 소요가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9주 5소경 가운데 4주 3소경이 호응할 정도로 파장이 컸다. 하지만 반란은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진압되면서 무열왕계는 중앙 정치무대에서 사실상 퇴장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좌절이 강릉 김씨를 지역의 뿌리 깊은 세력으로 만들었다. 경주의 중앙 귀족이던 집안은 명주의 호족으로 자리 잡았고, 이 기반은 훗날 고려 건국 과정에서 다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니 김주원의 강릉행은 단순한 패배의 종착지가 아니라, 한 가문이 중앙의 꿈을 접고 지역의 역사로 다시 태어나는 출발점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자녀와 함께 강릉을 여행한다면, 이 이야기를 꼭 들려주면 좋겠다. “비 때문에 왕이 되지 못한 사나이”라는 한마디로 시작해도 좋고, “왕이 될 뻔했지만 결국 강릉의 왕이 된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의 이야기는 할아버지 김춘추에 대해, 김유신의 여동생과의 결혼에 대해, 귀족세력의 세를 누르기 위해 독서삼품과를 실시했던 원성왕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명주동의 골목과 강릉의 유물들은 더 이상 오래된 돌조각이 아니라, 천 년 전 경주의 꿈이 동해의 물결과 만나 다른 형태로 살아남은 흔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릉은 단순히 경치를 보는 도시가 아니다. 이곳은 패배한 왕권의 기억이 지역의 문화로 다시 피어난 곳이고, 우리 아이들에게는 무조건 외워야했던 9주5소경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소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