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 , 이방인
이 작품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라는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충격은 독자에게 작중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서술하는 화자인 뫼르소를 이방인으로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효과로서 작동한다. 어머니의 기일을 무감각하게 회상하는 불가해한 이 뫼르소라는 인물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1부에서는 뫼르소라는 인물을 독자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뫼르소를 둘러싼 서민의 세계가 묘사된다. 뫼르소는 윤리의 문제를 벗어나서 그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사람이다. 애인에게 욕정을 갖지만, 애정이 없기에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이 슬프지 않기에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서, 독자는 점차 뫼르소라는 인물에 적응해 가기 시작한다. 이 무감각한 인물이 가지고 있는 정직성에 놀라면서 동질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자신의 내면에도 뫼르소와 같이 윤리적인 규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불가해한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독자 스스로가 알고 있기에 뫼르소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동시에, 그러한 자신의 자아의 비윤리성이 드러나면은 세상으로부터 재판받을 수 있음을 알기에 두려움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동질감이 뫼르소를 이해 가능한 타자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뫼르소에게는 여전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간적인 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않고, 다음날 애인을 만나 정사를 벌이는 뫼르소는 독자에게 이방인이다. 여기에서 이방인이라는 의미는 나와 달라도 다름을 받아들이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타자로서의 의미가 아니다. 이방인이란 세상 속에서 절연되어서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부조리한 인간을 의미한다. 점차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서 뫼르소를 바라보는 독자와 작중 인물들 사이에서는 미묘한 관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화자인 뫼르소의 서술을 통해서 뫼르소의 내적 감정을 알고 있는 독자에게 뫼르소는 여전히 어딘가 거리를 두고 지켜봐야 할 듯한 불가해한 이방인이다. 반면, 작중 인물들은 뫼르소를 스스로 이해 가능한 모습으로 바꾸어 받아들이려 한다. 그들은 뫼르소에게 독자가 느끼는 미묘한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그 거리감을 어떻게든 무마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뫼르소를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바꾼다. 이러한 모습은 등장인물들이 뫼르소를 바라보면서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당신은 겉모습은 그러하지만, 속 모습은 ~~ 한 사람이군요. ”라는 말들로 뫼르소에게 언제나 전달된다. 뫼르소는 그들에게 이방인으로의 뫼르소 그 자체가 아니다. 그들은 뫼르소를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모습으로 마주한다. 그 모습은 언제나 그들의 순진한 이해와 필요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드러난다. 그들은 언제나 스스로의 자아를 연장하여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방식으로 뫼르소를 이해하는 것이다. 작가는 1부의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가 뫼르소를 바라보는 방식과 작중 인물들이 뫼르소를 바라보는 방식 간의 분명하고도 현명한 관점의 차이를 만들어둔다. 그리고 2부의 시작을 여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1부의 마지막 장에서, 뫼르소는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그는 정오의 바닷가에서, 태양이 가득 쏟아지는 순간에 눈이 부셔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이제 이야기의 배경은 뫼르소를 둘러싼 서민의 세계에서 진실을 다투는 재판의 세계로 옮겨진다.
2부에서, 뫼르소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으로 재판을 받는다. 하지만 점차 재판의 쟁점은 뫼르소가 저지른 살인이 아니라, 뫼르소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윤리성의 문제로 옮겨간다. 이 재판은 본질적인 쟁점에서 벗어난다. 검사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이를 잘 나타낸다. <“본인은 범죄자의 마음으로 자기 어머니를 땅에 묻었다는 이유로 이 사람의 유죄를 주장합니다.”> 뫼르소는 살인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식날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사형이 선고되기 전까지, 재판의 과정에서 뫼르소라는 사람을 둘러싼 진실 공방이 시작된다. 이는 1부에서 그랬듯이. 뫼르소를 이해하려는 작중 등장인물들의 어리석은 행동의 연장선이다. 뫼르소 측 증인들은 뫼르소가 겉보기와는 달리 속이 깊고 따듯한 사람이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검사 측 증인들은 뫼르소의 행동에서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다고,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는 그의 행동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그는 파렴치한 범죄자라고 증언한다. 두 가지 증언 모두 진실에서 어긋난다. 전자의 경우, 뫼르소라는 인물을 이상적인 한 인간의 모습으로 바꾼다. 후자의 경우는 반대로 뫼르소를 파렴치한 악마로 바꿔버린다. 하지만 독자가 이미 알고 있듯이 뫼르소는 선과 악의 윤리적인 잣대를 벗어난 그저 무감각한 인물이다. 재판의 과정상에서 뫼르소는 철저하게 소외된다. 뫼르소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애인인 마리조차도 뫼르소의 본모습을 모른다.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재판이지만, 재판의 쟁점에서도 벗어난 재판장 속 인물들의 무용한 헛짓거리에 뫼르소는 서서히 지치고 분노해 간다. 결론적으로, 재판부는 뫼르소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사형을 선고받은 뫼르소는 상고를 포기한다. 그리고, 감방 속에서 사형의 집행을 기다린다. 그리고 뫼르소가 무용하다고 느껴서 앞서서 몇 번 거절한 신부가 뫼르소를 방문한다. 뫼르소는 이 신부와의 대화에서 재판 중에 쌓여있던 분노를 터트린다. 신부는 뫼르소를 향해서 <“나는 당신 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마음의 눈이 멀어서 그것을 모르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뫼르소는 모두 스스로에 대해 진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구는 이 세상 속 사람들에 질려서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그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군, 안 그래?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죄다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 만도 못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셈이지.”> 아무도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이 교만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해서 쌓여왔던 분노를 터트린다. 이 분노가 뫼르소를 깨달음으로 이끈다. 그리고 뫼르소는 변화한다. 깨달음과 변화를 통해서 죽음을 목전에 앞둔 뫼르소는 드디어 세계와 화해하게 된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비워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산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뫼르소는 처음으로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한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가 세상에 그렇게나 무관심했듯. 세상 역시 본인에게 그렇게나 무관심하다는 진실을 마주한다. 이 세계는 뫼르소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무관심하여서 개개인 모두가 세상 속 이방인이라는 부조리 해서 뼈아픈 진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의 세상은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진실을 깨달은 뫼르소를 바라보는 독자는 더 이상 뫼르소를 이방인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뫼르소가 세상과 화해하는 순간, 독자 역시 뫼르소와 화해한다. 세상과 화해하려는 뫼르소를 이제는 이해 가능한 타자로 바라보게 된다. 반대로 뫼르소를 제멋대로 순진한 시선으로 이해 가능한 타자로 규정해 온 세상은 뫼르소가 불가해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이 아이러니한 전환이 바로 이 작품의 클라이막스이다. 이 작품은 이 클라이막스를 향해서 서사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왔다. 쌓아 올려진 서사와 응축된 분노를 통해서 뫼르소와 함께 비통하고 부조리한 세상의 진실에 독자들은 도달한다. 그리고 이 아이러니한 전환을 통해서 독자들은 뫼르소처럼, 개개인 모두가 세상에 온전하게 이해받지 못하는 이방인임을 처절하게 깨달을 때, 서로를 향한 동질감을 통해서 이방인이 아니게 되고, 그 순간이 세상을 향해서 화해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순간이라는 교훈을 깨닫는다. 독자와 뫼르소의 관계가 그렇게 변했듯이 말이다. 진실을 깨닫고 세상과 화해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뫼르소는 이제 사형을 집행받을 것이다. 부조리한 세상은 뫼르소가 깨달은 진실을 은폐해 버린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철저하게 비극이다. 이 비극은 독자에게 통렬하고도 아픈 인간사회의 부조리의 인식을 강렬하게 심어준다.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이러한 부조리의 인식은 거부감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왜 이 작품은 이리도 극명해서 꺼림칙한 부조리를 다루는가. 필자는 이 작품이 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와중 출판된 작품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지금까지 믿어왔던 인간성이란 단어가 전쟁의 참혹한 참상 앞에서 무용해지던 그 시대상에서, 인간은 어떠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가. 무수히 많은 생명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죽어가는 세상 속에서 다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희망의 발걸음은 순전한 이상으로 도약하는 것이 아니다. 순전한 이상은 이미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희망은 역설적으로 부조리하여서 불가해한 이방인 그 자체로의 인간을 직시하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읽어내기에는 너무나도 비극적이면서도 꺼림칙하여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부조리함을 이방인이라는 단어로 다루는 것이다. 이제 뫼르소의 죽음 이후에, 부조리한 작품 속 이야기를 외부에서 초대받아 지켜본 독자만이 홀로 남게 된다.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듯, 이 작품은 독자에게 강렬한 고통을 안겨주는 비극이다. 하지만, 니체가 언제나 말했듯, 비극은 비극을 바라보는 인간의 고통을 통해서 인간의 존재를 각성시킨다. 그리고 인간은 그 각성을 통해서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이 작품을 마주한 독자는 통렬한 비극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조그마한 희망을 품어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설령 우리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서로에게 불가해한 이방인일지라도 우리가 그 진실을 끝까지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서로의 존재를 마주하기 위한 화해의 첫 발걸음을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