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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히려 더 좋다 Mar 08. 2023

헐, 이것은 무슨 상황!!

코로나 시국의 해외이주.

온 세상이 난리가 났다.


2020년 초, 말도 안 되는 코로나 사태의 시작으로 온 세상이 경직을 넘어, 나라마다 사람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완전 패닉상태였다. 나라마다 일반적인 출입국을 금지하고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입출국이 허락되지 않았다.


국가 간의 이동이 최악인 상황에서 독일기업에 취업이 되어 독일로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최악의 코로나 사태에서 외국으로 가는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인지 심각한 고민을 했다. 외국생활이 처음이 아니고 유학생활을 합치면 근 십여 년의 외국생활 경험이 있으니, 다시 외국생활을 시작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비교적 덜했다.


오히려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아주 좋겠다 싶었다. 심사숙고라는 과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비교적 기쁜 마음으로 결정한 편이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이 시기의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코로나 사태였다. 초기의 코로나 상황은 코로나에 감염되면 죽는다는 혹은 죽을지도 모른다고(이때는 정말 그랬다) 생각할 정도로 매우 심각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심했다. 불행하게도, 숫자상으로는 우리나라 감염자의 절대적 수치가 제일 높았다. 검사 모수 대비 감염자 수는 그리 높지 않았으나 절대적인 수치로만 보면 우리나라가 감염의 온상으로 보이기 충분했다.


감염자의 절대적 수치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코로나가 우리의 주변에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음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 옆동에도 환자가 발생했었다. 비밀리에(?) 출동한 방역팀에 의하여 환자와 가족구성원이 신속하게 격리되었고(되었다는 소리를 들었고) 공동생활 구역이 신속하게 소독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신속, 신속이었다.

빨리빨리 민족의 저력을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신속한 처리를 목격하면서 불안감이 그나마 약간의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이제 우리도 다 죽었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지나친 과잉 반응 같아 보이지만 그때는 정말 그랬다. 개인정보 보호법이 적용되어 감염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아무리 비밀이라고 해도 주민 간의 입소문으로 해당 동과 위치는 자연스럽게 노출되었다. 방송으로 실시간 중계되는 상황은 모두의 경계심을 고취하기도 했지만, 더불어 불안감을 급격히 자극하는 역작용을 했다.


감염자의 생활 범위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더욱 두려웠다.


이제 우리도.. 큰 일 났다.

어쩌지..


사태가 심각했다.


엘리베이터 탈 때는 사람들이 이미 탑승한 칸을 피하고 가급적 빈칸을 이용하려 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탑승했을 때는 극이 같은 자석이 서로를 밀쳐내는 것 마냥  자동적으로 멀리 떨어져 서려고 했다.


얼굴을 서로 피하려는 (피해 주려는) 것 또한 최소한의 예의였고  암묵적 동의였다. 불편한 시선의 방향을 달리하며 보내는 몇 분간의 침묵이 참으로 길게 느껴지던 때였다.  


이 느낌은 사람들 간 감정의 거리를 멀게 만드는 불행과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난의 상징이자 시작이었다.   


출국준비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출국서류의 준비는 쉬웠으나 독일 영사관의 약속을 잡는 것부터 고난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출국하는 비행기편도 거의 없었고 코로나 사태 이전의 무비자 입국조건도 실질적 효과가 없어졌다. 우선, 비자를 받아야 하고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출국을 할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비자로 일단 출국하고 독일에 입국해서 현지 독일 경찰청의 입국심사를 받는 방법도 있었다. 불확실한 상황에 운을 맡길 정도로 큰 강심장의 소유자가 아니기에 이 방법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비자를 받아 확실한 상태에서 출국하기로 했다.


비자를 받기 위한 서류는 절차에 따라 준비하면 어려울 것이 없었다. 문제는 독일 영사관에 서류제출 약속시간을 잡는 것이었는데 시간 잡는 것이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오픈된 타임슬럿 자체가 아주 적기도 했거니와 영사관 홈페이지를(정확하게는 약속시간 잡는 페이지) 닫아놓고 있었다.


언제 열릴지도 모르니, 약속시간 잡는 사이트가 오픈됐는지 수시로 체크해야 하는 것도 나름의 고역이었다. 출국비행기 편이 없으니 비자 심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었다. 약속시간을 잡는 사이트가 오픈되면 발 빠른 사람들이 재빠르게 시간선점을 하고는 한다. 나같이 느린 사람은 계속 사이트를 드나들면서(클릭하면서) 누군가가 취소한 약속시간을 낚는 체임질을 부지런히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바쁜 주말에 KTX 기차표를 잡으려고 낚시질을 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간간히 쓴웃음이 나고는 했다.


간신히 약속시간을 잡아서 비자신청을 했다.


 독일 현지 회사 이주담당자와 한국의 독일영사관의 이야기가 서로 달라 몇 번의 과정 끝에 비자를 받았다.

효율적이고 간단한 해결책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개선이 안 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자세한 이야기야 여기서 다 할 수 없지만...


비자를 받는 과정 중에 느낀 점은 영사관 사람들(정확히는 창구 근무자)이 조금 거만하고 지나치게 사무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무적인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왜 거만해 보였는지 이유는 전혀 모르겠다. 불확실한 (적어도 내 느낌은 그랬다) 정보로 인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약속시간 잡기 경쟁과 서류를 다시 준비해야 했던 일들 때문에 때로는 속으로 쓴 욕을 삼키고는 했다.


그간의 과정이 불쾌할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분이 좋은 느낌은 결코 아니었다.

불평은 하되 비난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

심각한 코로나 시국에서 다들  불편함을 감수하며 지내는데 비난까지는 지나친 것 같다는 느낌이다.


소위 뺑뺑이(?)를 몇 번 돌고 난 뒤에 우여곡절 끝에 비자를 받았다.


비자를 찾아서  돌아가는데 차창 밖이 유난히 깨끗하다.

멀리 보이는 풍경이 미세먼지 하나 없이 투명하게 맑고 화창했다.


요놈의 코로나.....


이것은 무슨 상황?


비자는 받았고 출국 비행기 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문제도 아니었을 텐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좌석 선택에 있어서 약간의 고민이 되었다. 이코노미석에 다닥다닥 붙어 앉는 상황을 (선입견을 갖고) 상상하니


 "이 시국에 큰일 나는 것 아니야?"


걱정과 우려 해소 차원에서 좀 더 상황이 낫겠지 싶은 비즈니스석을 무리(?)해서 예매했다.


아니, 그런데... 이런 상황이 있나?  

탑승을 해보니 동행 승객들 모두 같은 생각을 했는지 비즈니스석이 바글바글(?)하고 뒤편에 자리한 이코노미석이 오히려 텅텅 비어서 거의 아무도 없는 수준이었다. 


" 아무도 없네 "


".......... "


 "괜히 비싼 표를 끊었네!"

 피식 쓴웃음이 났다...



프랑크프루트 공항을 통해 독일에 입국했다.


목적지로 가는 길에 보니 한국과 다르게 코로나를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현지의 대처법은 실내에서만 마스크를 쓰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거리에 마스크를 쓴 사람들은 한 명도 없고 우리만 무의식적(?)으로 벗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마스크를 꿋꿋하게 쓰고 있었다.  우리만 쓰고 있는 것도  모양새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고 유난을 떠는 것 같아 마스크를 벗었지만 마음은 매우 불편했다.


 유난을 떤다기보다는 현지인들에게 주목을 받는 것이 더 싫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코로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일부는 정치적인 음모(?)라고 생각하여 정부의 지시에 강하게 반대하는 부류도 있었다. 우리와는 대처하는 정도가 너무도 달랐다.

 




약간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염자수의 증가와 비례하여 코로나에 대한 대처의 정도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독일에 도착한 뒤로 독일인들에게는 하나의 아시아인으로 중국인 아니면 일본인 둘 중에 하나로 인식되는 느낌을 받았다. 사전 안면이 없는 길거리의 독일인들에게 아시아인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은 확실한 듯했다. 코로나가 아시아에서 기인되었다는 확신을 모두가 가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은 공공장소에서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움츠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거리에서 마주오며 걸어오던 독일인 아줌마가 건너편 길로 우리를 우회해서 피해 가던 일...

우연히 갈길을 가는 느낌이 아니라 피해 간다는 느낌이 확실했다.

몇 명의 친구들이 또한 같은 경험을 토로한지라 혼자만의 상상력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의 코로나 확진자 수가 하늘을 찌르며 거침없이 늘어나는 상황이라 아시안에 대한 약간의 분노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암튼 최대한 조심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아주 다행히도)....


우리나라의 방역조치가 모범적인 사례로 연일 독일뉴스에 보도되었다.

그에 따라 한국인을 좋게 보는 시각이 뚜렷하게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외국에 나오면 모국의 국력이나 국격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의 문화가 국격을 높여 주는 모습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때때로 젊은 독일인들이 BTS, 손흥민 선수, 김연아 선수를 알고 있고 K-pop에 열광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최근의 영화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도 봤다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먼저 이야기하고 말을 걸어오는 젊은 독일친구들도 많았다.


한 번은 영화 미나리가 독일 영화관에서 상영되길래  아내와 함께 보러 가기로 했다. 우리말로 상영할 테니 독일어가 미흡하더라도 마음 편히 영화나 보자고 영화관에 갔다가 멋쩍은 상황이 되었다.


"당신들 독일어 유창(잘)해요?"


"아니요, 한국영화라 그냥 보면 될 것 같은데요"


표 파는 창구의 독일아줌마가 물어보길래 우리는 한국인이라 한국 영화이니 그냥 보면 된다고 했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웃으시면서 독일에서 외국영화는 모두 더빙이 되어 있어 독일어가 유창하지 않으면 감상이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봤어야 되는데 아줌마에게 무심코 설득되어 생각 없이 그냥 뒤돌아 섰던 것이 후회된다.


우리나라도 한 때 외국영화를 모두 더빙해서 방송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가 순간 그립게 느껴졌다. 형사 콜롬보, 육백만 불의 사나이 그리고 소머즈 등 어렸을 적 인기 영화(드라마) 성우들의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

주말의 명화를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소개해주시던 검은 뿔테의 영화평론가(성함은 기억나지 않지만)님의 모습이 그립다... 그냥.


No English!!!

우리의 목적지인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해서 한 일 중의 하나가 주변의 맛집을 검색해서 가보는 것이었다. Bismarckplatz에서 Heidelberg Castle로 가는 Hauptstrße를 따라 다양한 맛집과 쇼핑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들을 하나씩 방문해 보는 것이 우리에게는 소소한 재미를 주는 일상의 하나였다. 코로나 시국이라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즐길 수 있는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그 와중에 유명(영화 배경으로 유명세를 떨친 음식점)하다는 한 식당에서 난처한 일을 당했으니.....

 우리에게 No English 사건이다.  




코로나로 매우 민감한 시기였다. 식당에 가려면 24시간 전에 코로나 테스트를 받아 음성이라는 증거를 보여주어야만 입장이 되는 그런 시기였다. 식당에 가는 숫자만큼이나 우리들의 코는 불편한 채취봉의 방문을 받아야 했고 그때마다 고통의 눈시울을 붉혀야만 했다.


우리는 미리 필요한 준비를 다 해서 유명하다는 그 식당에 갔다. 식당이 생각보다 이상할 정도로 정적이 흐르고 조용했다... 이상했다.


Heidelberg는 유럽의 명문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있고 영어에 유창한 젊은이들이 많은 편이다. 관광객들에게 영어가 잘 통하는 관광도시이고.. 영어로 생활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도시에 속한다고 믿었다.

적어도... 이 식당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식당문을 들어선뒤 너무도 적막하여 식당 열었냐고 영어로 물어보았더니 대답이


No English!!


더 대꾸도 하지 않는 이상하고 어이없는 난처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것은 또 무슨 상황?


English를 쓰지 말라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영어를 못한다는 것인지?

여기는 독일이니 독일어만 써라!


무슨 상황이었는지 지금도 헛갈린다.

이때의 느낌은 코로나 때문에 이 사람들이 아시안에게 무척 화가 나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불편한 느낌 그 자체였다.  코로나가  정말로 아주 점점 더 심각해져 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가끔 뉴스에 아시안에 대한 테러 뉴스가 나올 때면 마음이 조금 (아주 많이) 움츠려 지곤 하던 시기였다.


안 좋은 일은 Wrong time, Wrong place에서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어디서든 항상 조심해야 한다. 불필요한 시간에 불필요한 장소에 가지 말자는 나름대로의 규칙을 정해놓고 지내던 시기였기에 이 난감함은 우리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나라의 따뜻한 품이 뼈저리게 그리워지던 시기였다. 밖에 나오면 다 애국자가 된다는 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주는 이 난감함에 고마움을 느낀다.


이제 코로나도 거의 끝나 가는 시점이고 그 식당의 그분들이  아시안에게 가졌던 화가 조금은 누그려져 있기를 바라본다.


적어도 No English, please.라고 해 주시면 고맙겠다...

그러면 유창한(?) 독일어로 주문을 할 테니 말이다.




출국 시점 독일영사관에서 받았던 유쾌하지 않았던 느낌, 도착 직후 받았던 코로나로 인하여 받았던 유쾌하지 않았던 느낌, 또 현지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전통 음식점 등에서의 이방인에 대한 배척 등이 어쩌면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아주 양보하여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코로나의 경우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친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으나, 입장 바꿔 생각하는 연습이 때로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연습은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경험하는데 오히려 좋은 밑거름과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타지에서 이방인으로서 여행하고 생활하는데 항상 따뜻한 체험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충분히 완충할 수 있는 마음과 자세가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어렵고 기분이 좋지 않더라도....


뭐 이런 경우가 있어?....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서 그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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