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처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서사적인 사람이라서 무엇을 주제로 삼을지 3일 내내 고민했다. 나름 명색이 브런치 작가 데뷔인데 첫 글부터 모양 빠지기는 싫었다. 사실 3일 내내 고민만 하다 하루가 간 건 아니고 약 72 시간을 허송세월 보낸 날 멋들어지게 포장한 것이다. 그래도 배운 도둑질이 평생 소재로 삼은 몸뚱이 하나밖에 없어서 다시 솔직해지기로 결심했다.
일기로 스트레스를 배설하던 -나는 이것을 마음 뜨개질이라고 불렀다-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5년 만에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최근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그때의 글은 정말 똥이고 쓰레기라는 것이다. 그때의 나는 나름 전국구에서 수상도 하고 글쓰기로 대학도 들어가서 세기의 천재까진 아니지만, 내 미래는 조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비록 글로 생계를 유지하진 않아도, 어디서든 잘 섞어먹기 좋은 재능이니까. 물론 특출 난 재능은 맞다. 그게 내 것이 아닐 뿐. 작년에 우연히 친척과 대화하다가 친척이 내 수상작을 읽었다는 말을 흘린 적이 있다. 그때의 쪽팔림이란! 사실 글 자체에 대한 쪽팔림이라기보다는 그것이 걸작이고 수작인 줄 알았던 어리고 오만했던 날 마주하기 힘든 거였던 것이지만. 아무튼 나는 수능 5개월 전에 대입과 하등 상관없는 교외 수상작에 영혼을 불사 지르고 수능 3일 전에도 독서실 책상에 처박혀서 단편소설이나 쓰고 있던 나부랭이였다.
그렇게 글쓰기에 미쳐있는 날들을 보낸 뒤에 귀신같이 작문을 끊었다. 5년간 간간이 한 두 문단짜리 짧은 수필들을 작성하긴 했지만 각 잡고 두세 페이지를 타이핑하거나 종이에 적는 일들은 없었달까. 처음에는 그게 무섭기도 했다. 대학교 1학년 가을에 쓴 일기에는 '내가 더 이상 글과 책을 좋아하지 않을까 봐 두렵다'라고 적혀 있다. 이제는 안다. 나는 여전히 글과 책을 사랑하지만 다른 것들도 사랑하게 될 줄 알았고, 사랑의 방식 또한 변했다는 것을. 대학생이 되고선 미술, 전시에 빠져 살았다. 현대미술 교양도 듣고, 한 달에 한 번씩은 전시회를 돌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네필이 되고 싶다면서 주구장창 영화도 봤다. 하지만 세상 누가 글이 싫다면서 활자중독인으로 살까. 다른 관심사들에게 눈을 돌리면서도 나는 여전히 하루에 10만 자 이상 소비하며 살고 있다. 뭐랄까, 마음의 고향 같은 거랄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역시 제일 어려운 것은 다시 책상 앞에 앉는 것이다. 공부도, 글도, 샤워도 역시 시작이 반이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이 글도 장장 일주일 째다. 그중에 노트북을 킨 날은 이틀이 채 될까. 새삼 이병헌 감독의 <힘내세요, 병헌 씨>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한낮에 술에 절은 채로 깨어나 미적거리며 책상에 앉으면 쓰라는 글은 안 쓰고 영화 제목 폰트나 고치는 그런 게으른 주인공. 깔깔거리며 보다가 이게 영화인지 거울인지 헷갈려 차마 웃지는 못했다.
슬슬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부족한 글이지만 뭐, 어쨌든 책상 앞에 앉았으니까. 앉아서 노트북 두드렸으니까. 첫 술에는 배부를 수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앞으로 더 자주 앉겠다고 다짐하면 되는 일이니까. 개연성 없고 메세지 없다고 발행하지 않으면 영영 숨겨질 글이니까. 앞으로 더 자주, 더 좋은 글을 가져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