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가 되어 그땐 그랬지 하며 '엄마'를 헤앓아 가는 이야기
15살 나는 학교에서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친구가 없는 왕따는 아니었다. 새로 지은 학교에 새 학년이었고 학교는 문화도 전통도 없었기에 모든 학생이 만들어 가길 나름이었다.
그렇게 나는 친구들과 밴드부를 결성하려고 마음을 먹으며 '일렉 기타'를 처음 잡게 되었다. 그 당시 대형마트 문화 센터는 정말 다양한 교육들을 저렴하게 들을 수 있었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나는 친구 따라 문화센터를 신청하고 무리하게 엄마한테 기타를 사달라고 졸라 그렇게 '10만 원대' 저가의 일렉 기타를 구입했다. 문화센터 강의는 월 2만 원대로 다행히 저렴했다.
그 당시 학교 말고는 다니는 학원은 없었다. 어학원을 다니고 싶었고 수학 학원도 다니고 싶었지만 아빠 혼자 벌어서 내가 하고 싶은걸 다 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렉기타는 방과 후 나의 모든 것이었다. 평일은 연습을 엄청 했었고 주말이면 문화센터로 달려갔었다. 두 달 정도 다녔을 때쯤 아버지 사업이 힘들어졌고 우리 집은 바퀴벌레가 엄청 많은 1층은 식당 2층 주택으로 된 오래된 월세 집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밤에 자고 있으면 '부스럭부스럭', '탁탁 탁탁' 거리는 소리에 박수를 치면 '사사싹' 바퀴벌레들이 숨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자다 말고 쉬가 마려워 화장실을 가면 바퀴 벌레를 밟는 것도 다반사였다. 겨울에 학교를 가려고 씻으려면 주방에서 데운물을 대아에 받아서 그 물 하나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발을 닦고 알뜰하게 물을 써야 했다. 당연히 밥은 그 당시 급식 카드라고 저소득 집안 아이들에게 주는 정부 지원 카드로 편의점이나 분식집에서 때우게 되었다. 엄마가 아예 밥은 안 해 놓은 건 아니었지만 난 그 카드로 밖에서 먹는 게 그땐, 좋았다. 그렇게 넉넉하게 비싼 과외와 어학원은 못 다녀도 남들 부러워할 정도로 살지는 않았는데.. 2만 원뿐인 문화센터마저도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내 의지로 그만두는 게 아닌 엄마가 그만 다니라고 소리쳐서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너는, 눈치도 없냐 그게 그렇게 하고 싶어? 우리 집안 꼴을 봐 보고도 그런 걸 하고 싶어?, 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싹수없는 년 넌 눈치 좀 챙겨 엄마 속 뒤집어지게 하는 소리 하지 말고"
아무 말할 수 없었다 어이가 없었다. 당시 엄마는 차가 있었고 비싼 건 아니지만 나가서 삼겹살 정도는 사주는 엄마였다. 게다가 나가서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깟 2만 원이 아까워하는 게 그리고 자신을 상황을 '이해'를 바라는 설득이 아닌 강요였다. 좋게 말해도 '내가 이해했을 텐데' 꼭 상처주듯 말하는 엄마가 밉다.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나의 의지가 아닌 환경으로 좋아하는 걸 할 수 없다는 걸 처음 느꼈다. 그리고 엄마가 너무 미웠다. 그런 바퀴 벌레 나오는 집에 살면서 엄마는 나가서 돈을 벌지도 않았고 아빠는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고 들어온 날이면 술에 취해서 엄마를 때렸고 오빠는 방에서 나와 아빠를 말리지 않아서 내가 아빠를 몸으로 맞서 싸워야 했다. 그때 생긴 상처는 아물어 어딘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잊을 수 없었다.
좋아하는 걸 하지 못 한다는 것, 잊지 못할 바퀴벌레의 집, 그리고 능력 없는 엄마
하영아 엄마도 참 힘들었을 거야 5층 빌딩이 모두 엄마 거였고 이후 사기 당해서 작은 20평 아파트로 이사하고 그 아파트 마저 대출 이었지만 팔고 바퀴벌레 나오는 월세로 이사 가야만 했던 39살의 자식 둘을 챙겨야 했던 엄마는 더 아팠을 거야. 엄마도 알지 2만 원 그거 아껴서 얼마나 더 부기 영화를 누리겠냐고 하지만 그것마저도 아깝고 아껴야 한다고 자식이 하고 싶은 걸 해주는 것보다 마음의 여유가 부족해서 자식에게 해주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아끼는 것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던 엄마를 이해를 조금이라고 해 앓아 주렴, 엄마는 그 당시 배운 기술이 없어서 그저 아버지가 벌어 주는 생활비로 생활만 해봤지, 무언가를 배우기엔 돈이 들었고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거고 아는 게 없어서 어떻게 일을 찾아야 하는지 조차 몰라, 잔고는 비워져 가는데 먹고살아야 하고, 다달이 가는 돈은 있는데 벌어다 주는 생활비는 없고, 엄마가 더 많이 힘들고 엄마가 더 많이 눈물로 밤을 지 새웠을 거야. 사람의 마음의 여유는 자신이 편안할 때 남에게 보일 수 있는 부분인 것이고 자식마저 배려할 수 없던 엄마는 정말 속이, 속이 아닐 거야
2013년도 고3 나는 수능보다는 내신으로 수시전형으로 끝을 내려고 했다. 내신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니지만 수능이라는 시험이 나는 못 할 것 같다. 공부도 그렇게 잘하는 얘도 아니었고 체육이 좋아서 대학 네임 보다 체육학과만 붙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고 그저 하향 지원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하향 지원을 주로 했다.
나는 고1부터 체대 입시를 방과 후 수업으로 들으며 3년 준비했었다. 그 당시 우리 체육 선생님은 신문에 실릴 정도로 열혈 지도 교사였고 큰 입시 체육 비용을 받지 않고 정말 방과 후 비용 만으로 선배들 후배들 동기들 모두 유명 대학교부터 원하는 대학으로 이끌어 주시는 입시계 진정한 교사였다. 나 또한 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던 남어지 입시철 십자 인대가 끊어져 휠체어 생활을 4개월 했어야 했고 결국 체육과를 포기 못했던 나는 더욱더 낮은 하향지원을 하며 실기 없는 학교 위주로 원서를 냈다.
다행히 실기 없는 학교가 있었고 내가 접수한 학교는 다 붙었다. 강원대, 서원대, 경인여대, 부천대 등.. 내신 3등급 초반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낮은 커트라인 점수에는 비빌만 했다. 그 당시 합격등록 여부는 전화로 왔었고 나는 합격전화를 받지 못했다. 왜냐 하면 비상전화 1번이 엄마 번호라서 엄마한테 전화가 갔기 때문이다.
그게 제일 큰 문제였다.
그중에 제일가고 싶었던 대학은 붙었으나 나와의 상의도 없이 엄마가 거절했다.
거절의 이유는 간단했다.
"돈이 없어서 집 가까운 곳 아니면 안 보낼 거야"
너무 어처구니없었다. 내가 가고 싶은 학교는 십자인대가 끊어져 고생하던 시절 나를 물리치료 해주셨던 고교 입시 체육 선배 이자 나의 물리치료 선생님 이었던 선배님의 대학 학과였다. 나의 학교 생활을 착실히 한다는 조건 하에 졸업하면 가운을 입고 운동처방을 내리고 운동 치료를 하는 물리치료사가 될 수 있는 직업이라 나도 선생님 소리 들으며 병원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엄마는 무지해서 그런 건 둘째고 돈이 적게 드는 대학이 우선이었던 거였다. 4년제는 절대 안 되고 2년제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이 있으셨다. 정말 서럽게 펑펑 울었다 보름 동안 엄마랑 말 한마디 안 했고 밤마다 서럽게 정말 많이 엄청 울었다.
원하는 대학을 떨어져서 울기보다는 '무지한 엄마 때문에 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밖에 없어, 엄마 처럼 되지 않으려면 엄마에게서 벗어나야 해' 하는 생각 때문에 더 나를 힘들게 했다.
그 어느 부모도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지만 부자가 아닌 이상 가난한 부모가 알고 있는 것만 물려주게 되고 그 가난한 프레임 밖은 가난하기 때문에 깨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10년 이상이 지나 이때 이야기가 나오면 지금도 엄마는 끝까지 말한다.
"엄마는 그날 너를 집에 가까운 전문대를 보낸 걸 후회하지 않아 그땐 돈이 없었으니깐"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문대 나와서 제약이 너무 많아 취업 때 펑펑 울었고 결국 나는 편입을 내 돈으로 다시 했다. 너 짜증 나는 건 그 전문대 마저 장학금으로 매 학기 돈을 낸 적이 없었고 대학을 다니면서 알바를 하면서 엄마가 힘들 때 돈을 빌려 줬었고 고등학교 수능 다음 주부터 나는 스스로 알바를 하며 엄마한테 크게 경제적으로 기댄 적이 없다.
세상에 엄마가 전부고 엄마 말을 들으면 대단한 사람이 되고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하면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나는 19살 깨달았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 지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헤쳐가야 한다는 걸
하영아 세상에 완벽한 부모란 없어 너도 자식을 낳으면 (지금도 처녀지만) 너 또한 완벽하지 않을 거야 엄마가 자라던 시기보다 지금은 정보를 얻는 게 쉽고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배우고 느끼는 건 더더욱 쉬워졌어 하지만 엄마는 보이는 게 전부이고 많이 배움을 배우지 않아도 수단만 좋으면 먹고사는 게 지장이 없었던 시대였잖아 그렇기에 배움, 학력이 길다고 돈을 많이 벌어 풍요로운 삶보다는 현장에서 발로 뛰어 장사를 하는 게 돈을 더 많이 벌던 시기였어, 그렇기에 학력에 대해 배움에 대해 집착이 없었을 거야, 너는 점점 사회를 살면서 더 엄마보다 아는 게 많아질 테고 그럴수록 엄마를 무시하기보다는 엄마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그러면서 다음의 내 자식을 위한 엄마가 되었으면 한다.
20살이 되면 정말 내것은 다 내 것이라 생각한다. 내 시간이니 밤늦게 들어와도 되고 내 돈이니 내 맘대로 사용하고 내 마음대로 머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삶에 엄마가 방해가 된다. 엄마는 늦게 오는 나를 감시했고 엄마는 내가 입는 옷, 친구, 무엇이든 다 감시와 참견을 했고 비꼬는 말로 잔소리를 하며 내가 하고 싶은걸 다 못하게 했다. 그동안 학교 다니며 사고친적 없고 경찰서 간 적 없고 그 흔한 학교에 부모님을 오게 한 적도 없다. 그런데 왜 이리 나를 못 믿어서 이렇게 나를 못 놓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분에찬 나는 엄마한테 편지를 썼다. 내가 아는 최대한 못된 말로 나를 버려달라고 하소연하듯..
내용은 대충 이렇다. 아빠가 인기 많아 여자 친구랑 놀 때 엄마 마음 고생하는 거 아니깐 내가 딴짓을 할 수 없었고 오빠가 날라리 친구들한테 맞고 들어온 날 걱정돼서 나를 집에만 있게 했었고, 등등.. 착한 딸 코스프레 그만하고 싶다. 엄마는 학창시설 학원 하나 원하는 곳 보내주지도 않았으면서 성인이 된 나를 내가 하고 싶은 것조차 못하게 하니 나는 더더욱 착한 딸 그만하고 싶다고. 엄마를 보면서 배울 거 하나 없다고 엄마는 속상하게 만든 아빠를 버릴 줄 도 모르고 나가서 남자친구도 만들 줄 모르는 매력 없는 여자라 나의 마음도 아빠의 마음도 모르는 바보라고 정말 모욕적인 말로 가득 작성했다.
엄마의 대답은
"하영아 엄마가 끝까지 잃을 수없었어 미안해 이제 너 하고 싶은 거 해"
그렇게 나는 엄마의 터치가 없었다. 걱정도 믿음도 그냥 식구였다.
못된 마음과 계획처럼 엄청 못 되게 하지 못했다 어딜 가면 걱정 말라는 문자와 무엇을 하면 무엇을 하는지 걱정이 들기 전에 상황을 말하니 더 이상 엄마의 잔소리는 사라졌도 자연스럽게 간섭도 없어졌다.
대학을 무탈하게 잘 졸업했다. 문제가 되는 것이 없었다. 집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였고, 학비도 장학금 덕분에 오히려 학교에서 용돈을 받으며 졸업할 꼴이었다. 학교생활도 나름 무난하게 조용히 했기에 다른 타 학과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었고 휴학은 상상도 안 하고 졸업했다.
드디어 독립을 할 수 있는 순간이 온 것이다.
9촌가량 되는 먼 친척이 천안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와서 선생님을 해주실 원하셨다. 방과 후 수업과 방문수업, 어린이집 타임 수업 등 외부 활동이 주로 있었어 센터보다는 방문 위주 수업이라 차가 필요했었다. 나는 당장 차러 사러 현대 자동차 매장에 들어가 그 당시 전시차량 신차 '아반떼'를 60개월 할부로 구입했다. 사실 이 부분에 일화가 있다. 이렇게 멋지게 한단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면 너무 좋겠으나 '선수금'이라는 돈이 필요했었다. 천안 이모 원장님께 200만 원을 빌렸고 모자란 200만 원을 엄마에게 태어나 처음으로 돈을 부탁했다.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다달이 갚을 테니 빌려달라고.
단번에 거절당했다.
"네가 선택한 거니깐 네가 해결해야지, 내가 왜 널 도와줘야 하는 거지?"
그럴 수 있다 돈을 쌓아두고 사는 집이 아니니깐 여유로운 집도 아니고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이모 원장님께 사정을 말하고 더 빌려서 선수금을 해결하고 차를 구입했다.
"언니가 그 정도로 힘드니?"라는 들으며 말이다.
친오빠는 어려서부터 말길을 잘 못 알아듣고 주의를 깊게 듣지 않고 부르면 대답을 얼버부리고 말을 똑바로 안 하고 그저 가족들은 성격이 소극적이라 그런가 보다 했다. 방에 처박혀서 종일 있거나 태권도를 어려서부터 했던 지라, 그저 오빠랑 부딪힐 일 도 없었고 싸울 일 도 없었다 그렇기에 좋은 사이도 좋지 않은 사이도 아닌 남매 사이다. 그런 오빠가 귀가 안 좋아서 보청기를 구입해야 한다고 한다.
속으로 오빠가 벌어서 사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차 살 때 도와달라는 말 한지 3일 뒤 엄마가 700만 원짜리 보청기를 오빠 귀에 맞춰 주었다.
사회생활 안 하는 사람도 아니고 큰돈은 아니지만 돈도 버는데? 엄마가 그걸 왜 해줘? 나는? 나는? 나는 주어온 자식이야? 나는 '차'이고 오빠는 '의료기기'라서 가치가 달라서 그런 건가?
'속상하다' 이후 오빠는 보청기를 잘 착용하지 않아서 의사 선생님께 혼이 났지만 보청기를 익숙하게 착용하지 않았고 결국 그 값어치를 하지 못 하고 내가 소리치고 그게 무엇인지 아냐고 뭐라고 하니 그때 서야 오빠가 잘 착용하기 시작했다. 오빠도 밉지만 눈에 보이게 차별하는 엄마가 더 밉다. '도대체 그 돈은 어디서 났을까?'
참, 아픈 손가락인 자식은 안 아픈 손가락의 자식의 마음을 알까? 얼마나 큰 사람이 되려고 어려서부터 차별을 느껴야 했을꼬 힘들지? 하지만 그만큼 네가 더 잘하고 있는 거고 더 믿는 거고 더 잘 살고 있다는 뜻인 거야 아픈 손가락인 자식은 또 그만큼 너를 부러워하는 것도 있지 부모의 걱정 어린 자식 보단 든든하고 믿음직한 자식이 더 효녀고 효자인 거야 그만큼 사랑을 더 못 받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만큼 더 기댈 수 있는 자식이 될 거란다 넌 더 부모한테 잘하는 자식이 될 테고 돈의 크기보다는 믿음의 크기로 사랑을 바라봤으면 좋겠다.
천안에서 생활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나의 방이 필요했다 급하게 내려온 천안은 친척동생의 방에 얹혀서 지내야 했다. 지방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던 동생은 1년 중 반은 기숙사에서 지냈기 때문에 이모 이자 원장님은 내가 지내도 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라꾸 라꾸에서 지냈다. 그렇게 지낸 지 6개월쯤 될 때 친척 동생이 불편해한다는 걸 조금씩 느껴졌다 나 또한 그랬다. 방학 때 온 동생은 책상을 같이 쓰는 거라 생각했던 나의 짐이 책상에 있던 것들이 침대 위로 던져져 있었고 세면대 위에 올라온 세면도구는 화장실 바닥으로 내려져 있었다. 21살이던 나는 이게 '텃세'처럼 느껴졌고 불편함을 이모에게 말했다.
"저 이제 나가서 독립하고 싶은데 수업을 더 많이 주시면 감사겠습니다."
이모는 마침 갖고 있던 집에 전세가 나가는데 내가 들어가 살기 원하셨다. 앞 살던 전세자의 돈을 급작스럽게 만들어 주기 힘들었던 상황이라 내가 들어가 살기를 엄청 원하셨다. 이모의 은행지점장을 설득하여 내 이름으로 최대한 많은 대출을 받아서 천안 불당동 이모집에 전세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당연히 경력도 중소기업도 아닌 프리랜서였던 상황이라 대출이 많이 나오지 않아 은행 2군데에서 대출을 받았지만 턱없이 부족한 돈으로 시세 보다 저렴하게 들어가게 되었다. 이모도 미안한지 대출의 일부를 다달이 내주셨다. 서면으로 전세 계약서 없이 구두로 계약했다. 그렇게 나의 정말 진정한 독립이 시작되었다.
당시 엄마가 대출을 받아라 받지 마라 그건 아니다, 맞다, 말을 해주시지 않았다.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 인천에 다시 와서 돈을 버는 건 어때?"라는 말이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엄마는
"너의 선택이니깐 네가 알아서 해 엄마는 못 도와줘"
그렇게 이모집에 전세로 들어가서 1년 조금 넘게 지냈다. 아주 잘 지냈다 불만도 없었다.
그러다 일을 그만두는 상황이 와 나는 집을 빼달라고 이모에게 부탁했다. 대출이 걸려 있는 부분이라 천천히가 아닌 바로 전세금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3개월만 기다려 달라고 하셔서 3개월 동안 원금과 이자를 내면서 이모 학원을 나와 다른 곳에서 알바를 하면 갚고 있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도 이모는 전세금 전부를 주지 않았다. 이유는 너의 명의로 받은 대출을 내가 원금과 이자를 다달이 낼 테니 문제없는 거 아니야 이거였다. 사실 이모 입장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대출은 이모 명의가 아닌 나의 명의가 내가 왜 이모를 위해 대출까지 받아서 명의를 빌려 주어야 하는 건가. 이건 아니다 판단을 하여 결판을 지어야겠다 생각했다. 처음은 엄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엄마, 이모가 돈을 주지 않아 엄마자 좋게 이야기해 주면 안 될까? 2천만 원인데.."
"몰라, 너 알아서 하라고 했잖아, 내가 뭘 해주길 원하는 건데? 너 문제를 어른 싸움으로 까지 만들지 마"
너무너무 서운하고 너무 서러웠다. 우리 엄마가 맞는 건가? 몇 백도 아닌 몇천이다. 딸이 삔뜯긴 것이다. 다달이 갚아 주긴 하겠지만 딸이 돈이기도 하다. 정말 우리 엄마가 맞나? 정말 많이 생각했다. '나의 책임'이라는 것도 크다 내가 선택한 것이다. 이모가 "대출도 능력이야"라고 하는 말에 어린 나이에 대출을 받았지만 정말 나의 행동에 책임을 다 한다는 건 큰 것이다. '돈'이 엮이면 더더욱 엄마의 도움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든 받아야겠다 판단했고 전화를 걸었다.
"이모, 저 전세금 언제 주실 거예요?"
"무슨 전세금? 다 줬잖아?"
"아니. 남은 대출금 그거요"
"그건 내가 다달이 갚을 거야, 걱정하지 마"
"24살 어린 저에게 대출 2000만 원 만들어 주시고 빚쟁이 만들고 지금 안 주신다는 거예요.! 당장 주세요. 이모한테 명의 빌려줄 생각 없어요!"
소리쳤고 이모 또한 소리치며 전화가에 침 튀길 정도로 서로 윽박을 지르면 전화가 끊어졌다.
그렇게 며칠뒤 돈이 입금되었고 나의 대출금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번일로 나는 이모의 신뢰 나의 책임감 대출에 대한 부담감 등등 많은 걸 깨달았지만 제일 큰 건
우리 엄마는 내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내편에 서서 나 대신 싸워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모의 편에 들면서 어른한테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했었고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었다. 나라면 내 자식이 "엄마 나 돈 못 받았어!"라고 하면 달려가서 머리 채를 잡고 흔들고 암바를 걸고 초크를 걸어서라도 돈을 받아 왔을 거다.
엄마는 가족과의 싸음을 극히 싫어해. 친척과의 트러블을 만들려 하지 않아. 그러나 하영이 너는 엄마와 달리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적'으로 놓고 피해받은 걸 어떻게든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렇기에 엄마는 나를 설득할 수 없었고 그런 노력 조차 하지 않을 뿐이야 너를 싫어하고 너의 편이 되어 주지 않은 것이 아니야 하지만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 엄마는 누구와도 '적'을 만들지 않아 그건 누구 보다 '딸'인 네가 잘 알잖아. 엄마의 별명은 '착순이'이겠어 '착한 순둥이'라서 '착순이' 엄마가 알바를 하던 주인집 할머니도 그 주변 상인 지인들도 우리 엄마를 '착순이'라고 불렀잖아.
엄마의 삶이 틀린 것이 아니야 다른 것뿐이고 너의 편의 들어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의 적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란 걸 알았으면 좋겠어
동생의 행동은 당연한 것 일 수 있다. 동생은 20살 이였고 본인 방에 본인이 없을 때 자기 영역을 침범을 하는 누군가 생겼다. 방을 빌려 쓰는 나보다 더 많이 불편했지만 나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다 불편하다고. 참 행동은 미웠지만 속상하게 나의 면전에 나가라고 말하지 않았던 동생이 한 편으론 나 보다 그땐 더 철든 아이 였을 수도 있다.
천안에서 20대 초반을 보냈기 때문에 천안에서 일자리를 계속 이어 갔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나를 위한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도 참 많았다. 제일 중요한 건 돈을 많이 벌었다. 나는 천안에서 오랜 시간 일을 하며 타지방 생활을 이어 갔다. 그중 카페 매니저가 되어 일하고 있을 때 엄마한테 카톡을 보냈다.
"엄마가 해준 소고기 시래깃국 먹고 싶다."
그 말이 무섭게 엄마는 나에게 연락도 없이 첫 버스를 타고 무겁게 국을 가득 담아서 카페로 오셨다.
갑작스러웠다. 국을 들고 오셨다 손님도 아직 없는 오픈 시간이었다. 엄마의 모습에 민망했고 엄마가 이렇게 아침 일찍 오게 한 게 미안했고 내가 그걸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나는 일중이었고 사장은 CCTV로 보고 있었으며 조금 있으면 손님이 몰려와 정신없어 질게 뻔했다.
따뜻하게 엄마를 맞이해 주지 않고 성격대로 힘들게 왜 왔냐고 나는 소리쳤고 바빠서 먹지도 못하는데 "왜! 온 거야!" 소리만 쳤다. 같이 오픈 준비 하는 친구는 늦는다고 연락이 와서 매장엔 나 혼자였다. 더 혼란스러웠다.
"우리 딸 먹고 싶다고 하니 만들어 왔지, 아무도 없을 때 아침부터 먹어"
라고 말하면서 주방으로 들어왔다. 너무 놀랬다. 지금 오픈 때문에 바쁜데 왜 들어오는 거지? 외부인이 남의 사업장 주방에 이렇게 밀고 들어온다고? 왜? 이리 무식하게 엄마는 행동하는 거지?
화를 내는 나를 보면서 국 마저 버릴 까봐 급하게 주방부터 들어오시려는 거였다. 나는 그걸 받아서 주방으로 들어갔고 엄마를 홀로 밀쳤다.
"오지 마 왜 오고 난리야 그냥 집에 가 제발"
엄마 마음도 모르고 나는 엄마한테 모진 말만 했다. 속은 아니었지만 입은 이미 나쁜 말만 했다.
"다시는 안 올게 그래도 먹고 일해"라고 말하며 커피 한잔도 전해 주지 못하고 엄마는 그대로 택시를 타고 터미널을 갔고 인천으로 올라가셨다.
그날 이후로 엄마에게 먹고 싶다는 이야기는 다시는 하지 않았다. 나는 참 못된 딸이다 멀리서 온 엄마의 뒷모습은 너무 쓸쓸하게 도망가듯 택시를 올라탔다.
먼가 수많은 감정들이 몰려왔다.
반찬을 가지고 자식 주겠다고 올라온 부모들을 내치는 자식은 나뿐만 이지 않을 거야 하면서 위안 삼지만 시간이 흘러도 이때 그 미안함은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나의 잘못이 아닌 타인의 영향으로 애정하고 좋아했던 그리고 하루 16시간 일하며 한 달에 하루 쉬면서도 웃으며 즐겨했던 카페를 그만두게 되었다. 갑짝스러운 퇴사는 곧장 나의 생활에 영향을 주었고 천안의 장점 중 하나인 인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공장이 널렸다는 것이다. 급히 현실을 마주하며 하고 싶은 것만 찾아서 하던 나는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하는 현실에 어쩔 수 없이 내 선택으로 생산직 라인으로 컨베이 터 벨트의 부품 중 하나의 일원이 되었다. 어딜 가나 일복이 넘쳤던 나는 이번에도 꿀을 빨지 못하고 입사 하자 바로 현대차 생산량이 늘어 하청인 나의 일도 늘었다. 잔업부터 주말 근무 휴무 없는 연장 근무까지 하면서 공장에서 부모님 몰래 일하기 시작했다.
몰래, 사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딸이기에 공장에서 일한다는 말조차 꺼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리고 잠깐 반짝 일하고 현 씀씀이가 컸던 나는 그것만 바로 잡고 현금 조금 손에 쥐어 바로 인천으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바쁘고 일이 많은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돈을 쓸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그만큼 돈이 모이는 게 무섭게 보이니 생각한 기간보다 더 오래 일하게 되었고 결국 아빠에게 털어놓았다.
"아빠, 나 공장에서 생산직 일해 걱정 마"
그 이야기를 듣고 아빠는 바로 나의 집으로 왔고 붉은 눈을 하고 나에게 왜 힘든 일을 하냐고 안타까워했다.
"나, 카페 차리고 싶어 빵도 배웠고, 커피도 웬만큼 전문가처럼 알고 나 자신 있어 돈이 필요해 단지"
"사업을 떠나서 딸 고생하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
"엄마 아빠, 카페 차려 줄 수 있는 거 아닌 거 아니깐 내가 해야지 내가 하고 싶은 거니깐 괜찮아"
나는 당당하게 내가 선택한 거라 말했지만 사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엄마 아빠가 못해 주니깐 어쩔 수 없어 나는걸 말하고 싶었던 건 솔직히 진짜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공장을 그만두고 어느 정도 나에게 돈이 모였을 땐 카페를 차릴 마음이 사라졌다. 매일 새벽 손가락이 아파서 울다가 약을 바르고 자다 무릎이 아파서 깨고, 밥 먹을 시간도 없고 잠잘 시간도 부족해 컵라면만 먹고 잠들고 힘든 12시간 근무 2교대 하면서 모은 돈은 잘 될지 망할지 모르는 사업에 밑천으로 쓰고 싶지 않았다. 돈의 가치를 이제야 알게 된 거다. 그동안 난 너무 쉽게 재미있게 돈을 벌었다. 카페를 하면서 400만 원 넘게 벌었교 교사 시절에도 어린 나이에 차도 있고 명품 가방에 한 달에 한번 백화점 하면 100만 원씩 긁었다. 뒤돌아 보니 허망했다. 그동안 엄마 아빠한테 무언가 해준 적이 없었다. 나만 배부르고 나 잘난 맛에 살았던 거다.
힘들게 돈을 벌고 나니 그냥 다 필요 없고 엄마 아빠 밑에서 용돈도 받고 같이 모여 앉아 밥 먹으며 그냥 남들처럼 회사 다니며 평범하게 살고 싶어졌다.
8개월 동안 나는 3천만 원으로 벌었고 빛과 살고 있던 아파트를 정리하고 아반떼 차는 18개월 정도 남은 할부가 친오빠가 차를 갖고 싶다고 하여 오빠한테 인계했다. 당연히 명의는 나고 남은 할부랑 보험료만 내고 타겠다고 해서 그냥 차를 줬다. 그렇게 2천만 원 정도 되는 돈을 들고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때 내가 26살이었다.
정말 너무 늦지도 정말 너무 빠르지도 않은 게 인생의 배움이라고 하더라 돈의 소중함을 알아서 다행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생각을 한 너에게 기특해 30년 짧은 인생을 살면서 그동안 힘든 시기를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너를 응원해 그리고 고생했어 앞으로의 고생도 힘들겠지만 지금처럼 나아갔으면 좋겠다.
인천에 올라온 나는 어떤 일을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 몰랐다. 할 줄 아는 건 서비스직뿐이었고 사무직을 하고 싶었다. 무난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취직한 친구들은 자리를 잡아서 어느 정도 돈도 모았고 직급도 있었고 나름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직업도 없이 이제라도 뭐라고 해야겠다 싶어서 지금 아니면 못해보는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좋아하는 바이크를 타면서 바이크 관련일을 하고자 싶어서 쇼에이 헬멧 본사에서 일해보고, 핸드폰 사기가 극심했던 시기에 폰 팔이도 해보았고, 2020년도 부동산 열풍이라 아파트 모델하우스 판매도 해보고, 신용카드를 현명하게 쓰는 방법을 알고 싶어서 현대카드 콜센터도 들어가서 일해봤다. 길게는 6개월 짧게는 3개월 그렇게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돈을 모으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생활 유지할 정도만 벌었던 시기에 엄마의 생활비 타령이 시작되었다.
"엄마 집에서 살려면 하영아, 생활비를 줘야 하는 거야 다달이 100만 원씩은 줘야지"
"옆집 철수네는 엄마한테 월급 다 주고 용돈 받아서 쓴다고 하더라"
"너희 오빠는 나한테 80만 원씩 주고 있어 너는?"
돈, 돈, 돈 돈을 피해서 사람을 피해서 도망온 집은 나에게 돈을 요구한다.
듣기 싫어서 화도 냈지만 오히려 엄마는 당당했다. 내가 먹는 것 쓰는 것 다 돈이 들어가니 당연한 엄마의 요구라는 것이다. 당연히 나도 안다 하지만 주고 싶지 않았다. 150만 원 벌고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온 나지만 더 이상 돈으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아서 인천에 온 거였기 때문이다.
"여보, 왜? 올해는 사장님이 쌀 안 줘요?"
아버지가 근무하는 회사는 작은 4인정도 되는 회사다. 사무실도 시골에 있고 현장 토목공사 회사 이기 때문에 사장님이 농사도 지으면서 회사도 운영하신다. 그래서 가끔 채소랑 햅쌀을 주셨다. 엄마는 그걸 호의가 둘리가 되었다. 당연히 줘야지 작년엔 주고 올해는 왜 안주냐고 아빠한테 짜증을 부리셨다.
"엄마, 주시는 거에 고마워해야지"
"그럼, 월급을 올려주시던지 쌀값으로"
나는 엄마로 너무너무 도망치고 싶었다. 왜 우리 엄마가 이렇게 된 걸까? 작은 거에 감사해했던 사람인데. 왜 이렇게 갑박해 진 걸까? 나는 엄마가 창피했다. 나에게 생활비를 달라고 나랑 싸우는 것도 주에 3번은 되었고 이외에도 밥상 차리는데 수저 안 놓는다고 소리쳤고 목소리 크게 말하길래 '엄마, 작게 이야기해도 돼 엄마 목 아프겠어' 말하면 '네가 먼데 날 가르치냐, 나 원래 목소리 큰 거 이제 알았냐' 며 소리쳐서 나는 그렇게 정말 매일매일 싸웠다. 안 되겠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정말 평생 한 번도 이유가 없이 '예민한'엄마랑 말싸움한 적 없는 하영아 엄마의 예민한 말과 행동과 싸움에 정말 많이 힘들고 지쳤지? 그런데 엄마 입장에서 생각해 봐 그땐, 엄마가 엄마 마음이 아니었을 거야. 엄마도 여자인걸 모두가 엄마 마음을 몰라 준다고 스스로가 참 속상했을 거야.
엄마를 이해하려 생각하기보다는 엄마 혼자 이겨 낼 수 있게 지켜보고 최대한 맞춰주고 따뜻하게 안아줬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 이렇게라고 말할게 그땐, 너도 너만의 최선을 다한 거야. 잘했어
그래도 천안에서 모아둔 돈과 조금씩 벌어서 생활한 생활비로 1년 반을 놀기도 하고 일하기도 하면서 지내다 진정으로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일 정말 내가 안정적인 일과 직업을 찾기 시작했다. 그 당시 콜센터를 다니면서 챗봇이라는 시스템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취직한 지 2달 차인데 챗봇으로 상담을 한다고?
"없어지는 직업을 내가 하지 말고, 직업을 없애는 일을 해야 내 직업이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고 곧장 직업을 없애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그게 바로 AI 인공지능이었다.
공부를 해야 했고 돈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큰 결심을 했다. 엄마한테 내 남은 전 재산을 드리고 날 조용히 공부만 할 수 있게 내버려 달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부모님은 흔쾌히 승낙했고 그렇게 나는 국비지원 학원을 다니고 하루에 5시간만 자고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워서 참고 책상에서 밥을 먹고 책상에서 공부하고 책상에서 잠들었다. 체육과는 수학점수를 보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수학은 도전이었다. 중학교 수학 문제집부터 풀고 6개월 만에 대학수학, 선행대수, 확률통계를 풀었다. 동시에 빅데이터 관련 자격증을 2개나 취득학고 개발자 블로그를 개설해서 만들고 프로젝트도 완수하며 학원 수료 과정도 밟았다. 방해될까 핸드폰도 정지했다. 나를 방해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나의 천만 원은 6개월 만에 생활비로 쓰였다.
엄마는 공부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밥상을 매번 차려 방으로 넣어 주셨고, 필요한 게 있으면 사다 주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 시중을 들어주셨고. 나는 당연한 뒷바라지라고 생각하며 내가 잘나서 이룬 거라 생각하며 단번에 취직도 성공했다.
첫 월급을 타서 어디에 사용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렇게 6개월 조용히 지나가는 줄 알았다. 또다시 돈을 벌기 시작하니 생활비 타령이 2차전이 시작되었다.
이제 회사도 다니고 버니깐 생활비로 보태라는 것이다. 하.. 정말 왜 돈이 원수다. 맡겨 놓은 거 마냥 잊을 만하면 생활비 타령이 끝나지 않는다. 나의 피 땀 눈물 공장에서부터 벌어온 천만 원이 담뱃재처럼 다 사라진 것이다. 정말 밉다 그만 좀 딸한테 돈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나?
나는 결국 작은 20평 빌라에 나는 지낼 수 없다고 말하고 엄마 집 근처 오피스텔에 무일푼으로 전세를 들어갔다 겁도 없이 계약금 500만 원만 있었기에 계약금만 넣고 '중소기업청년 전세대출' 받아서 나머지 모자란 돈은 신용대출을 받아서 신축 오피스텔에 입주했다. 엄마에게 도망처 천안으로 갔는데 이젠 엄마집에서 20분 거리 오피스텔로 도망친 것이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엄마에게서 도망친 거지만 엄마는 좁은 집에 [방문이 방 내부가 보이는 미닫이 문이었고 용도는 주방에 붙은 작은 창고였다. 슈퍼 싱글도 아닌 싱글 침대 하나가 들어가면 꽉 차서 책상을 침대에 붙여서 침대를 의자 대용으로 사용할 정도로 수납이 힘든 작은 방이다] 이 불만이라 독립한 줄 알고 계신다.
참 많은 상처를 주고 떨어져 지내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7평 오피스텔에 혼자 살고 있으니 너무 좋다 적당한 거리라서 엄마가 찾으면 바로 엄마 집으로 갈 수 있고 반찬이 필요하고 밥을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적당한 거리다. 서로 간의 독립적인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게 되고 이렇게 나는 엄마를 존중하며 살기로 했다.
엄마와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애틋하게 연애하고 있다. 매일 통화한다. 남자친구 보다 더 길게 하루에 두 번씩 착한 딸 코스프레 안 하고 나 자신을 살면서 앞으로 이해하는 마음 아닌 그저 존중하는 딸이 될 것이다.
여러 가족의 형태가 있듯 나는 굳이 가족이 다 같이 살을 붙이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당한 거리가 오히려 더 서로의 삶을 존중해 줄 수 있고 서로 애틋해지기도 하며 만나면 더 반가워진다.
어려서는 엄마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 우리 엄마가 안타깝고 더 잘해주고 싶다. 난 지금 30살이다. 엄마 30살 엔 자식이 둘이나 있었다. 그렇게 눈 깜빡하니 엄마가 54살이 되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엄마는 자기 시간이 없었다 나처럼 독립을 해서 혼자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회생활을 해본 적 없었고 고등학교 졸업해서 할아버지 밑에서 경리 일을 잠깐하고 시집을 가서 바로 아들을 낳고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다.
해 앓아주는 사람 하나 없었고 아빠도 무뚝뚝한 무심한 남자였다. 그렇게 엄마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착순이'가 된 것이다. 이제는 그걸 알아줄 수 있는 여자는 아마 나 하나뿐인 '딸' 하영이 뿐일 거라 생각한다.
평범하지 않는 딸을 낳아서 얼마나 딸에게 상처받고 아픔을 겪었을 엄마에게 이 글을 쓴다.
미안해 엄마 나는. 자식이 엄마를 알아주는 게 아니라 엄마가 자식을 알아주기만 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어 앞으로 잘할게,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