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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웨지감자 Apr 04. 2024

나는 어떻게 졸업 허락을 받았는가

불안과 시작의 10월

졸업하고 나서야 속에 묻어놓았던 일들을 풀어쓸 용기가 생겼다. 어떤 기억은 시간만이 약이었다. 그동안 브런치 글이 조금 뜸해진 것은 전적으로 내 상태가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글로 고통을 승화시키고 싶다고 해도 고통의 바다에 던져져 숨이 막히는 상태로는 청승맞은 글밖에 쓸 수 없었다. 그런 글을 써서 세상에 내보낸다는 것은 내게 스트레스의 해소는커녕 오히려 고통이 가중되는 일이었다. 내 비참한 정신 상태를 그대로 노출시켜 누군가에게 동정심과 측은지심을 받는다는 건 그나마 남은 자존심에도 금이 가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그간의 내 심정은 브런치가 아닌 핸드폰 메모장에 적혔고, 폭풍같이 지나가는 시간과 감정과 함께 흘러갔다.


꽃 피는 계절. 벚꽃이 화사한 성북천 주변의 모 카페에서 다시 용기 내어 브런치를 열었다. 이제는 나의 졸업 과정을 복기할 준비가 된 것 같다. 그간 적어왔던 메모들과 캘린더를 보면서 정리해보려고 한다. 흐릿해지는 기억을 붙잡아서 소중한 경험으로 만들어보려고 한다. 나는 어떻게 대학원 과정에서 생존할 수 있었는지. 내가 무엇에 성공했고, 무엇에 실패했는지 되돌아보려고 한다.






졸업에 대한 얘기를 하려면 내가 다니던 연구실의 졸업 내규부터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우리 연구실은 석사 졸업에 대한 내규가 상당히 힘든 편이었다. 졸업할 때 SCI 논문 한 편을 쓰고 나가야 한다는 게 졸업 조건이었다. 논문을 쓴다는 것은 사실 그 사람이 어떤 분야를 연구하는지, 어느 수준의 저널을 타깃으로 하는지에 따라서 난이도가 천차만별이다. 실제로 분야에 따라서는 1년만 연구로 고생하면 바로 논문 작성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전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기본적으로 많은 양의 실험과 노동이 필요한 분야였다. 게다가 지도 교수님이 진실로 학자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연구의 질을 엄격하게 따지는 편이셨다. 그래서 석박사를 막론하고 졸업하기까지는 아주 아주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그런 노력과 열정과는 상관없이 졸업이 늦어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4학기 차에 교수님께 처음으로 졸업 얘기를 꺼냈고 거절당했다.


https://brunch.co.kr/@e8490ed800e5460/63


한 학기가 생긴 나는 조금 홀가분해졌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리기도 했다. 연구의 퀄리티를 이유로 한 학기 졸업을 미루었다면 한 학기 더 미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2학기 학위 청구 논문 신청은 10월에 있었다. 남은 6개월 동안 실험을 fine tuning 하고 조금씩 다른 결과들을 정리했다가, 다시 엎었다가, 다시 정리하기를 반복했다. 교수님께서는 졸업 전에 적어도 논문을 투고하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일정 상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정작 요청해 오신 교수님께서도 너무너무 일이 많으셨고, 논문 진행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부지기수였다. 애가 타는 건 나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혼자서 manuscript를 작성한다 해도 결국에는 교수님의 검토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지도학생은 불안에 떨었다.






6개월은 짧은 시간이었다. 약속된 10월이 되었지만 교수님께서 학위논문 심사청구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시지 않는 게 아닌가. 논문도 계속 제자리걸음이었다. 진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행정실에서는 졸업 준비자는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하라는 연락이 왔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운명의 때가 온 것이다. 나는 연구실 선배들과 논의 끝에 태연한 척 지도교수님께 연락을 드렸다.


- 교수님, 이번주가 학위청구논문심사 신청기간이라 졸업준비자는 관련 서류를 행정실로 제출해야 한다고 합니다.


논문도 아직 한참 작성 중인 네가 무슨 졸업이냐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지도 교수님으로부터 서류를 검토해 볼 테니 작성한 부분까지 보내달라는 답장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쿨한 답변에 어안이 벙벙하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허무하게 떨어진 졸업 허락이었다.


10월 중순에 나는 그렇게 졸업 준비생이 되었다. 언제든 교수님이 마음을 바꾸면 단숨에 6개월이 늘어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기쁨보다는 새로운 불안함도 생겼다. 그 시기의 나는 마음 같지만은 않은 연구와 졸업 때문에 모든 것에 불신이 가득했다.


그러나, 드디어! 나는 꿈에서만 그리던 졸업을 향하여 첫 발걸음을 떼었다. 디펜스까지는 이제 약 2달. 시계가 째깍째깍 흘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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