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권리'라는 책 제목은 '살 권리'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책 상단 부분에 간간이 보여주는 옛 우표 크기보다 조금 큰 작은 여행지의 사진이 책의 중심이 여행지가 아님을 보여 준다. 책의 두쪽 사이에 끼여있는 노란 작은 원은 삶의 중심을 잃지 말라는 또 다른 표현인지 모른다.
러시아 우스 리스 끄만, 일본의 나고야 하고도 타지 미하 고도 카사라 하, 독일의 밤 베르트에서 프랑크 푸르트,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와 옌지, 중국 지린 셔 룽징과 화뻬이셩 후쟈좡 마을, 서울 그리고 다시 일본 토오꾜오.... 제목만 보면 마치 그곳 여행을 소개하는 책 같지만 실은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들의 이야기지만 읽다 보니 마치 소설책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부분도 있었다. 나라와 시대는 어떻게 보면 한 인간의 삶의 배경이다. 그것은 개인의 존재를 드러내 주는 무대의 배경이다. 삶의 무대에서 한 인간이 그 배경 앞에서 어떻게 존재를 드러내고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 보는 게 나을 듯하다.
러시아 우스리스끄만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이춘대 씨의 삶의 이야기는 순박한 느낌이다. 그는 러시아와 중국을 오가는 거친 삶의 길을 나름 용감하지만 조금은 단순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해삼을 밀매해서 살아가는 이춘대 씨와 김연수 작가의 대화는 마치 시골 장터에서 만나는 장사 노하우가 많은 그런 장사꾼과 도시 손님이 나누는 대화 같다. 삶의 다양성이 존재하기에 세상의 수많은 소리가 정겨워지는 것이다. 그 어떤 오케스라트라 연주보다 사람이 살아가는 소리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다.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삶의 규칙성보다는 골목 밖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무언가 같은 불규칙성이 삶이다.
독일에서 만난 '푸르미'의 맹목적인 짝 사랑 이야기를 통해 전해주는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이 간다. 독일인이라서가 아니라 순수한 이십 대의 고집스러움을 이해할 때 그 사랑의 행위를 더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내가 독일인이 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내가 그 사람의 나이가 되어 보는 일은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능한 일이니까' 그 나이로 돌아가 그때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으로 인생의 같은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어 본다면 상대를 이해하기 쉬워질 것 같다. 결혼 막 해서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나만의 확신이 없던 내 시절처럼 그렇게 좌충 우돌로 살아가는 조카 부부에게 더 따뜻한 시선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보다 이해받기를 더 원할 수 있다는 조지 오웰의 말이 맞을 것 같다. 이해받는 그 따뜻한 시선이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도와주는 힘이 된다. 사랑이라는 말은 이기적 감정일 수 있지만 이해한다는 말은 이타적인 감정이기 때문은 아닐까.
스웨덴으로 입양된 한국인 작가 '아스트리드'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그녀가 쓴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책은 스웨덴에서 제법 팔렸지만 한국에서는 별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녀의 한국 이름은 '박서여'. 한국 이름보다 스웨덴 이름으로 불리기 원하는 그녀는 이야기한다. '문학이란, 언어를 도구로 정체성을 따져 나가는 일이다. 즉, 피로 연대하는 문학이란 없다는 뜻이었다. 피는 물보다 그다지 진하지 않다.' 존재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혼돈해야 하는 삶은 마음의 고요를 수시로 빼앗었을 것 같다. 스웨덴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마음은 그들과 같지만 다른 외모로 그들과 같을 수 없다는 절망감을 겪지 않았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좀 더 크게 보자면 우주인과 지구인의 두 생명체로 나눈 다면 우리는 정말 서로 닮은 똑같은 사람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데.... 시야가 좁아지면 사상의 폭도 좁아진다. 그래서 옛 선인들이 크고 넓게 보는 마음을 이야기하신 것 같다.
독일 밤베르크에 있는 빌라 콘코르디아는 예술가들에게 일 년 정도의 장기체류를 지원한다. 저자 또한 그곳에 3개월 동안 머물며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과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인구 칠만 명이라는 작은 마을이지만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매주 화요일에는 빌라 콘코르디아에서 낭독회나 전시회 난 연주회가 열린다고 한다. 후원자들은 그 행사에 참여한 뒤 밤늦도록 뒤풀이를 한다고 한다. 예술가에 대한 배려가 사람을 불러들인다. 각 도시마다 많은 인구가 안착해 살기를 바라고,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기 위해 지자체의 행사들이 전국 곳곳에 많이 생겨났다. 하지만, 단발 성적인 행사들은 순간 사라지는 불꽃놀이 밖에 될 수 없다. 사시사철 삶의 향기가 피어나는 곳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발성이 아니라 지속성이 필요하고, 한 두 번 이루어지는 행사가 아니라 일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오래가고 문화가 생기고 삶의 질이 변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의 힘은 크다. 미술, 음악 그리고 시가 있는 삶을 어떻게 일상으로 사람들에게 선물할지에 대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피어나길 바래 본다. 삶은 누리는 자의 것이다. 한때 선물 받은 터치 노트북이 불편해 1년 이상을 쓰지 않았었다. 지나고 보니 노트북이 문제가 아니라 사용자인 내 문제였다. 물건 또한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데 신이 주신 삶을 누가 어떻게 현명하게 누리느냐가 더 중요한 일이다. 누리는 삶을 위해 길거리 공연도 보고 싶고, 뮤지컬도 보고 싶고 그림도 배워보고 싶다. 또한, 틈틈이 시도 써보고 싶은 욕심을 일게 한다.
민족주의 대한 저자의 이야기는 최근 내가 느낀 관점과 비슷하다. 민족주의는 국내용 사상이고 지역적 사상이다. 한 민족이라는 단일 민족에 대한 예찬은 오랫동안 들어왔던 노래다. 민족주의는 역사적으로 볼 때 리더들이 종종 타민족에 대한 탄압의 합리화로 사용해온 정신이다. '민족주의는 국내용 사상이므로 국경을 넘어가면 누구나 국제 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이제는 국제 주의자를 꿈꿔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저자가 천재 작가 이상이 마지막으로 살다 간 일본 도코 여행에서 발견한 글을 소개한 내용이 인상 깊다. 1936년 대문호 루신이 사망한 날, 일본 내무성의 자살 통게에 대한 이야기는 놀랍다. 제국주의 시대 한국을 식민지로 중국까지도 넘보는 일본의 지도층이 이끄는 사회에서 일반인들이 중국인 루신이 사망한 날 음독자살을 한 20대 들에 대한 보도는 어떻게 봐야 할까? 저자는 이상이 꿈꾸다가 사라진 도쿄 여행을 통해 그 당시를 살아가던 예술인들의 삶을 보여 주고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이상, 김수영, 김기린, 박인환에 대한 이야기들은 시대의 거대 물결 속에서 예술가로 살아낸 이들의 삶이 왠지 버거워 보인다. 살아내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 낸 이상적 사회로 향하는 불나방이 되어 시대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야만 했던 그 당시의 수많은 문인들의 이야기는 슬프다.
휴게소, 역, 공항에 대한 저자의 마지막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그 공간에 대한 꿈이 보인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서 타인이 되기 위해 거쳐 가는 그곳....... 어떻게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삶을 꿈꾼다. 다른 공간에 대한 동경이 물결이 되어 수시로 일상을 흔들지만 어느 곳이든 정착하면 다시 또 다른 공간을 꿈꾸는 게 삶인 것 같다. 여행할 권리만큼 잘 살 권리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살아있는 최고의 행운을 부여잡은 우리는 그 삶의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작가의 책처럼 마음 한 중앙에 자신만의 노란 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