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정으로 매일 조금씩 읽어 가던 원서다. 드디어 552쪽의 작은 글씨들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읽고 난 뒤 에필로그를 읽어가면서 책을 쓴 작가의 집필 배경을 알 수 있었다. 유년기 시절 작가의 엄마가 독일에서 겪었던 일들을 어려서부터 들려주었고 그 추억들이 글자가 되어 책이 되었다. 암울한 시대를 이번엔 다른 각도에서 지켜본 느낌이다. 1940년대 세계 역사에서 광기가 인류를 정확히 말하자면 독일을 휘감았던 시대 이야기다. 유대인 빅터 플랭클린이 쓴 <죽음의 수용소>는 희생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그 긴 터널 같은 삶을 살아냈는지에 대한 책이라면, 이 책의 주인공들은 가해자의 나라인 독일 소시민의 어지러운 삶을 보여준다. 책은 회색빛이다. 어두운 회색빛이 아니라 밝은 회색빛이다. 읽을수록 글의 매력이 흘러 난다. 다양한 색채의 사랑이 느껴진다.
독특한 건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가 바로 죽음이라는 전령사이다. 무섭고 공포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어릴 적 외할머니 같은 품성이 느껴지는 마음 따뜻한 죽음이다. 첫 소절이 죽음의 화자답다. 'Here is a small fact. You are going to die. 여기 작은 진실이 있다. 당신은 죽을 것이다.'
주인공 Liesel은 남동생과 함께 Hubermanns댁에 입양 보내지기 위해 기차를 타고 이동 중이다. 첫 이야기로 죽음의 전령사는 그녀의 동생을 품에 앉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동생을 차가운 땅속으로 보내는 과정 중에 리젤은 묘지 담당자들의 메뉴엘 책을 처음으로 훔친다.
그녀의 입양 아버지인 Hans의 배려와 사랑이 엄마와 떨어지고, 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리젤에게 삶을 다시 밝게 바라볼 수 있는 긍정성을 심어준다. 단, 한 명의 어른이 필요하다. 슬픔을 극복하고 어린 새싹이 세상을 위해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그 단 한 명의 사랑이 삶을 제대로 살아갈 힘을 준다고 한다. 리젤의 양 엄마 Rosa는 억척스럽고 말이 거친 여성이다. 마치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정성 어린 식사를 편안하고 맛있게 할 수 있듯이 로사의 거친 말들은 상처가 아니라 그녀만의 또 다른 애정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양부모의 사랑의 색인 한스의 따스한 노란빛과 로사의 거친 붉은빛이 상처 입은 리젤에게 아늑한 가정이라는 공간을 제공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리젤이 입양된 집은 작지만 옹기종기 소시민들이 살아가며 삶의 소리를 요란하게 뱉어내는 곳이다. 그녀의 집 앞 거리의 이름이 Himmel이다. 영어로 말하자면 Heaven(천국)이다. 죽음의 전령사와 잘 어울리는 거리 이름이다. 책 중간중간에 굵고 조금 큰 글자로 설명이 들어가 있어 읽어가면서 왠지 모를 배려가 느껴진다. 죽음이라는 이야기 전달자의 친절한 손길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글자를 읽지 못해 학교의 낯선 생활은 그녀를 주눅 들게 만든다. 밤마다 침대에 실례를 할 만큼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한 그녀에게 아빠 한스는 리젤이 훔쳐온 묘지 관리책을 읽어 준다. 한 밤중에 묘지 관리 메뉴엘 책을 읽어 주는 아빠 한스와 그리고 새벽부터 아코디언 연주를 하는 남편 한스에게 엄마 로사의 고함은 정겹다.
리젤의 이웃집 남자아이 Rudy의 존재는 푸른빛이다. 동갑내기 친구로 리젤을 좋아한다. 동네 빈터에서 함께 축구를 하는 꼬맹이들의 놀이가 어른들이 만든 암울한 시대를 가볍고 경쾌하게 아이들 방식으로 살아내는 법을 보여 준다. 루디의 작은 목표 중 하나가 리젤에게 뽀뽀를 받는 것이다. 그 소망이 죽고 난 후 차가워진 그의 입술에 리젤이 마지막 작별 선물로 준다.
유대인 Max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독일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고,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그들을 세상에서 퇴장시키기 위한 히틀러의 계획이 무모해 보이지만 서서히 소시민들의 생각을 점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Summer came. For the book thief, everything was going nicely. For me, the sky was the color of Jews. 여름이 왔다. 책도둑(리젤)에게 모든 것이 잘 지나가고 있었다. 나에게는 하늘이 유대인의 색이다.'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유대인들의 영혼을 따뜻하게 앉아 하늘로 데리고 가는 죽음의 독백이다. 유대인 맥스 아버지 때문에 목숨을 구한 리젤의 아버지 한스는 맥스를 그들의 지하실에 숨겨준다. 당시, 유대인을 숨겨준 독일 인들도 심한 처벌을 받는 상황이었다. 지하실에서 숨어 사는 멕스를 보며 생각해본다. 만약 나라면 숨겨 줄 수 있을 까? 반대로 만약 내가 유대인이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길거리에서 넝마 조각을 걸치고 마치 유령처럼 행진하는 유대인에게 빵을 주고 채찍을 맞는 한스를 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떤 권리로 어떤 원리가 사람을 짐승 다루듯이 행해지는 행위를 정당화했을까? '나만 아니면 된다'라는 비겁자에게 합리화를 만들어 준 그 시대의 색이 무서울 따름이다.
천사와 악마의 본성이 함께 공존하는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는 게 맞을까? 젊고 활기 넘치는 맥스가 지하실에 숨어 지내며 리젤 생일 선물로 그려준 책들이 인상 깊다. 그리고 결국, 리젤 가족의 안전을 위해 떠나며 그가 써서 남기고 간 책도 인상 깊다. 사람들을 공장에서 나오는 물건처럼 그들의 사상을 똑같이 만들어 내는 나치당에 대한 묘사가 섬뜩하다. 생각을 점령당하는 것은 위험하다. 개개인의 존엄성이 사라지고 수많은 같은 물건 중 하나로 전락되어 한 사람을 제거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리라.
광장에 수만 권의 책을 쌓아두고 태우는 장면의 묘사가 가슴 아프다.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책이 불필요한 존재임을 알고 있는 나치당은 책을 불태운다. 진시황도 그러했듯이 독재자가 자신의 무소불휘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 책을 불태우는 의식을 행했다. 불타는 책들 중에서 리젤은 다시 책을 훔친다. 사라져 가는 책들 속에서 아직 타지 않은 책들을 가슴속에 숨겨 집으로 가져온 그녀에게 어느덧 책을 훔치는 일이 마치 의식 같은 느낌을 준다. 시장 부인 집에 엄마가 다해 둔 빨랫감을 가져다주고 가져오는 일을 하던 리젤은 그 집 서재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을 갖는다. 하지만, 시장 부인이 더 이상 빨랫감을 맞기지 않는 상황이 되자 그녀는 친구 루디와 과감하게 책을 한 권씩 훔쳐 나온다. 후에 그 집 안주인이 그녀를 위해 서재 창문을 잠그지 않았고, 또한 정중하게 문을 열고 와서 빌려 가라는 말은 차갑게만 느껴졌던 그녀의 따뜻함이 보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아빠 한스도 군인으로서가 아닌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여러 곳을 처리하고 치워야 하는 임무로 리젤을 떠난다. 밤에 폭격이 시작되면 지정된 지하실로 시민들이 대피를 하면서 공포로 우는 아이들을 위해 리젤은 책을 읽어 준다. 리젤이 읽어주는 책 내용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아이나 어른할 것 없이 폭풍 같은 바다가 잔잔한 호수로 변하는 고요함을 느끼게 된다.
훔쳐온 책들이 리젤에게는 영감이 되고, 그 말들로 그녀만의 책을 쓰기 시작한다. 유대인 맥스가 머물고 간 지하실에서 훔쳐온 글자들로 그녀만의 책을 쓰던 어느 날 밤 갑작스러운 폭격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의 전량사의 품에 안겨 하늘로 향하게 된다. 오직 홀로 살아남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진행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죽음의 전령사는 이야기한다. 노인이 된 리젤의 영혼을 자신의 품 안으로 감싸 앉으며, 그녀의 아빠 한스처럼 조용하게 앉아 있는 그녀의 평온함을 보여 준다. 'I should tell you that the book thief died only yesterday. Like her papa, her sould was sitting up. 바로 어제 책 도둑이 죽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녀의 아빠처럼 그녀의 영혼은 곧게 앉아 있다.'
죽음의 전령사의 마지막 말이 인상 깊다. ' A last note from your narrator. I am haunted by humans. 화자로서 마지막 말이다. 나는 인간들에게 시달리고 있다.' 수많은 영혼들을 하늘나라로 안겨 올리는 그의 일이 참으로 버거운 시대를 겪어 왔고 아직도 그 일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말 같다. 세계의 3분의 1이 아직도 전쟁 중이다. 이념과 사상의 차이로 또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인명들이 죽음의 전령사 품 안에서 하늘로 향하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불합리한 삶의 진실들을 후손들에게 전할 것인가. 큰 숙제가 남는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돕는 게 선배 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소명이 아닐까. 세상은 다채로운 색깔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어두운 그림자가 삶에 끼어들 때 우리는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깊이감 있는 소설을 만나는 것은 마치 인생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과 같다. 좋은 인연을 맺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