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책 제목은 '그림 그리는 할머니, 김두엽입니다.'이다. 83세 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녀는 94세에 이 책을 세상에 내려놓으셨다. 자신의 이름 앞에 어떤 문구를 넣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이 들어 감에 따라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는 것도 흔하지 않은 일이고 그것도 자신의 이름 앞에 화가라는 호칭은 더욱 드문 일이다. 찬란한 인생을 드디어 제대로 보신 분 같다. 우리는 들고 있을 때는 모른다. 그저 삶의 연장선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 순간 지금인 것이다. 김두엽 할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되찾도록 도와 준건 단연 그림이다. 그녀의 그림은 색채가 선명하다. 특히, 꽃을 표현한 그림들은 유난히 사람 마음을 행복하게 해 준다.
책들 사이로 펼쳐지는 그녀의 그림들은 위안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힘들고 고생스럽더라도 삶은 그 만한 가치가 있고 살아갈 만하다는 것을.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진 천진난만했던 우리의 어린 시절의 감성을 깨워 주기도 한다. 글쓰기만큼 그림도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다. 멀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미술 세계의 문턱을 쉽게 드나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고 낮아진 문턱을 넘어서고 싶게 만든다. 화가 김두엽 할머니의 생이 궁금했다. 어떤 인생의 여정을 걸으셨을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품어 나오는 그림들을 보며 삶에 대한 긍정성 그리고 단순하게 현 삶을 바라보는 마음까지 보인다. 나이 들어가며'동안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동심을 잃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는 책 중 말에 공감이 많이 간다. 육체가 서서히 닳아가듯 신을 닮은 호기심과 상상력을 가진 우리의 영혼이 깊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그 잠든 본성을 깨워나가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그녀의 책을 통해 얻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태어나 18살까지 일본에서 살다가 부모를 따라 한국말도 못 하는 상태로 귀국해서 결혼하고 8남매를 키워낸 한 여성의 삶은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이다. 시대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삶을 살았지만 그녀의 깊은 영혼 속에 잠든 맑고 깨끗한 자아를 깨워준 게 그림이다. 우리에게는 신이 주신 선물이 숨겨져 있다. 그건 나이에 상관없다. 단지, 그 숨겨진 재능을 찾아내는 것이 나이 들어가면서 받아 든 숙제이다. 오래 살았다는 것은 잃어버린 그 재능을 더 오랫동안 찾아왔다는 것은 아닐까. 긴 시간과 인내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드물다. 목표를 정하고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간다면 비록 내일 죽음의 문이 우리를 기다릴지라도 화려하게 존재의 날깨를 펼쳐보는 행복감을 맛볼 것 같다.
노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갑자기 많아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이다. 복권처럼 갑자기 생긴 돈은 복이 아니라 화가 될 수 있듯, 갑자기 한가해지는 삶의 시간도 영혼의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그 주어진 시간의 공간 속에서 집중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바짝 다가선 죽음의 불청객도 잠시 잊게 할 것이다.
그녀의 책은 동화 읽듯이 일독할 수 있다. 책장 가득한 그녀의 동심을 보다 보면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한 지나친 무게감이 없어도 됨을 알려준다. 가볍게 내려 두고 자신 안에 잠들어 있는 어린 영혼을 흔들어 깨워 보는 것이 살아가면서 한번 정도는 해봐야 할 용기다. 그녀의 아들도 화가다. 그녀가 무심히 그린 사과 그림을 보고 '내가 어머니를 닮아 그림을 잘 그리나 봅니다.'라는 칭찬의 말이 그녀의 잠들어 있던 어린 영혼을 깨우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엄마의 그림은 단순하지만 밝은 색채를 뛰고 있고, 아들의 그림은 따뜻하지만 섬세한 붓끝이 느껴진다. 특히, 아들 이현영 화가가 입상했던 작품 '강아지들'그림은 따뜻함이 묻어 난다. 모자가 함께 같은 주제인 해바라기를 그린 그림이 인상 깊다. 같은 소재를 가지고 생활 가치관이 닮아있는 아들과 어머니가 바라보는 그림 속 해바라기들은 다르다. 아들의 해바라기는 고흐를 닮은 색채가 느껴져서 그런지 쓸쓸한 삶을 극복하고픈 작은 소망이 느껴진다. 반면, 어머니 김두엽 화가의 해바라기들은 오손도손 옹기 종기 설키고 즐거워하는 시종일관 떠들어 대는 유치원생들이 연상된다. 고민도 없고 존재하는 그 시간에 친구들과 마냥 행복에 들떠 있는 그런 천진난만함이 느껴진다.
삶이라는 커다란 선물 앞에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잘 사용하고 있는가.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즐겁게 하라는 처칠의 말이 우리에게 필요한 조언이다. 화가 김두엽 할머니는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나이와 외모에서 오는 세월의 무게를 잠시 내려 두고 오로시 내 안의 잠든 아이를 깨워보라고 이야기 하는 듯 하다. 그 어떤 일보다 자신을 만나는 일만큼 소중한 인연은 없다. 내가 나를 만날 때 우리는 힘을 얻는다. 혼자 걷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잠든 영원한 나의 지지자와 함께하는 여행은 그 어떤 멘토보다 강하게 우리가 가진 삶이라는 보물을 누리는 방법을 알게 해 줄 것 같다. 김두엽 할머니의 따뜻하고 소박한 그림이 좋다. 그녀의 나이 들어감이 보이지 않아 더 좋다. 그녀는 제2의 삶을 어린 그녀의 자아와 함께 시작한 것 같다. 나의 이모님이 살고 계신 광양에 화가의 작품이 전시된 '갤러리 엠(M)'에 그녀의 순수한 영혼을 만나러 가야겠다.
누려야 내 것이다.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관찰해야 한다. 부지런히 나를 옮겨주는 두발과 몸 끝에 나를 안아주는 두 손은 쉴 새 없이 나를 위해 열일을 해주고 있다. 내 몸 머리 위에 최고 사령관 뇌는 하루에도 수십 가지 일들을 잘 처리하도록 나를 이끌어 준다. 가진 것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후회하지 않을 지에 대한 '인생 사용 설명서' 같은 책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