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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권 독서

[버리고 덜어내고 닦고 나누기]- 경성 스님

by 조윤효

가끔 궁금했다. 속세의 모든 것들과 자신을 겪리 시키고 신과 남은 삶을 보내는 스님이나 수녀님들의 마음이. 대학 친구도 여전히 비구니로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불교라는 종교를 자기 수양의 학문으로 공부해 보는 것도 괜찮다는 오빠의 말 때문에 마음에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우연히 중고 서적에서 나의 품으로 들어온 책이다. 넉넉한 여백들이 책장을 쉽게 넘기게 도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인생처럼 예측할 수 없는 난관들이 많았다. 낯선 어휘들이 시선을 묶어두었지만 읽으면서 삶의 유한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고, 인간의 탐욕과 번뇌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얻었다.


마음을 닦고, 마음을 기울여서 보고 듣는 것이 바로 ‘관심’이라고 한다. 주의의 모든 환경과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생각조차도 닦고, 마음을 기울여서 보고 듣는 관심이 필요하다. 모든 중생과 모든 생명을 부처로 여기고 부처로 대접하는 불안(부처님 경지의 안목) 또한 삶을 평화롭게 할 것 같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음식, 의복, 처소를 만들어낸 모든 사람들의 정성과 노고를 기억하는 것을 필두로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은혜와 감사의 마음을 갖고 바라보고 생활하는 것이 마음의 평안을 준다는 경성 스님의 말씀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이 순화되고 삶을 향상하며, 삶의 진정한 안목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군인인 오빠는 여전히 불경 공부를 많이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에게는 강한 이미지보다는 넉넉하고 따사로운 인품이 느껴진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양심을 선근이라고 한다. 학생 시절에는 도덕시간이 있었지만 학교 밖에서는 스스로 선근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생활해야 도리에 벗어나는 일이 없을 듯하다.


‘타인의 이익을 위해 살고 있느냐? 내 존재가 세상에 보탬이 되느냐?’라는 소제목을 보며 스스로 자문해 본다. 과연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조금이나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는가. 온통 개인적 욕심과 목표만 들고서 달려가는 건 아닌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 정신보다 더 큰 개념인 요익 유정(넉넉하게 인간은 물론 모든 생명을 지닌 존재까지 이롭게 하는 정신)의 정신을 강조하는 게 불교다.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기중심적 사고와 가치관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타인을 향해 무한정으로 확대하고 넓혀 갈 때 완전하고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완성된 삶에 대한 희망이 조용하게 내 앉아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모든 생명과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제행무상’의 개념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걱정과 근심이 없지만 위험과 위기가 언제든 올 수 있다는 ‘안이 불망 위’, 부모와 친지가 생존해 계시지만 곧 돌아가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존이 불망망’ 그리고 집안이 잘 다스려지고 관리되고 있지만 어지러워질 수 있다는 ‘치이 불망난’을 잊지 않고 대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또한, 지금 내가 처한 어려운 상황이 오직 나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보편적 상황이라는 인식은 위기와 상실, 혼란을 뛰어넘게 하는 용기와 의지를 준다고 한다.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힘이 삶의 가치를 소중하게 느끼게 해 줄 것이다. 나와 만민의 안락과 안정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상대를 위하고 배려하는 것이 결국 또 다른 나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양상과 다르지 않다는 ‘만민 함락’의 정신도 진정한 가피와 가오가 우리 마음에서 발생함을 알려 준다.


자연계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면 부처님의 법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모든 존재와 생명들 사이에서 부처를 친견할 수 있다고 하니 어찌 사사로이 자연을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송나라 학자 주신 중의 인생오계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먹고 사는 것과 자연과 물질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생계’, 병과 부정으로 부터 몸을 보존하는 ‘신계’, 집안을 편안하게 꾸려 나가는 계획인 ‘가계’, 노후 준비를 하는 ‘노계’,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계획인 ‘사계’를 계획할 수 있어야 함을 느낀다.


중생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의미인 ‘대자’와 중생의 고통을 제거해 준다는 의미인 ‘대비’의 마음으로 자비로움을 실천함으로써 존재의 의미와 이유를 드러내고 확대할 수 있다고 한다. 엄마가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라는 표현을 쓰시며 기도 하셨었는데 이제야 그 의미를 이해했다. 불교 수행의 중요한 덕목인 자비(타인 존중), 지혜(자기 계발과 자기 수련을 통해 자아를 완성하는 것), 원력(꿈, 소망, 소원, 희망을 갖는 마음)을 통해 사람다운 품위와 인격을 갖게 될 것 같다. 자신의 깨달음을 사회화해서 깨달음을 사회로 구현하고 전개하는 것이 자비로운 마음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바세계’를 견디고 인내하는 장소로 복을 짓기 좋은 곳이며 복을 지을 수 있는 대상과 환경이 있는 곳으로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절이나 교회에 가서 복을 달라 요청하지 말고, 스스로 복 짓는 행동을 통해 복을 만들 수 있다. 만복의 원천이 되는 것이 ‘효성’이라고 한다. 부모에 대한 감사가 만복의 원천이 된다는 말에 왜 우리 선조들이 명당자리를 꼽을 때 자손들이 ‘효도’하는 기를 가진 곳을 뽑았는지 알 것 같다. 복을 짓는 행동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자문해 봐야 한다.


평소에 보고 듣는 것을 가벼이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견문위종’이라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과거의 경험을 살피어 성숙해지면 미래의 활력과 희망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한다. 현재의 안정과 평온은 참회로 가능하게 되고, 미래의 이익과 안락인 꿈과 소망은 기도로 실현된다고 한다. 안락하고 이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참회와 기도가 생활 속에 자리 잡게 해야 할 것 같다. 또한 자신에게 가해지는 불이익이나 괴롭힘도 근본 원인은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임을 자각할 때 조금 더 의연하게 어려움을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입은 재앙과 근심의 문이라는 ‘구시화문’은 중학시절 미술선생님이 실세 없이 재잘되던 여중생들에게 알려 주었던 문구다. 소통과 교감을 이루고 싶다면 침묵하라는 경성 스님의 말씀이 그 옛날 스승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공자 또한 존재하는 그 자체로 지혜를 일깨우는 자연의 소리를 듣고자 한다면 침묵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들이 묵언 수행을 자연 속에서 행하심을 알 것 같다.


미국인 나자레 수녀님에 대한 이야기는 인상 깊다. 이탈리아 수도원으로 들어가 44년 동안 한 방 안에서 기도로 인생을 마감하셨다. 그녀는 딱 두 가지 소원을 비셨다고 한다. 교회가 위기를 극복하고 잘 나아가길 바라셨고 그녀의 기도가 시작될 무렵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하던 시점이라 한국의 안정과 행복을 기도하셨다고 한다. 그녀의 기도 덕분에 지금 우리가 편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일생의 기나긴 시간으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결국에는 왔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한바탕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싶다’라는 스님의 말씀이 울림이 되어 어떤 마음의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깨닫게 해 주신다. 자비와 지혜 그리고 원력을 갖고 주신 삶을 한바탕 잘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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