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을 내는 철학]- 황진규
안갯속 같은 철학의 세계를 햇살로 비추어 주는 책 같다. 철학이라는 주제 자체가 쉽지 않아 이야기 형식으로 접근하려는 책들이 제법 있다. 하지만, 저자의 책은 굳이 이야기를 동원하지 않아도 명쾌하게 철학적 진실을 알려 준다. 글을 쓰고 난 후 10년 뒤 다시 가다듬어서 그런지 ‘화룡점점’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 눈동자를 찍고 나니 완벽한 작품이 완성되듯이 저자의 책은 완성품 같은 느낌을 준다.
읽으면서 욕심이 나는 책이다. 철학이 어떻게 우리 삶과 내 생각에 영향을 주는지 느낄 수 있어 그 지식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남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무엇을 믿으면서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저자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으면서 조금 더 행복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철학을 믿고 나서야 더 행복해졌다고 한다. 믿음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당연 행복할 것이다. 그 믿음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의 결이 달라진다. 그래서 저자는 이야기한다. 철학은 믿음의 학문이라고. 철학을 사랑할 때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매혹적인 철학사의 만남을 주선하고, 사랑에 빠지게 한 소개팅 주선자인 저자의 의도가 성공했다.
책은 욕망, 사랑, 성찰, 자유 그리고 공존이라는 주제로 스피노자, 벤야민, 사르트르, 라캉, 레비나스, 바디우, 베트겐슈타인, 드보르, 프로이트, 칸트, 아렌트, 메들로 퐁티, 장자, 베르그송, 니체, 푸코, 마르크스, 루소, 르라스트르, 슈미트, 바티유 같은 철학자들의 생각을 깔끔하게 전달해 준다. 철학이 이렇게 명쾌한 학문인지 미처 몰랐었다. 수년간 철학 공부에 빠질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앎의 발견은 마치 금맥을 찾아내는 듯한 기쁨을 주었을 것 같다.
스피노자를 통해 ‘나는 무엇을 잘하는 사람일까’에 대한 답을 찾는 법을 안내해 준다. 재능이란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정신과 관련된 부분이 아니라 신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어 재능을 찾을 수 없다. 생각을 멈추고 몸으로 부딪쳐 보라는 조언이다. 욕망과 재능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있어, 신체가 기쁨을 느끼는 일을 쫓는 과정에서 재능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온몸으로 기쁨이 느껴진다면 그게 재능이다.
재능을 찾고 싶은 욕망에 이어 행복에 대한 벤야민의 철학도 기억에 남는다. 진정한 행복은 행복과 불행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이다. 행복한 순간에도 불행은 겹쳐져 있고, 불행한 순간에도 행복이 스쳐지나간다고 한다. 행, 불행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가 없다. 삶의 사계절에서 비가 오기도 하고, 맑은 하늘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면 된다. 맑은 날만 기대하는 그 욕망이 비바람을 몰고 오는 구름을 만들 것이다.
‘행복은 자신이 누구인지 충분히 아는 상태다.’ 저자의 행복 정의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사르트르는 즐거움, 좋음, 근사함을 따라 자신의 본질을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하라고 조언한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암, 옳음, 훌륭한 것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인간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이라 칭한 라캉의 이야기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지금의 ‘나’는 내가 20년 동안 만난 타자의 합이라는 말도 신선한 충격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듯이 앞으로 내가 맞이할 미래의 모습은 지금 내가 어떤 타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책을 통해 만나는 만남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바꾸는 방법으로 거부할 수 없는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를 맺고 사랑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래를 바꾸고자 한다면 사랑하면 된다. 일을 사랑하고, 주위의 사람을 사랑하고, 책을 통해 만나는 그 지식들을 사랑할 때 내가 바뀌고, 내 삶이 변하고 결국, 미래가 달라지는 것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이라는 바디우의 사랑론도 의미가 깊다. 사랑하면서 하나가 되려고 하거나 혹은 ‘셋’이 되려는 이기심이 사랑의 적이 된다고 한다. 두 사람 외에 상대에게 또 다른 것을 기대하는 그 욕심이 자리할 때 이미 사랑은 그 자리를 잃는다. 조건을 따지는 사랑에 대한 일침 같다.
그림처럼 표현할 수 있는 언어 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라 칭하는 비트게인 슈타인의 대화에 대한 철학도 공감이 간다. ‘말할 수 없는 것’까지 떠드는 이유가 습관과 허영 때문이라고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서는 침묵을 지키라는 조언이다. ‘아름다운 사람은 그 침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삶으로 보여 준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꿈꾸게 만든다.
삶을 방관하는 구경꾼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현실을 드보르는 이야기한다. ‘매체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이미지를 더 많이 구경하면 할수록 삶을 더 적게 살 수밖에 없다.’ 시시각각 나타나는 스펙태클한 다양한 정보와 온라인 속 떠들썩한 소식들을 접하다 보면 어느 순간 구경꾼이 되어 내 삶을 살아갈 시간을 잃게 될 수 있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비합리성이 우리의 평범함이라 칭하는 프로이트의 철학이다. 본능적인 이드와, 사회적 규범으로 규정되는 나인 초자아, 그리고 그들 사이의 충돌을 완화하고 절충해 주는 과정을 통해 자아가 만들어진다. 초자아 때문에 평범한 우리가 비합리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정치 견해가 나에게 이로움에도 불구하고, 기존 매체를 통해 초자아에 새겨진 보수성이 비합리적 선택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성의 결핍이 아니라 결단력(용기)의 결핍으로 미성숙에 머문다고 이야기 한 칸드는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는 지식만을 알려고 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앎은 두렵다.’라고 이야기한다.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지성은 결단력과 용기를 갖추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
아렌트의 ‘악의 보편성’은 익히 들어온 사상이다. 아이히만의 죄를 어리석음이 아니라 ‘철저한 무사유’에 대한 죄라고 평한 아렌트 또한 유대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무사유가 유대인 학살을 불러왔음을 이야기한다. 인간 이기심은 타인에 대한 공감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짐승과 악마의 당당함은 공감의 부재임을 알 것 같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가 ‘사유’라는 것이다.
인간존재 자체가 이미 폭력적이라고 이야기하는 메를로폴더의 이야기도 공감이 간다. 생존을 위해 동물을 먹고, 식물을 먹는 인간은 이미 폭력적이다. 하지만 더 작은 폭력과 인간적인 폭력을 통해 삶은 나아진다. 어쩔 수 없이 먹지만, 최소한으로 낭비하지 않은 선에서 섭취하는 작은 폭력과, 더 큰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인간적인 폭력을 선택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나의 길이 이미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생기는 우울증에 대한 해법으로 장자의 철학은 약이 된다. 자신이 결단해서 온몸으로 밀고 나갈 때 만들어지는 길이 바로 자신의 길이고 답이다는 것이다. 숲을 반복해서 걸으면, 그것이 길이 된다. 지금 내 길이 아닌 길을 걸어갈 때, 진짜 나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은 적게 하고 행동은 많이 하라는 베르그송의 철학도 합리적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내려두고 행복해지는 법으로 본성대로 살면 된다고 한다. 우리의 본성은 뇌에 있는 게 아니라 몸에 있다. ‘인간은 동물로서 생각하는 존재다.’ 머물 수 있는 집이 있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잘 산다는 것은 몸을 쓰며 산다는 것이다.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선악의 기준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회적 기준은 타인의 삶을 살게 하지만, 좋고 싫음으로 살아가는 개인적 기준은 자신의 삶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는 니첼의 철학도 일리가 있다.
권력이 우리 신체에 집요하게 새겨 넣은 ‘생체 권력’의 결과로 자발적 복종을 이야기하는 푸코의 철학은 그 벗어날 수 있는 길도 안내한다. 우리 내면에서 권력의 지배에 길들여지지 않은 부분을 찾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부와 빈자의 기준을 이야기한 마르크스 사상도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돈의 양이 아니라 시간의 양인 ‘가처분의 시간’이 부의 실질적 모습이다. 경제적인 부가 아니라 필요한 노동 시간 외에 가처분 시간이 많은 실질적인 부에 신경을 써야 함을 알 것 같다. ‘경제적인 부자가 되려고 애를 쓰느라 실질적인 부를 낭비하며, 실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된다.’ 경제적 부를 조금 양보하고, 실질적인 부를 더 많이 가지려 애를 써야 한다. 루소의 조언 데로, 돈의 사회에서 돈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돈을 매개하지 않는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임을 알 것 같다.
경제적 문제를 경제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말고 정치적 문제로 눈을 돌리라고 한 클라스트르이야기도 날카로운 해석이다. 정치적 관계를 통해 등장한 권력자는 경제적 관계에서 크고 작은 착취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나라는 경제 문제는 언제나 우리라는 정치문제 속에 속해 있음을 알 것 같다. ‘나의 경제적 문제에 쫓겨 우리의 정치적 문제를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시지프스의 운명에 놓이게 된다.’
철학을 통해 사고를 진단하고, 삶을 보는 눈을 키울 수 있다. 철학자들의 날카로운 사상이 개개인에게 자신 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