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국 인문 기행]- 서경식
‘여행은 거주지를 찾아 헤매는 방랑과 같다’ 저자의 서두글이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는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와 여행자들 그리고 불법체류자가 많은 나라다. 백인, 흑인, 황인종들이 유독 많이 섞인 나라이기도하다. 그곳을 왕복한 세 번의 시간, 1986년, 2016년, 2019~2020년의 이야기다.
뉴욕, 워싱턴 D.C, 디트로이트 그리고 선한 미국과 악한 미국의 이야기가 흑백 사진처럼 조용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전체 책의 왼쪽 페이지는 미술관이나, 그곳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다. 간혹 텅 빈 지면은 저자의 못다 한 사색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책의 최종판이 2023년 12월 17일에 나왔고, 그다음 날 ‘저자가 영면하셨다’는 옮긴이의 소개글 때문일 것이다.
제일 조선인 2세인 저자의 미국 첫 방문은 80년대다. 여행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인권 단체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조작된 ‘제일 조선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한국에서 유학 중이던 두 형이 수감 중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있는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 아래 표적이 된 두 형을 돕고자 방문한 것이다. 그 시절 써두었던 글들과, 잘 통하지 않은 말과, 위로받을 곳을 찾아 방문한 미술관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책은 무게감이 있다. 세계 곳곳에서 자국의 독재자가 자행한 인권유린을 알리고 도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찾아간다고 한다. 절박한 심정으로 미국을 찾았을 때, 마음의 위안을 주었던 곳이 미술관이었다고 한다.
60대의 저자가 30대의 자신을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젊다고 해서 반드시 즐겁고 기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일에 어쩐지 어색하고 미숙하며, 가시가 돋쳐 있으며, 더할 나위 없이 고독하다.’ 30년 전에 광기와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던 저자의 가슴 시린 마음이 전해온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수틴의 초상>과 에드워드 호퍼의 <나이트 호크스>의 그림은 왠지 모를 지친 인간의 마음이 보인다.
1974년 ‘국가 보안법 위반’ 혐으로 23명이 체포되고, 8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18시간 만에 다음날 사형 집행이 된 한국. 야당의 유력한 정치가가 미국으로 추방되고, 다시 1983년 차기 대통령 선거를 위해 필리핀으로 귀국한 ‘아노키’라는 정치인은 자신의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3명의 군인에 의해 여러 사람이 보고 있는 대낮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억울한 정치범 8명을 순식간에 처형해 버리는 행위나 야당 정치가를 공항에서 사살하는 행위와도 어딘가 통한다.’
조지 벨로스의 <이 클럽의 두 회원>의 그림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이 권투를 하고, 링 밖에서 광기 어린 관객들의 얼굴은 인간의 잔인성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잘 사는 미국이지만, 여전히 소외계층이 존재한다. 조지 벨로스와 에드워드 호파는 20세기 초반 뉴욕의 변두리와 노동자 계급 사람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저자에게 위로를 준 것 같다.
디트로이트 우에노 미술관을 다시 찾고, 현재와 과거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을 조우하는 저자의 여행을 뒤따라 걷게 된다. 중학생 시절 혼자 사복을 입고 수학여행을 갔던 저자는 자발적 고립감을 느낀다. 혼자 한국인이었고, 학교 선생님의 사복 허용을 듣고 입었으나 일본 학생들은 모두 교복 차림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부담 없이 혼다 오하라 미술관에 들어가서 그림을 감상했다고 한다. 그 그림들이 저자의 마음에 지워질 수 없는 무언가를 새겼다고 한다. <어릿광대>, <알프스의 한낮> 그리고 <수태 고지> 같은 그림이 십 대의 감수성과 고독감 그리고 이방인이라는 감정과 섞여 강한 인상을 남겼을 것 같다.
포드사 안에 그려진 자동차 산업에 바치는 오마주 그림 <디트로이트 산업>은 좌익 화가 디에고 리베라가 그렸다. 좌익 화가가 미국 자본가에게 받아들여진 이유가 국가를 초월한 관대한 이해심을 보여주기 위한 마음과 자본주의 심장 부위에 자신의 예술관을 침투할 기회로 생각한 예술가의 마음이 만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공감이 간다.
대재앙은 역병만이 아니라 자기 중심주의의 불관용 정신과 파시즘 같은 사상의 대두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코스타리카의 이라수 화산 가는 길에 ‘죽음의 산’ 사진은 인상 깊다. 주로 자메이카에서 건너온 흑인들이 파나마로 통하는 도로 건설에 동원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쓰고 그리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복잡하고 곤란한 상황 속에서 인간을 다시 바라보게끔 하는 정신적 행위이다.’ 미국의 9.11 테러 이후 로라 페이트러스의 작품 <베드다운 로케이션>은 단지 당한 나라의 입장만이 아니라 미국이 행했던 잘못도 보여준다. 천장에 설치된 영상 작품을 관객은 누워서 본다. 미국인들의 공포와 슬픔이 화면 가득히 나오고, 다음으로 미국 병사가 헛간으로 한 남자를 데리고 가서 무릎 꿇게 하고 ‘너 알케이다지?’라는 질문으로 총을 겨누면서 협박하는 흑백 영상까지 보여 준다. 저자의 말처럼 미국이라는 나라는 이런 부분 때문에 기대할 측면이 있다고 한다. 저자의 말처럼 지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이다.
저자의 책은 벤샨이라는 화가와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문학 비평가 ‘사이드’에 대한 이야기로 상당 부분의 지면을 할애한다. 슬픔이나 노여움 같은 감정을 따뜻하게 전하는 벤샨의 그림들도 기억에 남는다. 세계 대전 이후 시작된 불황과 ‘빨강이 사냥’의 광풍경 그리고 이민자의 급증과 전통적 아메리카 수호라는 사회적 감정의 희생자들인 사코와 반제티의 이야기를 전한다. 영화뿐만 아니라 <사코와 반제티>의 이야기가 벤샨의 그림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예술가는 항상 오만함에 맞서는 기개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한 모멸의 태도를 갖춘 자이다.’ 내부 타자의 시선으로 ‘중심부’의 독선을 선명하게 비판할 수 있는 자도 예술가임을 느끼게 해 준다. 팔레스타인인 사이드가 바라본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지를 얻어 자신들의 국가적 이익만을 위해 민간인을 언제든 학살하는 민족으로 본다. 사이드의 ‘실향’ 즉 돌아갈 곳 없는 상태가, 저자의 상태와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완전한 생활터전이 있는 곳에서 자신의 본국으로 갈 수 없는 상태는 이민자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무게감이리라. ‘귀환할 곳이 없으므로 영원히 추방된 것으로 비유될 수도 있다.’
‘국가나 정치 세력은 대중을 정서적으로 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해 미디어를 이용하여 이런 식의 천박한 단죄가 횡행하게 끔 한다. ‘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정의하게 하고, 이를 스스로 증명하고 부응하기 위해 천박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9.11 메모리얼 관을 관람하면서 저자가 느끼는 성찰은 깊다.
‘국가가 주도하는 추도 시설에는 흔한 경우겠지만, 피해자를 향해 일반적으로 갖는 동정심이나 피해자와의 무비판적 동일시를 통해 자기를 긍정하려는 심리를 이용하여, 정서적으로 자국민 이야기 속으로 몰아가는 장치로 기능하는 듯 느껴졌다. ‘
사이드의 말이 진한 울림을 준다. 테러 방지에 필요한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인내와 교육’이다.
저자는 마지막 글에 자신이 바라본 세계를 이야기한다. 70년이 넘게 살아오는 동안 세계 각지에서 전쟁이 멈춘 시기는 없었다는 것이다. 인권이 국익을 위한 자원으로도 둔갑하는 세상을 바라보며,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게 위해’ 글을 쓴 저자. 전쟁이 없는 세계에서 평화롭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지구촌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