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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새 Oct 24. 2024

말라게따 해변과 고래

12.02.23 스페인 말라가에서

해변 달리기, 1908, 호아킨 소로야


커다란 고래가 죽어 있다.


살면서 본 생명체 중에 가장 컸다.

분명 오전에 왔을 때는 없었는데.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 아래 반짝이다 못해 번쩍이는 바다. 걱정 근심 없이 파도를 타는 서퍼들. 그리고 모래사장 위 산책로를 따라 줄지어 있는 야자수들. 오후 내내 뛰어놀아 머리칼이 땀으로 젖어있는 아이들 몇몇이 눈에 띈다. 시간이 늦어지기 전에 얼른 집에 가야 한다며 보채는 부모들의 음성이 들린다. 부모들이 다가가 아이들의 작은 몸을 수건으로 감싼다. 아이들의 볼멘소리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 나는 마지막으로 해변에서 뛰어본 게 언제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부둣가에 앉았다. 해가 지고 있다. 옆 자리에 앉아있던 이름 모를 남자가 내게 오렌지를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당신 이 말라게따 해변이 처음이냐고.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작은 철제 통의 뚜껑을 열었다. 담배꽁초와 담뱃재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


거울이었다. 이게 무엇이냐 물으니 그가 말했다. 작년에 아내가 죽었어. 이 거울은 아내가 20년 넘게 지갑에 넣어 다니던 거울이야.

거울을 좌우로 움직이니 우리 뒤에 있던 가로등의 긴 빛이 거울 표면에 비쳤다.

그는 웅얼거린다.

이 빛만큼은 아내에게 닿을 수 있지 않겠냐고 하는 것 같았다.

주황빛으로 흐드러진 하늘을 향해 끝없이 상승하던 한 줄기의 빛을 보았다.

구름 사이로 뻗어 나가던 그 빛은 오늘의 하늘에 꼭 맞게 끼워져 있는 것 같았다.  

어떤 힘으로 오늘을 살아가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너털웃음을 지었다. 내일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는 믿음. 그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바람이 꽤 불어서 야자수가 한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바다 위에 떠있는 오징어잡이배들이 하나 둘 불을 켜기 시작했다. 남자는 이제 가야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과거에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하려고 애쓰지 마시오, 그는 내 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의 슬픔이나 소망, 스쳐가는 생각, 아름다움을 글로 적으시오. 당신의 가장 조용한 시간에 가장 조용한 곳을 찾아 적막을 즐기십시오. 광막함과 정적은 당신을 건강하게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래에게 관심이 없었다. 고래는 그렇게 한참을 해변에 누워있었다.

고래는 누워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가야지. 습관처럼 듣던 엄마의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습관처럼 보도 블록의 선을 안 밟으려 애쓰며 걷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고래와 낯선 남자가 주는 심상이 다시 떠오른다. 한 장면에서 그들은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다음날 아침 다시 찾은 바다는 텅 비어 있었다. 고래는. 물에 쓸려 내려간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그를 끌고 간 것일까. 오래 바라볼수록 슬픔이 커졌다. 어떻게 그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일까. 만일 아직까지 고래가 남아 있더라면 가까이 다가가서 무어라 말을 해주었을 수도 있었는데. 슬픔을 위해 움직일 힘은 남아 있었는데. 그 드넓은 바다를 가슴에 담으며 살아온 고래의 세월이 궁금했지만 물어볼 방도가 없다. 그 거대한 생명체가 남기고 간 자리에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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