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광저우 기의열사능원
(广州起义烈士陵园)

by 김유


광저우 기의열사능원(广州起义烈士陵园)


슬픈 노래 그리고 마침 비가 오는지라 높게 이는 연못 물이 아득하고 구슬퍼서 물결을 가르고 또한 헤 집는 듯 하였다. 우산을 펴고 희생자 분향탑을 지나 뒤쪽으로 막 층계를 내려간 순간 보이는 크나 큰 호수 그리고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소리, '저 음악은 일 년 삼백육십오일을 끊이지 않고 울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임이 없습니다.' 안내해주는 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고보니 음악소리는 공원에서 시시때때로 틀어놓고 듣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다. 해금을 닮은 깽깽이 소리가 구슬프게 하늘을 맴돌고 한동안 이어지다가 끊어지자 다시금 온갖 악기들이 어울러지면서 구곡을 끊어 내는 듯 한꺼번에 울어내는 소리가 허공에 사무쳤다. 오늘 아침에 광저우 起义烈士陵园을 간다고 하였을때 나는 그곳은 그저 과거의 지나간 한 때였으며 혁명의 와중에 흔히있는 싸움과 희생 그리고 후세의 승리자들에 의해 선별되어진 유적들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이곳에 와서 음악을 듣는 순간 달라졌다.


공원은 월수구(越秀区) 안에 있다. 어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찬양한 기념비와 조각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광저우 코뮨의 3일 천하로 끝난 아쉬움, 사람이 많이 죽은 아픔으로 충만하다. 공원의 한 가운데에는 당시 코뮨때에 희생된 오천여명이 넘는 시신이 모셔진 커다란 봉분이 있다. 그 봉분에는 150여구의 조선인 시신도 있다고 한다. 1920년대의 광저우는 혁명의 중심지였다. 약 8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나 러시아, 일본등에서 왔으며, 그들은 이웃나라 혁명의 성공이 조국독립의 선결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들이 1927년 국민당의 쿠데타로 공산당을 때려잡고 또한 반군벌 반봉건세력이 무너질 때 조국의 독립도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중국인민은 그들 나름대로 지방군벌이 득세하는 나라에 대한 걱정, 한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국민당의 배신으로 멀어져간 조국독립에의 꿈이 광저우 봉기의 시발점이었다. 그즈음 나는 김산의 광동에서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행하는 중에 있었다. 1927년의 그 역시 이곳 기의(起義)에 참가를 하였었다.

그들은 장개석 군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광저우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잠시 외지로 나간 틈을 타 봉기를 일으켜 광저우를 점령하지만 그들의 목숨은 장개석 군(軍)과 진형명 군(軍)이 돌아오면서 끝을 맞이하게 된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은 모두 제압되었다. 참고로 그는 이곳에서 흔적없이 사라져 간 150여명의 조선인 동포들을 '물에 녹은 소금'이라고 비유하고 안타까워 하였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피해 층계를 내려와 찾은 곳은 팔각정자였다. 왠지 빗소리에 멀리서 들리는 듯 하던 음악소리가 연못을 지나갈 때는 더 한층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연못가의 녹음으로 가리워진 곳이 음악소리의 발원지였다. 소리는 울부짖듯 한꺼번에 내딛다가, 흐느낄 듯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듯 하고 다시 봄날의 햇빛처럼 찬란하게 흐르는 곡조의 유장함이 더해지고 종국에는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어울러져 내는 소리로 마감되었다.


조우원용(周文雍)과 천티엔준(陳鐵軍)의 죽은 시신은 그렇게 양쪽의 연못에 버려지고 묻혀졌다. 1927년 11월, 남창(南昌) 봉기에 이어 광저우에서 봉기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나중에 봉기의 주모자들을 체포할 때 이들도 잡힌 것이다. 봉기가 실패한 결과는 오천여명의 목숨이 조선에서 온 젊은이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조우원용 23세 그리고 천티엔쥰 24세, 그들은 처형되기 직전에 결혼을 했었다. 그리고 이 둘의 이승에서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기념한 정자는(血祭軒轅亭)는 1957년에 세워졌다. 연못은 당시의 처형장이었으니 이곳에서 죽어간 것이다. 끝간데 없이 허공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는 사실은 그때 죽은 사람들과 조우원용 그리고 천티엔준의 진혼곡이었음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자 곁에 세워진 그 두 사람의 동상. 약간은 머리를 숙인 듯, 조우원용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천티엔준의 모습이 애처러워 보였다. 그리고나서 호수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커다란 정자는 봉기에 참여한 150여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94년전, 나라가 망하고 설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시절의 젊음들이 해왔던 선택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이번에는 공간을 달리하여 한국이었다. 군사정권 아래 대학가는 뒤숭숭하였다. 그러다가 5월의 어느날, 남쪽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누군가 끌려가고 실종되었으며 또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은 한때 은행직원이었다. 영어도 유창했던 그는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항쟁의 마지막 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윤상원에게는 몇 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같이 야학을 하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비록 생전에 연인사이는 아니었지만, 친지들은 이 불운한 처녀 총각의 영혼결혼식을 올려 주기로 하였다. 이 영혼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 주인공들이었다.

이렇게 혁명은 언제서나 인간을 위한다는 구실로 피와 땀을 요구하였다. 절망과도 같은 삶을 개선해 보고자 죽음 앞으로 나섰던 사람들을 우리는 '선각자'라고 부르고 잊지 못한다. 선각자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명들이 이름석자 남기지 못하고 꽃처럼 사라져 갔는가. 여기에서 '물 속의 소금' 그리고 '봄 날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 심지어 그들은 이념과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편 血祭轩辕亭의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그리고 光州의 윤상원과 박기순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고 남겨져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모두는 이름을 남기건 남기지 못했건 모두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누군가 이곳 정자를 낀 연못을 돌 때 들리는 노래가락이 진혼가임을 안다면 한 줌의 꽃이라도 그들을 위해 뿌려주지 않겠는가, 조우원용 과 천티엔쥰, 윤상원과 박기순 그리고 남의 나라의 혁명에 가담하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조선의 젊은 혼들에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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