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 대국이었던 17세기 네덜란드의 미술
쏟아져 나오는 출판물들 속에서 유독 나의 시선을 사로잡던 미술분야의 책들, 그 책들 덕분에 뉴욕, 파리, 런던 등 대도시의 유명한 미술관과 작품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거주했던 90년대 중후반에는 비전공자로써 어떻게 미술에 접근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였다. 심신의 여유가 없던 20대이기도 했고, 인터넷 검색이라는 것이 처음 시작되었던 시절이라고 하면 상상할 수 있을까. 이후에 책을 통하여 미술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듯했다. 대표적인 미술관들을 섭렵하면서 경험이 쌓이고 나니, 이제는 한 단계 깊게 다양한 도시의 미술관들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3년의 긴 어둠 속 터널을 지나고 맞이한 2022년, 오랜만에 작심하고 지도 어플을 열어보았다.
이번에는 어느 쪽으로 가볼까. 미술관을 다니면서 알게 된 플랑드르 미술 (Flemish Art)이 떠올랐다. 그저 미술관에서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어두운 그림으로 전시실이 고루하게 느껴지던 장르라 생각되었는데, 이번에는 플랑드르 미술을 공부해보자 싶어서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루트를 짜다 보니 헤이그까지 오게 되었다. 헤이그는 우리 모녀 둘 다 처음 방문하는 곳이라 낯선 곳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이 있었다. 친해지고자 했던 플랑드르 장르는 지금의 벨기에 지역에서 15세기부터 발달했다는데, 결과적으로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 시대 미술에 집중하는 의미 있는 여행이 되었고 나의 네덜란드 연구가 시작되었다.
네덜란드의 황금기 시대는 네덜란드 공화국이 수립되던 1588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는 네덜란드의 식민정치, 군사, 무역, 경제, 과학, 예술등 모든 분야에서 최고로 발달했던 시기이다. 네덜란드는 1602년에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하여 동인도 회사를 세웠는데, 이는 주식을 발행한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1621년에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와 무역을 하기 위하여 서인도 회사를 세운다. 이들은 노예와 식민지를 지배하였고, 강력한 해군을 가졌으며, 무역을 통하여 막대한 부를 이루며 경제 대국이 된다. 이러한 태평성대에 찬란한 문화유산을 꽃피웠고 우리는 이 시기를 황금기 시대였다고 한다.
16세기 이전의 역사적 배경으로는 폴랑드르 지방은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아왔고 가톨릭이었다. 1500년대 중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개신교가 들어오게 되었고, 1566년에는 개신교 지도자들이 교회가 타락한 배경으로 가톨릭의 전통적인 요소들인 성상과 성화들을 지목하며 그것들을 파괴하였다. 1578년에 북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개신교도가 장악하게 되었고, 남부 벨기에는 가톨릭 세력권에 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네덜란드 작가들에게는 교회화, 성화, 조각품, 사제들의 초상화 등 종교와 관련된 작업은 의뢰가 들어오지 않게 된다. 그래서 네덜란드 황금기에는 종교 그림이 없는 거다.
15세기 이전의 네덜란드는 토지를 개간해서 소유해야 하는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영주가 대대로 지배하는 구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다른 유럽지역에 비해서 전통적인 귀족의 세력이 절대적으로 약했다. 80년 전쟁 이후 1600년대에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정치 경제가 발전하게 되었고 더불어서 사회적 지위는 주로 소득으로 결정되면서 도시 상인 계급의 지위가 부상하고 이들은 혼인등을 통하여 전통 귀족과 섞이게 된다. 또한 종교에 관대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에서 발생한 종교 난민인 유대인을 포용함으로써 상인과 과학 문학자가 대거 유입되며 경제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이러한 종교, 정치, 경제적인 배경과 맞물리면서 네덜란드의 예술계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와는 다르게 딱 부러지는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벨기에에는 유명한 화가가 배출되지 않았다.
이 당시 네덜란드에서의 미술 작품을 크게 나누면 역사화, 풍속화,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로 볼 수 있다. 특히, 중산층과 서민들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가 급속하게 많아진다. 정물화와 풍경화는 기존에도 많았지만 다른 점이라면 이제는 궁전이나 귀족들의 대 저택 공간을 위한 작품이 아니다 보니 그림의 크기가 작아졌고 그림의 내용도 사실여부를 떠나서 보기 좋은 예쁜 그림으로 바뀌었다. 또한 그림을 주문하는 주체가 성당에서 일반인들로 바뀜에 따라 주문제작 요청이 들어오는 초상화를 제외하고는 특정 대상을 위한 그림이 아닌 사고팔기에 좋고 보기에 좋은 풍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또 실력이 받쳐줘야 팔릴 수 있으니 대부분의 작가는 한 가지 화풍만을 꾸준히 개발해 내며 자신의 개성을 강조했다. 당시의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미술은 성당이나 왕궁에 소속된 안정적인 직업이 아닌 경쟁해서 판매해야 하는 생계였던 것이다. 이 당시에 화가의 숫자가 역사상 가장 많았을 거라고 하는데, 그만큼 거래가 활발했다고 해석될 수 있다.
네덜란드 황금기 시대의 대표 화가인 얀 스틴 (Jan Steen), 프란스 할스 (Frans Hals), 게릿 두 (Gerrit Dou) 제라르 테르 보르흐 (Gerard ter Borch), 가브리엘 메취 (Gabriël Metsu) 등이 그린 풍속화를 보자. 가장 풍요롭고 번영했던 시기를 살아가던 그들은 일상적인 삶에 위트를 살짝 넣어줬는데 그 포인트를 발견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풍속화에 은근한 유머감각이 들어있다. 가령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서 만난 프란스 반 미에리스 (Frans van Mieris I, 1635-1681)의 작품 <The Oyster Meal>에 등장하는 남녀의 모습은 좀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주인공들이 상황을 즐기고 있음을 오이스터를 보면 알수있다. 오이스터는 에로틱한 의미로 세속적인 쾌락을 상징하며, 당시의 장르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다. 황금기 시대 작가들을 조금 기억해 두면, 미술관을 다니면서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훨씬 더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