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의 공간과 그 안의 가족

영화 <남매의 여름밤>

by ahyun

흘러가는 가족의 시간

‘가족’이라는 주제, 소재를 다루는 영화는 다양한 양상으로 존재해 왔으며,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특히나 아시아 영화 감독들에게 가족은 떼놓을 수 없는 소재일 것이다. 가족 중심으로 구성된 서사, 즉 가족 서사의 영화는 관객들로부터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함께 소통할 수 있게 한다. 영화에서 가족 서사를 다루는 방식은 다양하다. 가족 간 갈등을 중심으로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다루기도 하고, 여러 형태의 가족관계를 다루며 가족의 의미를 성찰하도록 하기도 한다. 가족영화의 거장이라 불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만을 놓고 분류해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다. 이혼한 부모를 둔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피로 연결된 가족이 아닌 비혈연 가족, 대안 가족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어느 가족>, 가족 간의 갈등을 그린 <걸어도 걸어도>, 자신의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등 그의 가족영화는 ‘가족’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전하려는 주제의식과 표현방식은 모두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남매의 여름밤> 속 가족은 마치 우리 주변에 있을 것만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윤단비 감독은 오스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 <동경 이야기> 속 가족 재현 방식을 언급했는데, 어머니의 죽음과 같은 사건을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연출한 것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특별한 사건 없이 가족의 일상과 그들 사이의 정서에 집중하며 흘러가는 시간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 속에는 옥주, 동주 남매와 이혼한 엄마와의 관계,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한 미정, 아픈 할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시고자 하는 자식 등 가족 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여러 문제와 갈등 상황이 나타난다. 하지만 감독은 이러한 갈등을 영화에서 중심에 놓고 보여주지 않는다. 사회적 문제로도 확장될 수 있는 이 문제들이 어떠한 사건으로서 크게 부각되지 않는 것이다. 집을 나온 미정을 찾아온 남편은 소리 지르며 화를 내지만, 이러한 장면 역시 집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옥주의 시선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질 뿐이다. 병기와 아내가 무슨 사유로 이혼하게 됐는지, 또 미정은 어떤 이유에서 남편과 헤어지려 하는지, 병기와 미정이 할아버지의 집에 관해 어떤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영화에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이들이 살아가고,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이 등장하지만 이 역시 시간의 흐름에 맡겨질 뿐이다. 옥주를 비롯한 가족들은 소소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며 감정에 변화를 겪기도, 피할 수 없는 작별과 마주하며 슬픔을 느끼기도 하며 함께한다.

가족 영화의 주제나 형식을 살펴봄에 있어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공간’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가정’이라는 공간을 형성하며 그 정체성을 이루기 때문에, 대체로 가족영화는 가족의 의미를 사유하도록 이끄는 서사 형식뿐 아니라 공간 재현 형식과도 깊은 연관 관계를 이루고 있다. 공간은 주제를 전달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인물의 사연과 감정과 조응하여 서사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곳에 모여

가족서사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공간은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는 ‘집’이라는 공간이다. 집은 가족의 역사를 담고 있고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단서가 되기도 하며, 가족관계에 관한 추상적 관념들을 구체화 시켜주기도 한다. 집은 가족 구성원의 갈등을 드러내기도 하고, 동시에 그 균열을 봉합할 수도 있으며 영화 속 가족에게 주어진 여러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들이 함께 모여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집’이기 때문이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이러한 역할을 하는 곳은 할아버지의 2층 양옥집이다. 여름방학을 맞은 남매, 옥주와 동주는 아버지 병기와 함께 할아버지의 양옥집에서 머물게 된다. 영화는 옥주, 동주, 아버지가 재개발로 인해 철거 예정인 반지하 주택에서 짐을 챙겨 나오며 시작한다. 살던 집을 나서는 이 씬에서, 옥주의 시선을 통해 남겨진 집 안 공간의 풍경들이 비춰진다. 집을 나온 이들은 차를 타고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양옥집으로 향한다. 이후 남매의 고모 미정 또한 남편과의 관계가 나빠지며 자신의 집을 나와 양옥집으로 온다. 이렇게 옥주와 동주, 병기와 미정 각각의 두 남매, 할아버지 영묵까지 5명의 가족은 2층 양옥집에서 모이게 된다. 이 양옥집은 아빠와 고모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이고, 현재 할아버지가 거주하고 있는 집이며, 영화가 진행되는 시점에서는 5명의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집이다. 그렇기에 할아버지의 이층집은 이들 가족의 역사를 담고 있다 말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집에서 약 한두 달 가량의 시간을 보내며 어색하기도 낯설기도, 불편하기도 했던 가족들은 점차 이 집에도, 가족 간의 관계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감독은 영화의 화자를 옥주로 설정하며, 주로 옥주의 시선에 따라 양옥집의 공간들을 보여준다. 처음 할아버지의 집에 도착한 옥주는 할아버지 집에 얹혀 지낸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집이 낯설고 어색하기 때문인지 쉽게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며 집안 곳곳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인다. 더위를 먹어 병원에 갔던 할아버지를 모시고 병기가 집에 돌아온다. 오랜만에 모인 4명의 가족들은 한 식탁에 앉아 저녁식사를 한다. 아직 서먹하고 어색한 기운이 돌지만 옥주는 자연스럽게 동생 동주를 챙기고, 병기는 할아버지를 챙긴다. 할아버지 역시 동주의 의자를 자신 쪽으로 가까이 끌어와 앉게 하며 그들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낯선 집에 익숙하지 않았던 옥주는 2층 방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방에 집에서 직접 가져온 모기장을 설치하며 동생 동주를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동주가 방에서 함께 자자고 제안하자 “여기는 내 방”이라고 답하며 쫓아낸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는 1층과 2층의 경계에 있는,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 위치한 중문을 잠그며 동주를 올라오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동주는 문을 열어달라 소리치지만, 옥주는 문을 잠군 자신만의 공간에서 친구와 통화를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옥주와 동주는 2층 테이블에서 국수를 먹는 등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상을 보내기도 한다. 한편 모기장 안으로 동생 동주를 들이지 않았던 옥주는, 고모 미정에게는 먼저 안으로 들어와 함께 자자는 제안을 한다. 자신만의 공간으로 정의한 모기장 안에서 고모와 이야기를 나누며 둘은 정서를 공유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두 사람이 더욱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할아버지의 생일을 맞아 가족들은 깜짝 파티를 준비한다. 어느 순간 함께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이 가족은 함께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선물을 주며 저녁을 먹는다. 동주가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가족들이 다함께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무척이나 행복해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 속에서 가족들은 사소할 수도, 심각할 수도 있는 상황을 겪으며 감정의 갈등과 마주한다. 자존심도 없이 엄마를 만나고, 선물까지 받아온다는 이유로 옥주는 동주와 싸운다. 옥주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고, 쌍꺼풀 수술을 시켜주지 않는 아빠가 밉기도 하다. 아빠와 고모가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려 하고, 할아버지의 집을 마음대로 팔려고 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병기와 미정 남매가 할아버지의 집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미정은 병기에게 “이 집 오빠 꺼 아닌 거 알지?”라고 물으며, 할아버지의 집을 파는 게 어떠냐고 물어본다. 이들 남매는 ‘집’을 통해 어쩔 수 없는 현실적 문제를 마주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부딪히며 생활하고, 모여서 식사를 한다. 남자친구에게 준 신발을 뺏고 집으로 돌아온 옥주는 할아버지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빠와 고모가 병원에 가고 둘만 남은 집에서 옥주와 동주는 화해하게 된다. 두 사람은 함께 라면을 끓여 먹으며 장난스럽게 화해를 하고, 동주는 옥주의 방으로 가 안에서 함께 자도 되냐고 묻는다. 그렇게 남매는 옥주의 공간인 모기장 안에서 함께 잠을 청한다. 아무리 싸워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하고, 불안하고 무서운 하루의 여름밤 안에서 남매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다. 서사 속에서 집이 갖는 의미를 잘 표현해주고 있는 장면이다.

하이앵글.JPG <장면1>
k.JPG <장면2>

할아버지의 생일 파티가 끝난 밤 카메라는 계단을 찍고 있고, 옥주가 내려오며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들어선다. 옥주는 노랫소리를 듣고 내려오다가, 할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홀로 노래를 듣고 있는 모습을 본다. 이때 카메라 앵글은 하이앵글로, 계단 위에 서 있는 옥주가 1층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잘 포착하고 있다.(장면1) 이때 하이앵글을 사용함으로서 할아버지뿐 아니라 그가 앉아 있는 거실의 배경이 강조된다. 옥주는 거실로 내려갈까 잠시 망설이다 다시 올라가고, 계단에 앉아서 노래를 듣는다. 이때 할아버지와 옥주가 어떠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관객들은 이들이 같은 노래를 들으며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을 받는다. 할아버지와 옥주가 처음으로 감정적인 교감을 나누는 장면이다. 한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해도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좁혀지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은 이제는 조금의 거리를 두고 직접적 교감을 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할아버지가 앉아 노래를 듣던 소파는 옥주에게 큰 정서적 의미를 준다.

영화의 서사가 진행될수록, 즉 가족들의 관계가 성장할수록 옥주에게 양옥집이라는 공간 역시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할아버지의 동의 없이 집을 팔고자 하는 아빠에게 너무하다며 화를 내는 옥주에게서 이를 느낄 수 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후 집으로 돌아온 옥주는, 차마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집으로 돌아온 아빠와 옥주, 동주는 거실에서 밥을 먹는다. 옥주는 한 곳을 응시하다 울음을 터뜨리는데, 옥주가 보고 있던 것은 정면에 마주한 소파이다. 이때 지금까지 전반적으로 사용하던 카메라 쇼트와 달리, 카메라는 옥주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잡으며 옥주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장면2) 옥주가 울며 자리에서 떠난 뒤, 옥주가 응시하고 있던 소파가 클로즈업된다. 옥주는 비어져 있는 소파를 마주하며 어느 날 밤 그곳에 앉아 노래를 감상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날 공유했던 시간이 오래도록 옥주에게 기억으로 남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집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족

<남매의 여름밤> 속 인물들을 찍는 카메라는 뒤로 물러나 이들을 관조적으로 바라본다. 감독은 촬영시 인물들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싶었고, 그러한 거리감이 관객들에게 기억을 환기해주면 좋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영화는 관조적 구도를 통해 일어나는 사건이나 어떠한 정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감정의 전달에 초점을 맞춘다. 등장인물들은 아이레벨쇼트 앵글을 통해 주로 비추어져 관객들은 어떠한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의 인물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영화 속 ‘양옥집’이 집 안의 가족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관객들도 그들을 바라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 카메라의 위치와 앵글은 계속해서 공간과 교감한다. 옥주의 시선으로 화면을 보여주는 듯 하다가도, 마치 집이 인물들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느낌의 카메라 구도가 주를 이룬다. 양옥집 안에서 가족들의 일상을 보여줄 때 카메라는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않고, 고정된 채로 공간을 찍고 있다.

들어오기 전 집.JPG <장면3>
저녁 외관.JPG <장면4>

옥주와 동주가 처음 할아버지의 집에 들어온 씬에서도 이러한 카메라 구도를 볼 수 있다. 카메라는 집의 시선에서 아이들을 바라보게 한다. 아이들이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쫓아서 찍는 것이 아니라, 집 마당에서 카메라는 미리 고정되어 기다리고 있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아이들의 움직임을 쫓아 찍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그들의 움직임이 자연스레 보이도록 한다. 인물이 프레임 밖으로 나가도 카메라는 여전히 같은 공간을 찍고 있는 편집 역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고정된 카메라로 빈 공간을 찍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감정적 여운을 남기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마당을 지나 집 내부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모습 역시 같은 기법으로 촬영된다. 카메라는 이미 집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공간이 가족들을 바라보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장면3) 집 안 계단을 오르내리는 인물들을 보여줄 때도 카메라는 역시나 이들이 올라오고, 내려오기를 미리 기다리고 있는 듯한 구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장면들은 <남매의 여름밤>이 공간을 중심으로 서사를 진행하며, ‘집’이 그 중심 공간이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장면들이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집을 나서 할아버지의 집으로 이사 가는 가족들은 롱테이크로 촬영됨으로서 이들이 한 공간에서 떠나고 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이 역시 앞으로 영화의 전반적인 구성이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로 느껴진다. 또한 오랜만에 모인 5명의 가족이 다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집의 외관에 위치하면서 양옥집을 크게, 그 안에서 저녁을 먹는 가족들의 모습은 마치 양옥집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처럼 작게 포착한다. 한 프레임 내에서 집이라는 공간이 훨씬 큰 위치를 차지하고, 인물은 비교적 작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장면4) 심지어 이 장면은 영화의 메인 포스터로도 쓰이는데, 그러한 점에서 이 집이 영화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듯, 감독은 오스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에서 큰 여운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그래서인지 빈 공간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쇼트들, 서로 마주보지 않고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는 인물들, 잦은 롱 쇼트의 사용과 거의 사용하지 않는 클로즈업,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 등 야스지로 감독의 카메라 기법이 영화에서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공간이 가진 정서적 효과가 영화 속 등장인물을 넘어 관객에게까지 전해지기 위해서는 그 공간이 얼마나 추억을 환기할 수 있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중심 공간이 되는 2층 양옥집은 실제 가족들이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보였어야 했고, 자연스러운 일상성이 스며들어 있어야 했다. 2층 양옥집은 실제 노부부가 살던 집을 빌린 것으로, 이들의 생활감과 세월이 깃들어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집의 소품들 역시 실제 집에 존재하던 것들을 대부분 활용했다. 영화 속에서 할아버지가 물을 주며 관리하고, 동주와 함께 토마토 등을 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마당 텃밭 역시 실제 양옥집에서 관리하던 텃밭을 그대로 살린 장소이다. 영화 속 장소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으로 병기와 미정 남매가 집 앞 슈퍼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씬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이 평상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슈퍼는 실제 촬영 장소인 양옥집 앞에 위치하는 슈퍼이다. 그렇기에 이 장면을 보는 관객들은 집과 슈퍼가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 한 느낌을 받으며, 더욱 사실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효과를 더욱 잘 전달하기 위해 슈퍼씬에서 카메라 앵글은 양옥집과 슈퍼 평상을 한 프레임 안에 보이도록 잡는다.

관객들은 <남매의 여름밤>을 통해 자신들의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기도, 영화 속 인물에게 공감하기도 하면서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영화 속에 투영한다. 그 인물이 옥주일수도, 동주일수도, 혹은 병기나 미정일수도 있다. 이러한 점이 <남매의 여름밤>이 사랑받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영화의 어떤 요소가 관객들에게 공감의 정서를 느끼게 하고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소환시키며, 노스탤지어를 일으키는 것일까. 공간은 삶과 기억을 가지고 존재하며, 기억은 공간을 필요로 한다. <남매의 여름밤> 속 공간들은 그저 장소로서의 상징만을 갖지 않는다. 영화가 표현하는 공간 안에는 감정이 내재되어 있다. <남매의 여름밤> 속 일상적 공간들은 등장인물들의 내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렇기에 영화 속 공간을 보는 관객들도 이들의 감정을 그대로 전달받은 것이 아닐까.


남겨진 공간과 남겨진 기억

병기는 방학 아침, 자고 있는 동주를 깨우며 학교에 늦었다는 장난을 친다. 동주는 장난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웃으며 다시 잠에 든다. 며칠 뒤 할아버지의 생일 파티가 끝난 후, 병기, 미정, 옥주는 2층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병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어린 시절, 할아버지 영묵이 자신에게 쳤던 장난을 이야기한다. 밤에 거실에서 자고 있던 자신을 지각이라고 깨우며 뜬금없는 장난을 쳤다는 것이다. 병기는 얼마 전 그때 당시의 꿈을 꿔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말한다. 할아버지의 집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몇 십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영묵과 병기, 병기와 동주 두 부자는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 고모 미정과 옥주는 ‘엄마’라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옥주는 미정에게 할머니가 보고 싶냐고 물었고, 미정은 가끔 할머니가 나오는 꿈도 꾼다고 답한다. 이후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옥주는 엄마가 찾아오는 꿈을 꾼다. 기억과 꿈이 연관되어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는, 할아버지 집에서 보냈던 이 시절의 여름밤이 이후 남매에게도 다시 떠오를 기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기억의 순간들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 그립고, 애틋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화를 보며 떠올린 어린 시절 기억이 그렇듯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남겨진 집 곳곳의 공간들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이 공간들은 그저 하나의 장소로서만 남겨지진 않을 것이다. 남겨진 가족들이 겪었던 감정, 그들의 이야기, 기억들이 함께 존재한 채로 남을 것이다. 옥주가 할아버지의 소파가 비어져있는 공간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