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아파트 14층이다. 몇 년 전부터 이 14층을 걸어서 올라가고 있다. 한 층에16개의 계단이 있으니 총 208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집에 도착할 수 있다. 처음 얼마간은 중간 정도만 올라가도숨이 차서 잠깐 쉬었다 올라갔었는데 지금은 쉬지 않고빠르게 걸어 올라간다. 가끔은 한 20층쯤에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계단보다는 엘리베이터로 발길이 향할 때도많다. 특히 지쳐서 퇴근하며 엘리베이터가 있는 현관에 왔을 때, 1층에서 떡하니대기하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보면 바로 올라타고 싶은 유혹이 생기는 것이다.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이 올 때마다 잠깐 갈등한다. 손에 짐을 들고 있는 등 조그만 핑계라도 있으면 냉큼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조금이라도 편하려는몸의 본능에 질 때가 많다.
그런데 계단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본의 아니게 현관문에 붙어있는 각종 전단지와 그 앞에 놓여있는 물건들을 보게 된다. 예전엔 자전거가 거의 전부였는데 요즘엔 집집마다 택배 박스하나쯤은 다 있다. 그야말로 배달의 민족이다.최근엔다회용 배달 상자가 놓여있는 집들도 많아졌다.
2019년 어느 날 계단을 걸어 올라가다가 집집마다 붙어있는 이상한 전단지를 발견했다. 백건우 피아노 리사이틀 광고였다. '아니, 이런 전단지도 붙이나?' 아트센터인천에서 하는 공연 광고였는데 개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2018년 11월) 사람들이 잘 모를까 봐 걱정을 했나 보다. 그런데 불현듯 든 생각,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피아노를 시작한 지 60년이 넘은 노(老) 예술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
만일 백건우가 동네 마트 광고 붙이듯 집집마다 붙어있는 리사이틀 광고를 봤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이제 이렇게까지 광고해야 내 공연에 사람들이 든단 말인가?'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내 공연을 알리기 위해 이렇게까지 수고해 주었군.' 하고 생각할까? 나는 전자(前者) 일까 봐 지레 걱정했지만 백건우라면 분명 후자(後者)로 생각했을 거라고 위안했다.
우리 집 현관에 붙어있었던 백건우 피아노 리사이틀 광고 전단지
4월 13일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은 거의 만석 (滿席)이었다.
생각해보니 주최 측에서 노(老) 예술가에 대한 배려를 위한일이었다고 이해하게 되니 오히려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독일 1770~1827)은 평생토록 피아노 소나타 32곡을 작곡했다. 작곡 시기도 25세에서 52세까지 평생에 걸쳐 있어서 베토벤의 창작 양식의 변화를 말해주는 자서전에 비유할 수도 있다.
특히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은 28살의 젊은 시절 작품으로 31살에 작곡한 14번 <월광>, 36살에 작곡한 23번 <열정> 등과 더불어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베토벤 3대소나타로 알려져 있다.
고향 본을 떠나 음악의 도시 빈에서 청운의 꿈을 꾸며 활동하고 있던 베토벤은 26살부터 청력에 뭔가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드디어 이름을 알리며 음악가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시기였기에 그는 청력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없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핫한 피아노 스타로 발돋움하고 있었지만 속 마음은 얼마나 절망적이고 괴로웠을까. 그렇게 2년이 흘러 28살, 그는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여 직접 <비창>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비창(悲愴)'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몹시 상하고 슬픔'이다.
베토벤이 이 제목을 직접 붙인 것은 '마음이 몹시 상하고 슬프다'고 고백한 것일까?
그런데 <비창>을 끝까지 들어보면 슬픔이 슬픔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1악장에서는 비통하고 슬픈 감정이 드러나지만 2악장에서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로 승화되어 있다. 그리고 3악장에서는 약간 불안한 느낌이 있지만 아름답고 빠른 선율에서 꿋꿋한의지마저 느낄 수 있다.
백건우(1946~)는 음악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끊임없이 연구하는 태도로 "건반 위의 구도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세대 피아니스트이다.
그는 10살 때 국립교향악단과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등 신동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15살의 어린 나이에 홀로 뉴욕의 줄리아드로 유학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학으로 줄리아드를 마친 그는 유럽으로 진출했는데, 거기에서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인 빌헬름 켐프Wilhelm Kempff (독일 1895~1991)를 사사하는 행운을 얻었다. 백건우가 평생을 추구해온 음악에 대한 구도자적인 자세는 바로 종교적이고 진지하며 학구적이었던 스승 빌헬름 캠프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는 '구도자' 또는 '순례자'라는 별명에 맞게 한 작곡가를 깊이 천착하여 전(全) 곡을 녹음하거나 연주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2005년부터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 곡을 3년에 걸쳐 녹음했고 마지막 해인 2007년에는 그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7일 동안 소나타 32곡 모두를 연주하는 한국 음악사상 초유의 연주회를 가졌었다.
<비창>, <월광>, <열정>등 베토벤 소나타 7곡이 실려있는 백건우의 베토벤 소타나 CD
섬마을 콘서트
그리고 예순의 나이를 훌쩍 넘긴 2011년 그는 우리나라의 섬마을을 돌며 피아노 콘서트를 열었다. 어떤 호사가들은 말했다. 문화적 혜택이 전혀 없었던 섬마을 주민들이 과연 베토벤과 같은 클래식 음악을 이해할 수 있겠냐고. 그러나 섬마을 콘서트를 완성하는 건, 클래식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의 지식과 수준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소외된 섬을 찾아가는 백건우의 아름다운 마음과 그 마음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마을 사람들의 감동과 감사가 아니었을까?
백건우의 섬마을 연주는 콘서트홀에서의 연주보다 음향 퀄리티는 떨어지지만, 아름다운 풍경과 명연이 그 어떤 연주보다도 큰 울림을 선사한다.
1악장 Grave - Allegro di Molto e con brio (장중하게- 매우 빠르고 힘차게)(0:17~8:35)
흔치 않은 지시어 Grave 그라베(장중하게)가 쓰여있는 악장이다. 드라마틱하게 시작하는 도입부는 이 지시어대로 장중하고 비극적인 느낌이다. 이 첫 선율은 악장 전반에 걸쳐 여러 번 등장한다. 빠른 주제부로(1:54) 넘어가서는 마음속 고통을 털어내듯 격정적이고 다채로운 연주가 이어진다. 코다(종결)에서는 도입부에 등장했던 그라베 선율을 반복하지만(7:47) 곧바로 알레그로(8:25)로 돌아가 간결하게 끝난다.
2악장 Adagio Cantabile (느리게 노래하듯이) (8:42~13:20)
1악장과는 대조적으로 기도하는 듯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에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지는 악장이다. 영상 속 피아노 뒤로 보이는 잔잔한 바다와 배처럼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악장이다.
3악장 Rondo: Allegro (론도: 빠르게) (13:23~18:09)
빠르고 경쾌한 선율로 시작하지만 어딘지 불안한 분위기가 감도는데 몸부림치면서도 씩씩하게 나아가겠다는 베토벤의 꿋꿋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론도는 주제가 계속 반복되어 나오고 그 사이에 다른 에피소드가 삽입되어 있는 구성을 말한다. 이 악장은 주제 A가 반복되고 그 중간에 에피소드 B, C가 삽입되어 있는 [A - B - A - C - A - B - A - 코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주제 선율을 기억하며 따라가면 아쉽게도 어느새 종결에 이르게 된다. (위 연주에서 주제 A가 반복되는 시간은 각각 13:23, 14:47,16:04, 17:10이다.)
올해로 백건우 77세, 윤정희는 79세가 되었다. 곧 80을 바라보는 이들이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투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두 분에게 평화가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