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새로운 길
시각장애인인 저는 오늘도 당신과 함께 걷고 있습니다. 시월의 어느 날, 지난 여름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는지 햇살은 제주올레 1코스 시작인 말미오름 산허리에서 따가왔습니다. 그나마 감사한 것은 이 열기 속에서 나무 그늘과 같은 오름의 바람이었습니다. 말미오름을 타고 올라온 바람이 키 작은 편백나무 어린잎들을 흔들며 저 멀리 우도의 푸른 바다를 향해 사라져 갔습니다. 말미오름에서 내려가는 길에는 결초보은을 상징하는 초록의 수크령 풀이 앞서가는 당신의 발목을 스치며 사르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검게 물오른 쥐똥나무 열매가 가득한 관목 곁에는 직박구리들의 지저귐이 쑥부쟁이꽃처럼 만발하였습니다.
알오름으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은 마치 숲으로 이어지는 긴 터널 같았습니다. 허리 높이까지 자란 작은 관목들이 바스락거리고 울퉁불퉁한 검은 가지가 햇살을 막아주는 곰솔 숲이 길게 늘어선 어디쯤에서 당신은 말미오름과 알오름을 연결해 주는 이 길이 원래는 없었지만 두 오름을 잇기 위해 제주올레가 만든 '새로운 길'이라며 올레 1코스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27개 제주올레 트래킹코스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1코스는 제주시 시흥리에서 시작해 서귀포시 종달리를 거쳐 성산 일출봉을 지나 광치기 해변까지 이어지는 총 길이 15.1km 구간입니다. 이 구간에는 우도를 마주 보며 봉긋 서 있는 말미오름과 알오름을 배경으로 명암이 다른 초록색 조각보를 검은색 실로 이어 붙인 것 같은 들판과 현무암 밭담이 펼쳐져 있고, 종달리 소금밭을 지나면 한양으로 말을 배에 실어 날랐다는 성산일출봉 옆 수마포까지 시흥리 해안로가 푸른 하늘과 바다를 벗 삼아 내달리고 있습니다. 이 길의 끝에는 일출봉의 조각 같은 너럭바위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바다를 앞에 두고 굵은 소금 알갱이처럼 보이는 황금색 모래밭 광치기 해변이 펼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제주올레 1코스의 아름다운 자연을 하나의 트래킹코스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 제일 큰 난관은 시흥리와 종달리 사람들 사이의 단절이었습니다. 약 70년 전 제주를 붉은 피로 갈갈이 찢어 놓은 4.3 사건의 후유증인지 시흥리와 종달리 사이에는 도로는 있었지만 사람들 사이의 왕래는 없었다고 합니다. 제주어로 '올레'는 '소작로에서 대문까지 이르는 샛길'로서 사람 한두 명이 겨우 다닐만한 좁은 골목길이라는 뜻입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마을마다 숨겨져 있는 올레를 연결하여 제주의 보석 같은 오름과 곶자왈 그리고 들판과 바다를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흥리와 종달리 사람들은 마을과 마을이 연결되는 것에 반대하였고 여행자들이 그들이 사는 마을에 드나드는 것 또한 원치 않았습니다. 이 꿈이 좌초되지 않기 위해 막걸리를 사 들고 마을 사람들을 수없이 찾아다니며 설득하다 해결이 되지 않자 주변의 모든 인맥을 동원하게 되었고, 그러던 와중 손 씻고 재야에 묻혀 살던 조직폭력배들이 소통의 실마리를 만들어 주었다는 초창기 제주올레의 눈물겨운 이야기들을 무덤가 산담에 기대어 들으면서 저는 '연결'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주의 마을마다 올레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길들을 연결하자 올레는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걷던 사람들까지 찾아와 감탄하며 걷는 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연결된 올레를 통해 시흥리와 종달리 사이의 불통은 옛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길이 누구나에게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장애인, 특히 시각적 손상으로 인해 사물이 분간되지 않는 저 같은 시각장애인들은 '볼 수 없다면 혼자 이동하기 어렵고, 위험하니 원초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없다.'는 세상의 편견에 막혀 올레를 걷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편견의 벽을 넘어 개인적으로나마 437km 제주올레를 네 번째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벽 너머에서 제 손을 잡아 이끌어준 수많은 당신 덕분이었습니다.
지난날 당신과 함께 걸었던 새로운 길들을 떠올려 봅니다. 때 이른 초봄의 햇살 속 초록 이끼 낀 곶자왈의 백서향길, 열가마 찜통 더위를 막아주던 방풍림 사이의 푸른 파도 소리 길, 드높은 가을바람이 온몸을 흔들어 대던 송악산의 바람길, 그리고 길 가는 누구나 자유롭게 꺼내 먹으라고 감귤 상자를 놓아둔 새콤달콤한 감귤길, 이 모든 길을 이끌어준 수많은 당신이 제게는 올레였습니다.
'쓰~확' 하며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람을 따라 우리가 머물렀던 숲길을 나오자 오른쪽에는 알오름의 둥근 산허리가 있고, 왼쪽으로는 여인네의 초록 치맛단 같은 새왓(지붕을 일 띠가 나서 자라는 밭. 제주 지방의 방언)이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다시 '쓰~확' 하는 바람이 불고 수많은 초록의 가는 새 줄기가 알오름을 향해 몸을 뉘었습니다. 초록의 새왓을 온몸으로 품은 알오름으로 하늘이 빗질하는 소리를 들으며 당신과 저는 오름의 급한 등줄기를 따라 걸었습니다. 다시 하늘이 빗질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조용히 웃음 지으며 '사람이 곧, 길'이라고 했던 말이 바람 소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하였습니다. 문득, 바람 부는 알오름을 오르며 저와 같은 시각장애인들이 당신이라는 새로운 길을 따라 이 오름을 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