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에서 간세처럼

by 누리숲

제주 동쪽 성산 일출봉을 바라보는 광치기해변의 올레 간세를 향해 장애인 콜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기사님의 팔을 잡고 뛰었다. 이곳은 올레 1코스가 끝나고 2코스가 시작되는 곳인데, 오늘 나는 자원봉사자인 이 선생님과 역올레로 1코스를 걷기로 약속하고 광치기해변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역올레라는 표현은 올레를 걷는 올레꾼들 사이에서 올레 코스의 끝지점에서 시작점으로 거슬러 걷는 것을 말하는데, 제주올레에서는 올레를 걷는 트레커들을 통상 올레꾼이라고 부른다.

콜택시가 해변에 도착하기 5분 전, 이 선생님은 벌써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노라고 전화를 주셨다. 11월 길을 걷기에는 참 좋은 계절이지만, 동쪽 성산의 아침 바닷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쉭하니 부는 광치기해변의 찬바람은 등산모자의 앞챙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어, 그렇지 않아도 흐릿한 내 시야를 어지럽게 하더니 목덜미 뒤쪽으로 휭하니 훑고 지나가며 등골을 움츠리게 한다. 다행이라면 곰탕같이 흐릿하던 하늘의 동쪽 한 자락이 환하게 밝아온다는 것이랄까.

광치기해변으로 오는 동안, 서귀포가 고향이신 택시 기사님은 운전을 하며 "코지가 제주 사투리인데 육지가 바다로 뚝 하고 튀어나온 곶이라는 뜻이고, 성산일출봉이 예전에는 섬이었는데 종달리 쪽에서 수문교를 놓아 연결하고, 오조리 쪽 육지와 성산일출봉 사이에 썰물 때마다 드러나는 터진목이라는 얕은 해변을 간척사업을 해서 섭지코지와 연결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또한 광치기라는 지명의 유래도 설명해 주셨는데, 바람이 오늘같이 드센 날 성산 바다의 거센 파도가 해변의 넓고 평평한 현무암 바위와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마치 꽹과리 치는 소리와 비슷하여 광치기라고 불렸다고 하셨다. 기사님의 그럴싸한 설명을 들으면서 행여나 광치기해변에서 성산 바다의 꽹과리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

성산일출봉과 광치기해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이번 트레킹에 대한 고민거리를 잊고 있다가 자원봉사자 이 선생님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는 전화에, 잠시 잊었던 며칠 동안의 고민거리가 조급한 마음과 함께 밀려와 장애인 콜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올레 간세를 향해 뛰게 되었다. 이제 몇 개 코스만 더 걸으면 제주올레를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이번 여행에서 함께 걸어주기로 했던 자원봉사자 오 선생님께서 갑자기 코로나에 걸리면서 자원봉사자를 급하게 구하게 되었고, 수소문 끝에 지난봄 19코스를 함께 걸어주셨던 이 선생님께서 시간을 내주셔서 오늘 1코스 역올레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이 올레를 걷기 위해서는 함께 걸어줄 사람이 필수적인데, 시각장애인 이동지원 및 안내에 대한 훈련을 받은 사람은 아예 없을뿐더러, 그저 함께 걸어줄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개 코스를 함께 걸어주시기로 했던 오 선생님이 코로나에 걸리신 것이다.

며칠 동안 오 선생님의 올레 동무들을 소개받아 전화를 드리고 스케줄을 잡는 과정에서 '굳이 이렇게까지 걸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자원봉사 선생님들은 제주올레와 관련하여 여러 일자리나 개인 활동들로 바쁘신 상황이라 일정을 조율하기가 쉽지 않았고, 설혹 일정은 맞더라도 내가 완주를 위해 걸어야 할 코스와 거리가 멀어 오기를 망설이시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제주올레 10코스는 서쪽인데, 제주 동쪽 세화에 사시는 분이 나와 10코스를 걷기 위해서는 왕복 4시간을 써야 하니 부담이 되는 상황인 것이다. 비장애인들은 올레 코스의 파란색, 주황색 리본이나 화살표를 보면서 방향을 잡아 천천히라도 혼자 걷기도 하고, 혼자 걷기 무섭거나 외로운 사람들은 사단법인 제주올레에서 제주올레 아카데미 교육을 수료한 자원봉사자들이 비장애인들과 단체로 함께 걷는 '함께 걷기 아카데미 자원봉사'에도 참여할 수 있지만, 중심시야가 안 보이는 저시력 시각장애인인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때는 '함께 걷기 아카데미 자원봉사'에 신청하여 걸어보려고 했으나, 내 계획을 들은 어떤 올레 자원봉사 선생님이 "함께 걷는 비장애인들에게 민폐"라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을 들으며 생각을 접었다. 그분 말을 빌자면, "함께 걷기에 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제주도까지 와서 시간을 내어 걷는 것인데, 시각장애인이 참여함으로써 전체 참여자들이 걷는 속도가 지연되면 자원봉사 선생님도 힘들고, 비장애인들도 시각장애인 속도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민폐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때부터일까, 나는 올레를 걸으면서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올레 코스들을 걸으면서 쉽게 연결되지 않는 자원봉사자들 문제로 자꾸 '민폐'라는 단어가 마음을 복잡하게 하였다. '시각장애인인 내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이렇게까지 어렵게 부탁하며 걸어야 할까? 그리고 이번에 걷는다고 하여도 앞으로는 다시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고민이 밀려와서인지, 아니면 민폐가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인지, 내가 먼저 도착해서 자원봉사 선생님을 맞이하려고 했는데 그분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화를 받으니 '민폐'라는 단어에 쫓겨 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먼저 도착하신 이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올레 간세 스탬프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광치기해변 1코스 종점 올레 간세는 제주 검은 현무암을 다듬어 반원형으로 쌓아서 올레꾼들이 앉아서 성산일출봉을 바라보기 쉽게 만들어 놓은 돌조형물 끝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돌조형물은 꼭 바다소라의 속을 끄집어낸 것처럼 머리 쪽은 두껍고 꼬리 쪽은 가늘고 긴 형상으로, 등 쪽은 둥글고 매끈하게 다듬어 놓았는데 올레 간세 파란 스탬프 조형이 머리 쪽에 서 있다. 제주올레 27개 코스 전 구간의 시작, 중간, 끝지점에는 제주의 조랑말을 간단한 도형으로 형상화한 파란색 간세 스탬프가 세워져 있다. 제주의 하늘색 조랑말 모형의 머리는 작은 네모이고 몸통은 큰 네모이다. 손으로 더듬어 만져보면 네모 모형의 몸통의 바깥쪽으로 작은 머리 모형이 툭하고 튀어나와 있는데, 이 머리 모형을 목 역할을 하는 직사각형의 일자형 구조물이 몸통과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몸통의 역할을 하는 직사각형 모형 아래에 다리 역할을 하는 2개의 긴 직사각형 구조물이 지면과 연결되어 몸통을 떠받치고 있다. 또한 조랑말 네모 몸통 쪽에 여닫이 작은 문을 만들어 안쪽에 코스의 지점별 디자인이 담긴 도장과 스탬프가 있어 제주올레 패스에 찍을 수 있게 하였다. 시각장애인인 내게 정말 아쉬운 건 그 도장에 점자가 없다는 점과 스탬프 잉크가 잘못하면 손에 묻기 쉬운 형태라는 점이다. 또한 제주올레 여행자 패스에도 점자가 없어 매번 자원봉사 선생님들께 부탁하여 여행자 패스에 제주올레 스탬프 도장을 찍었다.

내 올레패스에 스탬프 도장을 찍어주며 이 선생님은 약속 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해서 광치기 바다의 가슴 에이는 바닷바람을 여유 있게 즐기셨노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기사님과 작별인사를 하고 성산일출봉을 향해 뻗은 광치기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때마침 '파바박' 하는 소리와 함께 조련사를 태운 경주마 한 마리가 앞쪽에서 달려와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섭지코지 쪽으로 길게 뻗은 파도치는 광치기해변을 '파바박' 소리를 내며 쉬지 않고 달리는 경주마를 뒤돌아보며 이 선생님은 요즘 올레꾼들이 마치 저 경주마처럼 올레를 걷는다며 아쉬워하셨다. 나는 이 선생님께 제주올레는 어떻게 걸어야 좋은지 물었다. 이 선생님은 "올레는 간세처럼 걸어야 제맛"이라고 응답하셨다. 간세라는 말은 제주어 '간세다리'에서 '간세'라는 부분만 차용한 것으로 제주에서는 '간세다리'라고 하면 일상에서 행동이 느리고 굼뜬 사람이나 게으름뱅이들을 싸잡아 욕하는 말이라고 한다.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조랑말 모형의 디자인을 만들고 명칭을 고심하다가 올레꾼들이 길을 걸을 때 크고 빠른 경주마가 아닌 작고 느린 제주 조랑말처럼 천천히 여유 있게 걸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간세'라고 정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다시 성산일출봉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선생님이 내게 얼굴을 돌리며 "우리 오늘 어떻게 걸을까요?"라고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나는 이 선생님을 마주 보며 "간세처럼요"라고 웃으며 대답하였다. 마침 쌩하고 등 뒤에서 부는 아침 성산포 바람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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