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헤어졌던 순간에는... 13화

약간 피폐한 로맨스 소설

by 맑고 투명한 날

김미숙...


그래 그러고 보니 이 모든 사달의 중심에는 김미숙. 네가 있었다.

2년이나 사귄 나의 연인 지소영을 사주해...

아니지 부추겼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게 만들고, 결국 난 큰 실망 속에서,

지소영과 벌어진 틈새로 2년 전 이미 헤어졌던 조현영을 다시 만나게 되는 계기를 만든 인물이다.


참 뻔뻔한 인간.

남의 연애에 감 놔라 배 놔라를 할 만큼 잘나 보이지도 않는데...


그래서 2년간 아무 문제 없이 지내왔던 지소영이 더 미워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김미숙은 지금 날 자극하고 또 자극한다.


"사람이라면 양심이 있어야지. 여자친구가 마음에 안드는 말 한마디 했다고, 그걸 가지고 꼬투리 삼고, 그걸 또 남자가 삐져서 애인에게 연락도 제대로 안 하고... 거기다 결정적으로 다른 여자랑 바람까지. 정말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네."

"그만... 하지..."


정말이지 내 눈앞에 김미숙이 있었다면 단언컨대 절대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하긴. 내가 왜 그만해야 하는데. 아직 할 말이 산더미처럼 남았는데. 내가 왜 그만해!!!"


김미숙은 날 향해 고함을 쳤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광기...


그래 맞다.

이건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상상조차 못 할 미친 짓이니까.

광기가 맞겠다.


그런데 내가 미친 여자와 말을 섞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지?


"그러니까 남자답게 어서 소영이에게 사과하고 친구인 나에게도 지금의 무례를 사과해야..."


틱...


난 바로 통화를 종료한 뒤. 바로 김미숙의 번호를 차단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다른 번호로 또 전화를 할 수 있으니 아예 전원까지 꺼 놓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쓸데없이 이야기를 하는 건.

그야말로 기력 낭비일 뿐이다.


답이 없는 대화를 왜 내가 계속해야 하나?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통화종료가 절대 좋은 건 아니지만.

김미숙은 이런 대접을 받아도 상관없는 그런 여자다.


그래 그런 여자.

남의 연애에 끼어들어 파탄이나 내려는 나쁜 마녀 같은 여자.


난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마치 쓰나미가 정신없이 밀려오는 것 같은 이 고난이.

언제쯤 완전히 끝나게 될지 가늠조차 안된다.


담배를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이 피워서 그런 건지 참을 수 없을 만큼 졸렸다.

얼른 방으로 가 안대를 하고 잠을 청했다.


괴롭고 힘든 일이 겹겹이 쌓여 해결하기 곤란할 땐.

만사 제쳐놓고 그냥 자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강제로 잠을 자는 것...


이건 어릴 적 날이 잔뜩 선 말로 날 끝없이 학대하던 부모에게서.

유일하게 해방되는 방법이기도 했다.


잠... 그래 잠...

난 그렇게 잠에 빠져 들었다.


**


"일어 나... 어서 일어나라고!!!"


누군가 내 몸을 마구 흔든다.

날 깨우려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눈이 떠지지 않는다.


잠깐 이 목소리는... 아주 익숙한 목소리인데...

지나칠 정도로 익숙한 목소리..


"자고 있는 애를 왜 자꾸 깨우는 거야?"


엄마의 목소리다.


"야! 넌 지금 이게 정상으로 보여?!!"


그리고 언제나 화가 나 있는 아빠의 목소리.


"이거 아무리 봐도... 큰일인데... 성근아. 야 최성근. 어서 일어나. 일어나라고!!!"


아빠는 날 격렬하게 흔든다.

그런데 난 눈도 떠지지 않고 말도 나오지 않는다.


"넌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넌 뭐 했어, 어?!!"


평소에도 화가 잔뜩 난 아빠의 목소리가 지금은 더욱 크게 울려 퍼진다.


"놀고 자빠졌네. 그렇게 애가 걱정되면 네가 더 신경을 써야지. 왜 나한테만 책임을 미루는데. 내가 애 보는 보모냐?"

"넌 엄마란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 태평하게 말을 하냐?"

"그럼 넌 아빠란 놈이 애한테 신경이나 썼고?"

"어이구... 정말 말이 안 통하는 여편네."


또 시작이구나...

오늘은 나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는구나.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눈이 떠지지 않고 입에선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 걸까?

이상한 일이다.


"빨리 병원에 데려가야 해!!!"

"그럼 옷이라도 제대로 입혀야지. 밖이 추운데 이렇게 나가면 성근이 감기 걸린다고."

"어이구, 그렇게 애가 걱정되는데.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가만 둔 거야. 대단하다. 대단해! 집구석에서 하는 것도 하나 없이 밥이나 축내는 돼지년이!!!"

"뭐라고? 너야 말로 밥벌이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 어디서 큰 소리야, 큰 소리는!!!"


제발 그만해요.

그만 좀 하시라고요.

정말 듣기만 하는데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그냥 두 사람이 하는 말만 들어도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단 말입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좀... 그만하시라고요.


하지만 이상하게 입 밖으로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내가 운전할 테니까. 어서 성근이나 살펴!"

"어이구. 남편이란 놈이 무능력해가지고는..."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중에. 우선 지금은 성근이를 좀 챙기자고."

"누가 보면 엄청 아들을 사랑하는 아빤 줄 알겠네."


분명 그다음에 대꾸가 있어야 했지만.

아버지는 침묵했다.

그 대신 내 몸이 갑자기 공중에 붕 뜬 느낌이 들었다.

.

.

.

그리고 갑자기 순간이동이라도 했는지

낯선 침대에 누워있는 느낌이 든다.

역시나 눈은 뜨지 못하겠고, 계속해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주변에서 말하는 소리만 아주 예민하게 들릴 뿐이다.


"의사 선생님 우리 애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죠?"


평소 답지 않게 날 엄청 걱정하는 엄마의 목소리...

솔직히 너무 역겨웠다.


"혹시... 부모님 중에 수면제 복용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제가..."

"저도..."


의사의 말에 부모님은 둘 다 대답했다.


수면제?

수면제라니?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이 수면제를 사용했다고?

잘 모르겠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약은 아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두어야 합니다."


갑자기 의사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우리 성근이가 왜 이런 거죠?"


아빠도 날 걱정한다. 전에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지금 상황이 내겐 너무 이상하다.


언제나 나에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날 너무 힘들게 하는 말만 했는데.

언제부터 부모님이 날 걱정해 주었다고...


"수면제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잠을 자는 상태입니다."

"성근이가... 수면제를 먹었다고요?"

"그럼 위세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부모님의 목소리가 굉장히 다급했다.

날 걱정하는 목소리...


그런데 그런 목소리가 내겐 낯설어도 너무 낯설다.


"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날 테니까요. 요즘 수면제는 영화나 드라마처럼 한 번에 많이 복용한다고 해서 죽거나 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뭡니까? 의사 선생님."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러니 다시 한번 강조하지면, 약을 아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꼭 두세요."


아쉽다...

갑자기 의사 선생님 말을 들으니 너무 아쉬웠다.

잘만 하면 부모님이 그렇게 원하는 것처럼...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

.

.

"아냐, 아니라고... 아냐... 난 죽고 싶지 않아!!!"


난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앞이 안 보인다.


내가 왜 갑자기 장님이 된 걸까?

난 얼른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래 안대.

안대를 쓰고 있었구나.


얼른 안대를 벗어 한쪽 구석에 던졌다.

잘 보인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잘 보인다고.


"후우..."


과거의 기억은 언제나 날 힘들게 한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기 위해 담뱃갑을 집었는데...

없다. 단 한 개의 담배도 없었다.


"이런 젠장..."


난 대충 옷을 입고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갔다.


"성근아!"


그렇게 건물을 막 벗어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날 부른다.

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성호?"

"그래, 나다."


서성호였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친구.


"여긴 언제 왔어?"

"네가 핸드폰을 꺼 놓아서 이렇게 바쁜 내가 직접 여기까지 행차했잖아."

"그게 말이야..."

"소영이가 아주 난리가 났어. 왜 너 같은 놈을 소개해 줘서 자길 힘들게 하냐고..."


성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왜 내게 왔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 오히려 잘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서성호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엄청 많았으니까.


"성호야, 우리 바람이나 쐴래?"

"남자끼리 재미없게 무슨..."

"너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고 해서 말이야."

"자식... 오늘 좀 심각해 보인다."


서성호는 어울리지도 않게 내 눈치를 살폈다.




14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