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피폐한 로맨스 소설
작은 엄마는 항상 그랬다.
날 향한 그 잔잔한 미소.
만약 내가 이런 여자를 만났다면...
아버지처럼 한번 돌아서 만나진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날 향해
저주 가득한 독설만 퍼붓던 엄마와는 비교조차 안된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랬다.
내가 원하는 대로 절대 흘러가지 않는다.
작은 엄마는 내가 사 온 음식을 모두 먹은 직원들을 전부 퇴근시키고 난 뒤.
나와 마주 앉았다.
"우리 아들... 그동안 좀 변한 거 같아..."
"그런가요?"
"응, 얼굴에 고민이 잔뜩 있다고 쓰여있어. 큭큭큭."
작은 엄마는 작고 하얀 손으로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 드리려고 치즈 케이크를 가장 큰 걸로 샀는데... 하나도 안 남았네요."
"괜찮아. 그보다 더 좋은 걸 우리 아들과 먹으면 되니까."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나도 모르게 작은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작은 엄마는 될 수 있으면 모든 시간을 아버지와 함께 하려고 했다.
"오늘 말이야... 괜찮으면 아버지랑 우리 셋이 함께 식사할래?"
작은 엄마가 굉장히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작은 엄마가 하려는 말의 뜻이 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아버지를 용서하라는 것이다.
용서라...
아버지를 내가 용서를 할 게 있었나?
글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아버지가 왜 내게 용서를 구하야 하나.
이렇게 좋은 작은 엄마도 소개해 주었는데 말이다.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거 같아요."
"그... 그러니..."
하지만 밀이다.
난 그럴 수 없었다.
작은 엄마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아직 시간이 더 걸릴 거 같아서요."
"..."
"시간이 좀 더 흐르면... 그땐 가능할 거 같기도 한데요...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
내 말에 작은 엄마의 표정은 굉장히 복잡해 보였다.
하지만 작은 엄마는 내게 단 한 번도 아버지를 강제로 만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거절하면
그냥 아쉬움 정도만 표현할 뿐.
물론 그 작은 아쉬움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말이다.
나의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아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선명해지고
더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걸 아는 작은 엄마는 그래서 절대 강요하지 않았다.
언제나 부드럽고 날 배려해 주는 권유로 그쳤을 뿐이니까.
"그 이가 어제 이사로 승진했어."
"그래요?"
"응, 그 이는 유학파도 아닌데 국내파 중에서는 최연소로 승진했다고 하더라."
"뭐, 아버지야 능력이 좋으시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약간 시크한 내 반응에 작은 엄마도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아버지는
친밀한 가족이 아니라 아무 상관없는 남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날 끝까지 인정하지 않던 엄마에 비하면
아버지를 그 정도로 거부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가슴속 깊은 곳에선
끊임없이 부모님 모두를 심각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그래. 나중에... 나중에는... 우리 셋이 함께하는 날이 오겠지."
"예."
거짓말이다.
난 작은 엄마의 말에 거짓말로 대답했다.
우리 셋이 함께 하는 날은
아마도 아버지의 장례식이 아닐까 한다.
내가 부모님을 인정한다는 것...
글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건 절대 쉽지 않다.
그만큼 내 상처는 너무 깊었다.
"요즘 그이도 늙었는지 많이 외로워하고... 특히, 널... 많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절요? 에이, 그건 엄마가 잘못 보신 거예요. 아버지는요. 누구보다 제가 잘 알아요. 절대 외로워할 분도 아니고... 특히나 절 그리워할 분도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는 거야. 그냥. 그렇다고..."
작은 엄마는 내가 아버지에 대해 심하게 부정하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실망했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에 대해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면
과거 어릴 적 부모님과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내던 시절처럼
엄청난 불행이 또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래. 그건 다음에 이야기하고... 우리 아들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은데 말이야."
"하하하. 엄마에게는 비밀이 생길 수가 없네요."
"맞아, 원래 여자의 육감은 무시 못하지... 특히나 내 육감은 말이야. 큭큭큭."
"하하하."
즐겁다.
작은 엄마와 만나면 항상 즐겁다.
항상 우울하고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내 인생이
작은 엄마를 만나 다시 충전되는 느낌이다.
"엄마, 저 배가 많이 고픈데요. 함께 근사한 저녁 드시러 가지 않으실래요?"
"그래. 나야 당연히 좋지... 그러면... 잠시 그이랑 전화를..."
작은 엄마는 핸드폰을 꺼내며 내 눈치를 살폈다.
"어서 전화하세요. 전 괜찮아요."
"그... 그래."
엄마는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하는 것도 내 눈치를 살폈다.
날 배려하는 그런 모습이 고맙기도 하다가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까지도 날 완전한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응, 나야. 저녁은 먹었어? 오늘은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 누굴 만나냐고?"
작은 엄마는 날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거 같았다.
"맞아... 성근이랑 같이 있어... 오랜만에 둘이 데이트를 하다가 들어가려고... 차는 지하 주차장에 놓고 성근이 차로 이동하려고 하는데 말이야."
작은 엄마가 날 바라보았다.
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키? 그냥 내가 가지고 있다가... 아... 알았어. 그럼 잠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
작은 엄마는 전화 통화를 마치고 난 뒤.
죄를 지은 사람처럼 내 눈치를 또 살폈다.
나도 잘 안다.
아버지가 날 보기 위해 엄마에게 차 키를 받으려는 걸.
차 키는 다 핑계지...
내 얼굴을 잠시라도 보려는 아버지의 변명.
"엄마. 전 주차장 입구에 있을 게요. 엄마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을 테니까. 차키 아버지에게 건네주시고 제게 오세요."
"그... 그래."
작은 엄마도 내 뜻을 알고는 더 이상은 내게 아버지를 만나보라는 강요나 권유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작은 엄마의 차를 뒤따라 가며 도로를 달렸다.
그리고 아버지와 작은 엄마가 함께 사는 고급 빌라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운동장처럼 넓은 지하 주차장에는 고급 외제차들이 띄엄띄엄 주차되어 있었다.
끼익...
난 작은 엄마가 잘 보이는 곳에 차를 주차하고 기다렸다.
작은 엄마의 차가 주차를 하자 아주 낯익은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작은 엄마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버지는 끊임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날 찾는 거겠지.
작은 엄마가 아버지에게 뭐라고 심각하게 말을 하는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크게 실망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아버지도 이젠 많이 늙어서 머리카락도 많은 부분이 하얗게 변했고
얼굴에 주름도 많아졌다.
그래서 날 애타게 찾는 건가?
이제 자신은 늙어 힘도 없어지니까.
그럼 어린 나에게 잘했어야지.
왜 그땐 날 힘들게 했나?
그래도 나의 아버지니까 아무리 용서하고 싶어도... 그게 쉽지 않다.
하지만 점점 약해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여러 감정이 마구 뒤섞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차문을 열고 나가 아버지에게 달려가고 싶다가도.
어릴 시절 나에게 주었던 그 수많은 상처들이
날 아버지에게 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아버지는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뒤돌아 갔다.
난 작은 엄마를 태우기 위해 천천히 차를 몰았다.
작은 엄마가 내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이제 작은 엄마를 태우고 출구로 나가기 위해.
아까 작은 엄마와 아버지가 있던 곳으로 크게 돌아 가는데.
이미 집으로 들어간 줄 알았던 아버지가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운전석에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버지도 날 바라보았다.
우린 그렇게 눈이 마주쳤다.
좀 전에 멀리서 볼 때보다 더 많이 늙었다.
난 잠깐 차를 세워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내 발은 내 의지와는 반대로 엑셀을 강하게 밟아버렸다.
부우웅...
난 순간 당황해 백미러를 보았다.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점점 더 빠르게 멀어졌다.
미래의 내 모습...
그래 지금 아버지의 모습은...
내가 나이를 더 먹고 아버지처럼 늙고 난 뒤의
바로 내 모습일 것이다.
나와 아버지와의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여러 기분이 마구 뒤섞여 굉장히 좋지 못했다.
"엄마, 오늘 우리 좋은데 가요."
"그래. 난 우리 아들이 가자고 하는 곳이면 어디든 다 좋아."
작은 엄마의 그 환한 미소.
그렇게 난 한강이 보이는 근사한 식당으로 엄마와 함께 갔다.
**
우린 한강이 잘 보이는 창가에 함께 앉았다.
근사한 음식과 잔잔한 음식이 흐르는 고급 레스토랑.
고급 레스토랑 안에는 손님도 많지 않고
그래서 일반 식당처럼 소란스럽지도 이런저런 사람에 치이지도 않는다.
엄청난 여유가 흐르는 곳이다.
작은 엄마는 이런 분위기에 굉장히 만족해했다.
"그런데 성근아, 여긴 예약한 거니?"
"아니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 사장님 아들이 저랑 친구라서 예약 없어도 되는 거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 뭐, 여기 들어오는 건 그렇다 치지만... 이런 창가 자리는 다 예약석이라고 알고 있는데..."
"언제나 그렇지만... 인맥이 중요한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작은 엄마는 내 설명에 조금은 안도한 거 같았다.
"이런 좋은 분위기에... 그이도 너랑 함께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엄마도 참... 나중에 기회가 있겠죠."
"그럴까..."
"그럼요."
작은 엄마의 표정이 굉장히 씁쓸했다.
"그래. 이제 음식도 먹을 만큼 먹었고 분위기도 좋고... 이젠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원지 말해봐."
작은 엄마는 날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사실은요..."
난 그동안 내게 있었던 일들을 작은 엄마에게 모두 말하기 시작했다.
21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