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헤어졌던 순간에는... 29화

약간 피폐한 로맨스 소설

by 맑고 투명한 날

사회생활이 힘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

역시나 인간관계의 마찰에서 오는 어려움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한번 틀어진 관계는 절대 예전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남들에게 전에 좋았던 것처럼

그렇게 보이도록 가식적인 행동만 할 뿐...


내가 지금 입에 물고 있는 이 담배도

몸에 엄청 나쁘고 될 수 있으면 피우지 않는 게 맞지만.


심적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딱히 없는 상태에서

이것마저 없다면 정말 암담함 그 자체가 된다.


우린 그렇게 몸에 독을 푼다.

그 독이 몸을 망가지게 하지만

우리같이 남의 밑에서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독으로 하루를 버틴다.


그때 김 과장이 내 옆에 다가왔다.


"오셨어요?"

"응."


얼굴이 무척이나 안 좋다.

입에 근심걱정이 가득한 상태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식 뻘인 신입사원에게 그런 개망신을

사무실에서 공개적으로 당했는데

속이 좋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오늘 퇴근 후에 회식하자고 하면... 당연히 안 하겠지?"

"... 예..."


이럴 땐 솔직한 게 좋은 거다.

내가 신입이었을 때만 해도 회식하자고 하면

싫어도 우선 참석은 했다.

그다음에 도망을 가든 뭐 하든 그건 참석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지금 신입사원들은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고

그냥 참석 자체도 안 한다.


그 이유는

시대가 변한 것도 있지만.

예전처럼 간절함이 없는 거다.


이 회사가 아니어도.

아니 이 회사에서 잘려 다른 회사로 이직을 못해도

그냥 대충대충 살 수만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한 것 같다.


뭐 좋게 말하면 어디에 구속되지 않는 멋있는 삶이고

나쁘게 말하면 대책 없이 인생을 사는 거다.


그거야 자기가 결정하는 거다.

자기 인생이니까.

결정하고 그 결과도 자기가 책임지고...

남들 인생에 내가 관여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

다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애도 아닌데...

그럴 시간이 있으면 내 복잡한 인생이나 더 신경 써야 한다.


"그렇겠지... 맞아 그럴 거야..."


풀이 많이 죽은 김 과장.

그런데 이상하게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런 모습도 다 자길 포장하려는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날 대놓고 무시하고 내 업무 평가를 개판으로 하면서...

내가 그걸 모를 거라 생각하나...


"어떻게 된 게... 이딴 회식하나 하는 것조차 밑에 놈들 눈치나 봐야 하다니... 세상이 잘못되어도 엄청 잘 못 된 거 같은데 말이야. 안 그래?"

"... 저야 잘..."


지금 같은 어리석은 질문에는 현명한 답이 필요 없다.

아니 절대 해선 안된다.


그냥 바보처럼 대답하고 행동하는 게 최선이다.

그래야 뒤탈이 없다는 걸 사회에 나와서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에이... 자넨 다 좋은데 그게 문제야. 뭔가 히마리가 없어."

"그런데... 히마리가 뭔가요?"

"힘이 없다고. 힘 말이야. 힘."

"..."


어디서 이상한 말만 쓴다.

이러니 다들 김 과장을 싫어하는 거 아닌가.

독단적이고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사는 외톨이.


"그럼 말이야... 퇴근 후에 최대리랑 나랑 둘이서만 한잔 하는 건 어때?"

"오늘... 말입니까?"

"그럼 오늘이지. 내일 마시나?"


오늘은 내가 지소영을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하는 날이다.

이깟 인간 같지도 않은 김 과장에게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힘들 거 같습니다."

"응? 왜?"


왜라니?

김 과장... 이 사람 정말 미친 거 아닌가?

내가 자기 기분에 맞춰 술이나 마셔주는 그런 존재로 보이나?


"제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다음에 드시는 건 어떨까요?"

"이런 젠장!!!"


갑자기 날 날카롭게 노려보는 김 과장.

난 그 모습을 보고 너무 당황했다.


"어떻게 된 게... 술 마시는 거 하나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야. 어떻게 된 게 이 회사에선 나랑 같이 술을 마셔줄 인간이 하나도 없는 거냐고?"

"과장님..."

"마시기 싫으면 그만둬. 최대리 자네도 그러는 거 아니야. 오늘 내가 그렇게 개망신을 당하는 걸 눈앞에서 보고도... 먼저 나에게 위로주 한잔 사주지는 못할 망정 그런 식으로 나오다니..."

"..."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거 같아. 자넨 그래도 요즘 놈들과 다르게 눈치도 있고 윗사람 비위도 잘 맞추는 줄 알았더니만... 전혀 아니야. 에잉!"


김 과장은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그대로 출구로 갔다.


참 황당했다.

어떻게 된 게 내 주변은 전부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한지 모르겠다.


"하아..."


난 또다시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저런 꼬장을 앞으로는 받아줄 필요가 없다는 건 정말 좋은데.

김 과장이 이 회사를 나가기 전까지 얼마나 더 심해질지 걱정이 앞섰다.


머리가 또 터질 것 같다.

이건 내 인생이 아니라 남의 인생을 사는 것 같았으니까.


**


그렇게 오후 업무가 시작되었다.

모두가 자기 일에만 집중해서인지 아니면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건지.

사무실 분위기는 남극보다 더 추웠다.


지소영에게 보낸 문자의 답은 여전히 없었다.

나도 일을 해야 하는데...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또 문자를 보내야 하나.

아니면 전화를 해야 하나.


내가 너무 심했나?

처음부터 소영이와 헤어지겠다는 나름 지침 비슷한 걸 세워놓고는

날 그 방향으로 강하게 몰아붙인 건 아닌지...


자꾸 머리가 복잡해진다.


"최대리!"

"아... 네..."


혼자서 뭔가 작성하고 있는 거 같던 김 과장이 날 향해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사원들 전부가 곁눈질로

김 과장과 날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보고서가 왜 이리 개판이야?"

"보고서가... 개판이라고요?"


난 일어나 김 과장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렇잖아. 이게 보고서야. 이런 개판으로 작성한 걸 보고서라고... 자넨 대리가 되어서 이런 개판 보고서를 확인도 제대로 안 하나?"

"제가 좀..."


요즘 회사에선 거의 대부분 회사 내부에서만 사용하는 폐쇄형 네트워크 통신망인 인트라 넷을 이용해 업무를 처리한다.

그런데 어울리지도 않게 무슨 보고서를 종이에 출력까지 해서...

그래서 난 그걸 보고자 했다.


"최대리...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 뭐 그런 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요... 전산망..."

"최대리...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여!!!"

"...???"


갑자기 김과장이 폭주했다.

이 회사에 들어와 사원이 올린 보고서를 굳이 종이에 출력해

그걸 가지고 꼬투리를 삼는 건 정말 처음 보았다.


꼬장도 이런 꼬장을 부리다니...

이러니 신입사원들이 꼰대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최대리가 이렇게 물러 터지니까. 신입 사원들이 개판을 치는 거 아냐. 과장인 나에게 도전이나 하고!"


그 말에 아까 김 과장에게 사과까지 했던 신입 사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과장님... 제가 분명 사과했잖습니까."

"내 분이 안 풀려. 너도 나처럼 꼭 밑에 놈에게 당해봐라. 그래야 지금의 내 심정을 똑똑하게 알게 될 테니까."

"아니 진짜..."


그 말에 흥분한 사원이 다시 김 과장에게 다가왔다.


"우리 잠깐 바람이나 쐬지."

"대리님... 지금..."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잠시 나갔다 오자니까."

"..."


난 신입 사원에게 다가가 사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업무 시간에 자알 한다. 잘해. 대리란 새끼나 신입이란 놈이나 똑같아. 똑같다고. 못난 놈들..."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과거 내 부모가 내게 했던 그 비아냥이 생각났다.


그런데 김 과장은 내 부모도 아닌데...

날 지금 엄청나게 조롱했다.


"그깟 술 한잔 같이 마시지 않겠다고 해서... 지금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나오는 겁니까?!! 예!!!"


나도 모르게 김 과장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어... 최... 최대리... 최성근... 야... 야..."

"왜요? 내가 대리라 과장님이 말한 건 다 따라야 합니까!!"


내 인내심이 끊어진 순간...

나도 모르게 김 과장을 향해 몸을 날리려고 했다.


"대리님... 참으세요!!!"

"대리님... 진정하세요!"


가만히 있던 사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날 말렸다.


"저... 저..."


김 과장은 그런 모습을 보며 말문이 막혔는지 당황했다.


"대리님. 우리 잠시 쉬죠."

"옥상에서 담배나 하나 피워야겠습니다."


마치 김 과장이 들으라고 하는 것처럼 사원 모두가 흥분한 날 잡고 사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거 놔바... 놔보라고...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난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사원 모두가 날 붙잡고 진정시켰다.


"대리님... 참으세요."

"맞습니다. 대리님이 참으세요."


경멸에 가득 찬 눈빛.

사원들은 그런 눈빛으로 김 과장을 바라보았다.




30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