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헤어졌던 순간에는... 28화

약간 피폐한 로맨스 소설

by 맑고 투명한 날

"너... 너... 나이로 보나 직책으로 보나... 내가 너에게 반말 좀 한 게 그렇게 아니꼽냐? 엉!!!"


김 과장은 자신의 위신이 도전받았다고 생각한 거 같았다.

거기다 회사에서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까지...

나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절대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건 김 과장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이다.

여긴 회사고 확실히 말해 공적인 자리다.

신입사원에게 과장이 반말을 하는 게 절대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우리나라 사회에선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가는 게 태반이다.


"이 회사 들어오려고 박 터지게 공부했는데... 기껏 들어왔더니만 능력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과장 밑에서 내가 진짜 이런 인간 이하의 취급까지 받아야 해!!!"


신입사원도 참고 참다가 터진 것 같았다.


"아니 이 자식이... 어디서..."


김 과장은 평소보다 더 흥분했다.


"과장님... 제발 좀 참으세요. 예. 이러지 마시라고요. 제발요!!!"


난 김 과장을 몸으로 막으며 신입사원에게 제 자리로 돌아가라고 손짓했다.


"이 자식이라니요... 당신이 내 부모라도 됩니까? 내 부모도 나에게 이 자식, 저 자식이라는 말은 안 했어요!!!"

"뭐... 뭐... 다... 당신..."


김 과장 몸에서 힘이 갑자기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 자식 같은 놈에게 개망신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이제 회사에서 쫓겨나기 때문에

자신이 이런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해서일까.


난 힘이 빠진 김 과장을 자리로 데리고 가 앉혔다.

그리고 신입 사원도 그의 자리로 강제로 데리고 가 앉혔다.


지금 이런 상황인데도

진짜 사무실에 있는 단 한 명도 먼저 나서서 문제 해결을 돕는 놈은 없었다.


그냥 멍하니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숏츠 영상을 보듯.

굉장히 냉소적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지만.

나랑 나이 차이도 그리 많이 나지 않는 신입사원들의 사고방식은 완전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들은 소란이 모두 끝난 걸 보고는 자기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마치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은 그냥 흥미를 잠시 끄는 정도의 일이고.

이제 모두 끝났고 더 이상 자극적인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다는 듯...


"과장님... 저랑 바람 쐬러 가시죠."

"허... 허어..."


그냥 멍한 표정.

김 과장은 너무 어이가 없는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였다.


난 다른 사원들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관련 없으면 신경 쓰지 않으려는 그런 태도다.


"가시죠. 과장님."

"..."


난 강제로 과장님을 끌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한 대 피우시죠."


난 김 과장을 의자에 앉히고는 바로 입에 담배를 물려주었다.


"후우... 최대리 고마워."


김 과장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날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굉장히 측은했다.


나도 김 과장처럼 이 회사에서 필요가 없어지면

지금처럼 철저하게 버려질 것이다.


"고맙기는요..."


나도 얼른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기분이 정말 우울했다.


"사실 말이야. 아까 그놈이 내게 다가왔을 때... 얼마나 떨리던지... 최대리가 없었으면 젊은 놈에게 개망신을 당했겠지."

"진짜 싸우려고 한 건 아닐 겁니다."

"아니야. 아까 날 죽일 듯 다가왔을 때... 난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에이. 과장님도 참..."


나도 사실 김 과장 말에 동의한다.


요즘 들어온 신입 사원들 보면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고

그 행동의 대가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철부지 아이처럼 생각을 안 한다.


그러다 큰코다친다.

세상이 그리 만만하고 호락호락한 곳이 아닌데 말이다.


김 과장이 이 회사를 나가고 난 뒤.

그놈은 내게도 아까 김 과장에게 했던 행동을 그대로 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놈은 이 회사를 나가야 한다.

그래야 내가 편해지니까.

난 김 과장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다.

아직 난 이 회사에서 생존했으니까.

"내가 학교 다닐 때도 싸움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그냥 무식하게 공부만 했고 그렇게 해서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김 과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최대리... 나 이 회사에서 잘려."

"예?"


난 일부러 크게 놀라는 척했다.

그게 김 과장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했다.

이미 그의 미래를 알고 있지만.

내가 김 과장이 이 회사에서 나가게 되었다는 걸 김 과장이 알게 되면.

그건 또 다른 지옥이 시작되는 거니까.


"너무 놀랄 건 없다고. 황이사님이 회장님 하고 의견 충돌이 좀 심하게 있었나 봐. 난 서로 사돈이라 절대 이런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줄을 댄 건데... 후우... 그게 썩은 동아줄 일 줄이야."

"..."

"그래도 황이사는 사돈지간이라 그런지 잘리지는 않는 거 같던데... 황이사 라인들은 전부 퇴사하는 걸로 결정되었다는데... 나 같은 과장 나부랭이까지 내보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후우..."

"..."


난 가만있었다.

그가 하는 말에 동조하지도 의문을 표하지도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도록 놔두고 그러다 마음이 풀리면 그걸로 족한 거다.


괜히 불똥이 나까지 튀면 내가 더 곤란해지니까.


"그런데 최대리는 왜 말이 없어?"

"제가 할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가..."


김 과장은 좀 섭섭해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처지를 절대적으로 공감해 주고 맞장구도 쳐주고 할 거라 생각한 거 같은데...

괜히 잘못 엮이면 나도 잘릴 수가 있다.


몸조심해야 한다.

아직 결정 난 것도 아닌데 괜히 설레발 칠 필요는 없으니까.


"그만 내려가자고... 업무시간인데 너무 자리를 비우는 것도 아니지. 아직 난 이 회사의 과장인데..."

"그럼, 같이 내려가시죠."


우린 그렇게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 분위기는 그야말로 시베리아 벌판처럼 아주 냉랭했다.

김 과장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지

자기 자리에 앉아서도 집중을 하지 못했다.


난 얼른 내 핸드폰을 봤다.

이제 지소영에게 전화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부재중 전화 47통...


이제 지소영의 고문은 끝났다.

그럼 이제 날 위한 일을 할 차례다.


"나랑 이야기 좀 하자고."


아까 김 과장에게 달려들던 사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지금 업무 시간인데요."


말 참 싸가지 없이 한다.

그래 차라리 고맙다.


날 위해서 너 같은 싸가지 없는 놈은 회사를 나가줘야겠다.


"이것도 업무니까 이야기 좀 하자는 건데."


난 놈에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사회생활을 해도 내가 너보단 많이 했다.

어디서 나까지 우습게 보네.

이래서 어느 조직이든 서열이 한 번 무너지면 피곤해지는 거다.


"아... 네네..."


난 김 과장을 바라보았다.

김 과장은 그런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놈을 데리고 또 옥상으로 올라갔다.


"담배 피나?"

"예."

"그럼 이거 피워."

"아닙니다. 제거 피겠습니다."


후우...


우린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담배연기만 하늘에 뿜었다.


"김 과장님이... 퇴사한다는데요."

"그래?"

"예. 인사과에 아는 친구가 있는데. 황이사 라인은 전부 정리가 된다고 하던데요."

"인맥이 좋은데..."


놈도 바보는 아니었다.

낌새를 보아하니 나처럼 김 과장이 이 회사에서 잘린다는 말을 들은 게 확실했다.

하지만 이미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 멍청이다.

그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김 과장에게만 보일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내가 편해지려면...

이 놈은 이 회사에서 나가야 한다.


"그럼 김 과장님이 나가면... 최대리 님이 승진하시는 겁니까?"

"그건 잘 모르지... 워낙 변수가 많은 게 회사생활이라서..."


이놈 벌써부터 나에게 아부성 말을 하기 시작한다.


"김 과장님이 워낙 꼰대짓을 많이 해서... 최대리 님은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잖아요."

"원래 나쁜 사람이 어디 있어? 다 회사에서 주는 자리가 그런 걸 요구하니까 그런 거지."

"그래도 김 과장은 나가야 합니다. 그건 저만 느끼는 게 아닙니다."

"그래. 그래. 그래도 김 과장님이 나이도 많고 직책이 높으니까. 썩 내키지 않더라도 사과를 하라고."

"꼭 그래야 합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대답은 시원시원하게 잘하는데.

그 모습을 보니 더욱더 정나미가 떨어진다.


그렇게 사무실에서 형식적인 사과를 하고

김 과장은 그걸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모양새로 대충 일이 마무리되었다.


절대 봉합되지 않는 상처.

난 너무 잘 안다.


그 후 사무실은 무거운 분위기가 되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점심시간이 되었고.

김 과장은 혼자 점심을 먹겠다고 먼저 나갔고.

다른 사원들도 알아서 점심을 먹으러 회사 식당으로 갔다.

같은 팀원인데도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이 존재한다.


난 점심을 먹자마자 옥상에 올라와 지소영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은 통화를 할 수 없으니...]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산 넘어 산이라고...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날 더 괴롭게 만든다.


"그래... 우린 헤어지는 게... 서로를 위해서 낫겠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김 과장이 회사에서 정리되듯... 지소영도 내게서 정리되어야 할 시점이다.


더 이상 시간 끌지 말자...

난 지소영에게 바로 문자를 보냈다.


[오늘 퇴근하고 만나자. 너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29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