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피폐한 로맨스 소설
사무실로 내려가니 김 과장 표정이 굉장히 좋지 못했다.
"어휴... 이걸 어떻게 해... 나 참나..."
김 과장은 혼잣말로 뭔가 불만을 계속 표출하고 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의 눈치를 봐야 했던 나다.
항상 주변 사람의 심기를 살피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럴 땐 건드리지 않는 게 가장 좋다.
저러는 이유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괜히 말을 걸거나 하면 불똥이 내게 튈 수도 있으니까.
"왜 날 정리하려는 건데... 왜? 왜? 왜?"
김 과장은 혼잣말을 하며 자리에서 안절부절 못했다.
김 과장 혼자 하는 혼잣말을 들어보니
내가 인사과 고대리에게 들었던 내용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다.
그래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회사 내에서 사내 정치 후폭풍으로 대규모 숙청의 희생양이 바로 자신이 되는 거니까.
자기 밥줄이 걸린 문제인데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겠지.
"최대리."
"예?"
"혹시 말이야. 회사에서 권고사직이나... 아니지 정리 해고 한다는 말... 혹시 들은 거 있나?"
"전..."
참 난감했다. 들었다고 하기도 뭐 하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도 뭐 하고.
인간적으로 보면 당연히 알려주면 안 되지만.
그러면 나중에 내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건 그 나름대로 또 문제가 된다.
"아니야... 됐어... 기껏 대리밖에 안 된 놈에게 그딴 정보를 줄 놈이 어디 있겠어."
"..."
김 과장은 자신이 이 회사에서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되어서일까.
이젠 사무실 내에서도 막 나갔다.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사실 내가 김 과장 따위에게 머릴 숙일 이유는 전혀 없다.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면 이런 무례하고 막돼먹은 인간과 말을 섞을 이유도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래 넌 빨리 이 회사를 떠나라. 그게 여러 사람을 도와주는 거니까.'
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자리에 앉아 오늘 하루 업무를 확인하고 있었다.
띠링...
그런데 문자가 왔다.
"최대리. 아직 업무 시작 시간이 아니라고 해도 핸드폰은 진동으로 해 두는 게 사무실 매너 아냐?"
"아... 죄송합니다."
난 얼른 핸드폰을 진동으로 바꾸어 놓고 내용을 확인했다.
[오빠, 지금은 결정했어?]
지소영의 문자...
내가 분명히 지금은 아니라고 했는데.
왜 이리 조급하게 구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회사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까. 내가 퇴근하고 난 뒤에 연락할게. 그러니까 퇴근할 때까지만 좀 참아.]
[내가 문자 보내는 게 그렇게 싫어?]
[그건 아닌데. 이런 식으로 자꾸 날 압박하면 내가 힘들어서 그래. 지금 회사 분위기도 굉장히 무겁고 긴장된 상태야.]
[왜 오빠는 항상 오빠만 생각해. 난 생각 안 해. 난 오빠 연락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 야냐?]
[그래 알았으니까. 제발 퇴근하고 이야기하자고. 제발.]
[왜 항상 오빠만 생각해. 난 전혀 생각 안 하고. 너무해]
하아...
지금 회사 돌아가는 분위기가 장난 아닌데. 지소영은 날 더욱 힘들게 하고 있었다.
[당연히 널 생각하지. 그러니까 내가 퇴근 후에 만나서 대화하자. 지금은 회사라 좀 그래.]
[아직 업무 시작도 안 했을 시간인데 뭐가 문제야? 나도 회사 다녀봐서 알아.]
으으...
미칠 것 같았다.
왜 이리 조급하게 구는 건지.
그리고 지소영 자신의 말대로
왜 넌 항상 너만 생각하고
난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으으... 날 희생양으로 삼으시겠다. 내가 그렇게 호구처럼 보이나. 이 새끼들이 정말 날 만만하게 본 거야. 그렇지. 그러지 않으면 이런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겠지..."
김 과장과 나.
단 둘 만 있는 사무실...
그의 혼잣말은 내 귀에 생생하게 들린다.
이건 그냥 나 들으라고 하는 말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말이다.
[조금 있으면 업무 시작이야. 그리고 지금 사무실 분위기가 엄청 안 좋으니까. 제발, 나 퇴근한 후에 이야기하자고.]
[왜 항상 오빠는 그런 식으로 나와 대화를 거부해. 난 지금 당장 이야기 해야겠어.]
[소영아... 제발... 좀...]
[내가 왜 항상 오빠의 연락을 기다려야만 하냐고?]
[그래. 미안해. 그러니까 퇴근 후에... 이야기하자니까.]
[내가 분명히 싫다고 했지. 지금 당장 전화해. 문자로 이러는 거 너무 답답하니까.]
어차피 조금 있으면 업무 시작이다.
직원들이 하나둘 들어 올 시간이고
특히나 김 과장은 거의 폭발 직전 상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지소영은 눈치 없이 나와 전화 통화를 원한다.
분명 통화를 시작하면 금방 끝날 대화가 아니다.
[내가 퇴근하고 바로 연락할게. 그러니까 좀 참아.]
[싫어.]
지이이잉... 지이이잉...
갑자기 지소영은 내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핸드폰 진동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잖아. 빨리 받아."
"아... 예. 별로 중요한 전화가 아니라서요."
틱...
난 빠르게 통화 거절로 끊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급한 전화인 거 같은데 좀 받아. 내가 직원 전화 하나 못 받게 하는 쫌생이도 아닌데 왜 그래..."
"아... 아닙니다."
난 또 통화 거절을 눌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이봐. 좀 받으라고. 진동 소리가 계속 들리잖아!"
"아... 네..."
어쩔 수 없었다.
핸드폰으로 오는 연락을 받으려면 전원을 끌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아예 무진동 무음으로 하는 것.
그러면 다른 외부 전화를 받기 위해서 책상 위에 잘 보이는 곳에 핸드폰을 두어야 한다.
그런데
소음과 진동은 사라진 내 핸드폰 액정 화면에는
내가 지소영 뺨에 뽀뽀를 하는 사진과 함께...
지소영이 원했던 애칭이 계속해서 떴다.
... 나의 사랑하는 예쁜이...
... 나의 사랑하는 예쁜이...
.
.
.
... 나의 사랑하는 예쁜이...
... 나의 사랑하는 예쁜이...
.
.
.
이건 고문이다.
그래 고문...
고문은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게 목적이다.
그게 육체가 되었든 정신이 되었든.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 때문에
말해선 안 되는 걸 말하게 만드는 게 고문이다.
지금 지소영은 나에게 고문을 하고 있다.
나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는...
그런 고문...
출근 시간 마감 얼마 전...
사무실에 직원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모두 이어팟 이나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고개만 까닥이는 형식적인 인사인지 목운동을 하며
사무실에 이미 와 있던 과장이나 나에 대해선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잘 들 한다... 잘 들 해. 어떻게 된 게 이 사무실에는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도 없냐?"
사무실에 들어온 직원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자리에 앉아 업무 준비를 하고 있다.
쾅...
그때 갑자기 김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책을 책상 위에 강하게 내리꽂았다.
순간 사무실에 있던 모든 직원이 김 과장을 바라보았다.
"이 새끼들이 오냐오냐 하니까. 내가 바보 병신으로 보이나? 야! 귀에 꽂은 거 전부 빼!!!"
하지만 직원들은 그 모습을 잠깐 보더니 그러거나 말 거 나다.
날 상황을 중재해야 했지만.
핸드폰에 계속 뜨고 있는 지소영 전화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 나의 사랑하는 예쁜이...
... 나의 사랑하는 예쁜이...
.
.
.
... 나의 사랑하는 예쁜이...
... 나의 사랑하는 예쁜이...
.
.
.
이건 나의 사랑하는 예쁜이가 아니라.
나의 악마 같은 마녀였다.
"최대리... 넌 직원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이렇게 개판이야!!!"
갑자기 김 과장의 분노가 나에게로 쏟아졌다.
하지만 난 그것보다 지소영이 끝없이 거는 전화 때문에 어쩔 줄 몰라했다.
"아니. 그렇게 핸드폰만 뚫어져라 보면 뭐가 나와!! 직원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열받은 김 과장이 자리를 박차고 내 자리로 빠르게 오고 있었다.
내 핸드폰 액정 화면에 찍힌 지소영과의 사진을 보다가 다가오는 김과장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김 과장을 피해 내 핸드폰을 얼른 책상 서랍에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과장님 지금 이러는 건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지금 업무 시간인데요!"
그때 신입 사원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김 과장에게 소리쳤다.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뭐라고 했냐고?"
김 과장은 죽일 듯 신입 사원을 향해 다가갔다.
난 얼른 일어나 김 과장을 붙잡았다.
"과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 놔... 최대리... 이거 놔라. 지금 저걸 보고도 날 말리는 거야?!!"
내가 김 과장을 붙잡고 실랑이를 하는데 신입 사원이 우릴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가 당신 아들도 아닌데... 왜 자꾸 반말인데."
신입사원은 김 과장 앞까지 와 눈을 부라렸다.
28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