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된 후의 첫 수필
내 기억 속의 수필이란 자신의 경험과 주관을 양분으로 이야기를 자유롭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풀어가며 여러 가지를 꽃피우는 것이었다. 10여 년만에 펜을 따라서, 펜 가는 대로 자유롭게 글을 써보자니 첫 문장을 향한 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새삼스레 다시 느껴지는 며칠이었다.
이처럼 옛말이란 잊힐 때쯤 다시 찾아오는 도도함과, 다양한 위로와 조언을 건네주는 다정함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조상들의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옛말들이 많고 이 말들은 강물처럼 때론 넘치고, 때론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며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흘러내려 들어온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길을 찾으며 스스로를 다듬는다. 이제 그 속에서 내가 건져 올린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화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하다, 위기라고 느껴져도 그것이 곧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의 전화위복이 그 첫 번째이다. 비슷한 결의 새옹지마와 호사다마 같은 다른 구절도 있는 만큼 여러 번 주고받음을 겪으며 만들어진, 모두가 볼 수 있는 진리이다. 실제로도 전화위복이란 말은 과거와 현재까지 나에게 조언과 위로를 해주었고 미래에도 해줄 것이다. 과하게 기뻐할 때면 화가 찾아오고, 과하게 슬퍼하다 보면 복이 찾아왔다. 수능을 준비하던 수험기간, 2014년의 코인대란, 그리고 병원 실습을 돌며 다양한 임상경험을 하던 PK시기를 포함해 인생이 기회라는 이름으로 나를 시험할 때, 그 시험의 답안지는 정답은 없다는 듯이 매일 같이 변화했다. 어제는 잘 풀리던 것 같은 일이 오늘이 되면 언짢은 일이 되어버리기 일쑤였지만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전화위복이라는 옛말이 건넨 조언에 귀를 기울였기에 빠르게 체화하여 마음의 넉넉함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인생이라는 책에 마침표가 찍히기까지 하나하나의 문단이 화인지 복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전화위복이라는 옛말이 속삭이는 지혜에, 우리는 더 깊이 귀 기울여야 한다.
물론, 옛말은 단순한 오래된 지혜의 결정이 아니다. 그 속에는 지혜뿐만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 세상을 대하는 마음가짐까지 녹아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옳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상황의 풀이만이 아닌 사람다움의 기준을 함께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다.
올바르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이끄는 이정표 중 하나인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다, 상대방을 이해해야 온전한 공감을 이룰 수 있다는 역지사지가 그 두 번째이다. 인간은 온전히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살아가는 세상일이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상대와의 교류이다. 어떤 관계이든 익숙해지면 우리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기준으로 생각하고 재단하며 이 과정에서 충돌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경향이 생길 때, 역지사지를 떠올리고 그 동력으로 조금만 자리를 바꿔 선다면, 어떤 관계에서든 원만한 합의를 이루어 낼 수 있다.
나의 뇌리에 역지사지라는 단어를 사라지지 않게 새겨준, 의사로서 만난 한 노인에게 지금도 감사한다. 그 노인은 기억이 자주 흐려지는 주호소를 호소하며 방문했다. 흔히들 말하는 알츠하이머성 치매로 먼 과거뿐 아니라 바로 직전의 대화마저도 흐려지기 일쑤라 그로 인해 외래에서 매번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반복해야만 했다. 같은 질문을 반복하기를 열 번이 넘어가자, 처음에는 시계를 훔쳐보며 답답함을 곱씹었다. 그 횟수가 백번이 넘어가면서 답답함마저 무뎌질 즈음에 그 생각은 문득 찾아왔다. 내가 만약 저 노인이었다면, 언제 기억을 잃을지 모르고 나 자신을 나라고 느끼지 못한다는 그 불안 속에서, 의사의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한마디 다시 한번 질문해야 하는 그 마음은 어떠할까. 필시 외롭고 간절할 것이다. 그 감정과 생각이 내 가슴속에 닿는 순간 내 목소리는 조금씩 달라졌다. 느리게 말하고 최대한 또렷하게 전달하며 반복하며 설명했다. 노인이 떠나가며 남긴 고맙다는 말은 내 뇌리에 지금도 남아있다.
일상 또한 다르지 않다. 다만 너무 잦기에 역지사지의 마음을 언제나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자기 잣대로 기울려는 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멈춰 서서 반대편에 있는 상대방의 그림자부터, 전체를 보고 이해하게 된다면 사람 사이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부드럽게 타고 흐르며 살아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수필을 적은 이유이자 증명해야 하는 마지막 진리인 권선징악이다. 많고 많은 옛말 중에서도 유독 자주 언급되는 권선징악, 나 역시도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선을 행하면 좋은 과실이 찾아오고 악을 저지르면 끝이 나쁘다고 믿었다. 학교의 도덕 교과서도, 티비 속 드라마도, 어른들의 훈화 소리도 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악한 자는 착하게 사는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다고. 하지만 해가 가면 갈수록 느끼는 것은 선한 사람이 늘 웃는 건 아니고 악한 이가 늘 무너지는 것도 아니었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거짓이 진실을 덮고, 욕심이 성실을 이기는 순간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 성실하게 노력해도 가난하고 대우받지 못하는 친구, 남을 위해 마음 쓰며 도와주다 오히려 그 선함을 이용하려고 다가오는 자들에 의해 해를 입은 친구들. 그들에게 있어서는 권선징악은 진리나 위로가 아니라 단순한 비웃음이었다.
나는 늘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믿었던 진리는 진정한 진리였을까, 아니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낸 허상일까. 다르게 생각해 보면 누군가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거짓을 말하기도 한다. 나에게 선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는 악한 사람일 수도 있다. ‘지구는 평평하다’라는 주장처럼 옳고 그름도 시간, 공간,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듯이 선과 악 역시도 그렇게 단순한 이름표가 아니기에, 애초에 법칙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마음 한편에 의심이 생기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선을 택하고 싶다.
세상은 때때로 빛보다 어둠이 더 빠르게 퍼지고 가끔은 정의는 무심한 바람에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옛말들은 늘 그렇지 않았는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의 경험 속에서 진실로 남아 전해져 온 것이 바로 그 옛말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나는 그 말이, 권선징악이 이번에도 틀리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선을 믿고 행하는 것에 있어서 아무 보상이 없어도 좋다. 그저 내가 듣고 봐오면서 배운 나의 사람다움의 기준이 옳고 내가 사람이라는 증거로서, 선함이 마지막에는 승리하기를 조용히 바란다. 언젠가 내가 믿는 그 권선징악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깨닫기까지, 내 곁에서 조언을 건네는 지혜가 절대적 지혜라고 확신하기까지, 바라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