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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9월

by 온호

인생에 원래 쉬운 날이야 계곡에서 사금을 찾듯 공들여 찾아야 겨우 하나 나오곤 하는 것이겠지마는 지난 9월은 내 평소의 한 달들과 달리 조금 더 편치 않았다.


매일매일 피곤하기도 하고 잘하고 있는건가 의심이 들기도 하고 자신감이 떨어지기도 많이 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남들보다 뛰어난 부분이 있지만 9월에는 남들보다 뒤처지는 부분을 계속해서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힘들고 지칠라치면 습관처럼 몸에 밴 '살기 싫다' 소리가 막을 새도 없이 속에서 불쑥거려 나를 놀라게 했다. 그래도 "사랑해"하며 말해주고 느리고, 헤매고를 꾸준히 반복했다. 힘든 만큼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고 배울 수 있는 기회고 성숙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들이 기껍기까지 했다.


열심히는 하지만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할 수 있다는 것도 미리 염두에 둔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마음에 여유가 생겨 이렇게 회고록을 작성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한 달동안에 자주 봤었던 아저씨와 백구 한쌍의 모습이 잔잔한 위로와 힘도 됐었다.




기지개 마스터

매주 금요일마다는 서울시 고립은둔 청년 지원 기관인 기지개센터에서 기지개 마스터라는 졸업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ai를 활용한 자기서사 브랜딩, 에세이, PPT 발표 준비와 연습을 했다. 그 과정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다. 한 번 고개를 쳐든 반감은 아무리 잘 타일러도 계속해서 내게 영향을 끼쳤다.


참여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숙제도 제법 있었다. 그것도 스트레스였다. 학교 강의도 난해하고 기술교육원 진도 따라가기도 벅찬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땐 일단 시작하는 게 낫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에 시간이 있을 때마다 숙제부터 했다. 쉬는 시간을 너무 충분히 가질 필요는 없다고 인정하고 핸드폰 보는 시간을 줄여 좀 더 절박한 사람처럼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그래도 머리속에서는 하지 않을 이유를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건 결국 내가 그 일이 맘에 들지 않고, 어렵게 느끼기 때문이고, 편한 것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현상을 유지하고 싶어 나오는 목소리라고 이해했다. 목소리의 요청을 거부하고 내 능력 안에서 숙제를 다시, 다시 건드리며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지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음 단계를 진행하고 있다. 풍선에 바람을 조금씩 불어넣는 것처럼, 힘듦을 조금씩 불어 넣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풍선을 터뜨릴 때 그만큼 더 신이 날 것이다.


졸업 시험

학교 졸업 시험 공부도 했다. 시험 날짜가 나왔는데 학교 외부 행사 준비만 계속 하고 있으니 불안했다. 그래서 하루이틀 벼르다가 공부에 착수했다. 자료를 받아 보니 영어 시험이라는 것을 빼면 문제는 아주 쉬운 수준이었다. "인적자원 및 조직관리, 생산운영관리, 마케팅, 재무, 경영 정보 시스템" 이렇게 경영학 다섯 분야의 최소한의 기초를 점검하는 수준이었다. 시름 거리를 하나 또 없앴다.


치과 치료

매주 목요일마다 도서관 근로를 한 시간 일찍 마치고 다닌 치과도 오늘로 모든 치료가 끝났다. 인레이 한 치아를 추석을 쇠고 나서 점검만 한 번 받으면 된다. 사랑니 세 개를 뽑고 충치 두 개를 치료했는데 오른쪽 충치는 크라운, 왼쪽 충치는 인레이를 했다. 속이 다 후련하다. 과거의 내가 어차피 죽을 거라고 관리 안 한 것의 뒷수습을 고스란히 지금의 내가 했다. 수습이 됐으니 됐다.


레몬청

민트를 좋아하는 엄마가 맛있게 먹을만한 민트레몬청을 만들어 두었다. 대가족이 한 번씩은 먹을 수 있을만큼 충분한 보통의 레몬청도 같이 만들어두었다. 팬시 레몬을 가지고 전에는 광기 수준의 집착이라고 생각했던 흰껍질 제거 작업까지 해서 만들었고, 벗겨둔 껍질은 모두 제스터로 빈틈없이 갈아 레몬 제스트를 더했다. 그 결과 내가 아는 한, 더 나은 레몬청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정도로 정말 맛있는 청이 완성됐다. 까먹지 말고 잘 챙겨가기만 하면 된다.




내가 힘들려고 편안한 집에서 나왔다. 살아있으면 반드시 겪게 되는 일련의 고통을 나도 겪고 싶어서. 시작한 이유를 생각해보니 그렇다. 매일매일 자잘자잘한 불편함이 득실거리고 있는 요즘 생활이지만 10월도 9월만큼만 건강하고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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